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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원의 시네마 크리티크] <메트로폴리스>,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디지털 종속
[이수원의 시네마 크리티크] <메트로폴리스>,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디지털 종속
  • 이수원(영화평론가)
  • 승인 2025.01.3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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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SF의 전성기다. 공공연히 SF를 시대정신으로 내세우는 학자들도 상당수다. 21세기 현재, 영화에 한정해 보더라도 동 장르가 독자적으로 혹은 타 장르와의 혼종을 통해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게 현실이다. 지난 몇 년 간 인간과 기계의 경쟁, 사이보그나 안드로이드의 활약과 고뇌, 가상인간의 경계 등을 다룬 소위 ‘포스트휴먼’에 관한 영화들이 상대적으로 주목받았지만, 과학기술의 고도화와 그로 인한 기계의 지배, 소수 권력자에 의한 사회 통제 등 조지 오웰의 『1984』가 널리 설파한 SF의 또 다른 주제 역시 여전히 시의성을 갖는다. 이러한 주제들은 사실 본질적으로 연관되어있기도 하다.

포스터
포스터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20년대 독일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SF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는 과학기술이 급격히 발전한 사회에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 인간의 미래를 다룬다. 육체노동자의 기계 종속과 오늘날 훨씬 많은 대중의 디지털 종속의 근저에 과학기술과 인간 착취를 무기로 한 신에 대한 도전이 공통으로 자리함을 일깨우는, 시간을 이겨낸 고전이다.

 

독일 전체주의에 대한 예고

 영화를 읽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러나 어떤 영화가 탄생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독해는 반쪽짜리로 흐르기 쉽다.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보다 풍부한 해석 역시 1930년대 중후반 극우파의 강풍이 유럽에 휘몰아치기 직전 이미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전체주의 풍토에 대한 인식을 전제로 한다.

 시대의 징후는 상하층으로 명확히 구분된 엄격한 권위주의 사회와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 개인성 말살 등에 의해 표현된다. 영화 초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중간자막과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중간자막은 각각 지하층에서 살아가는 하류층 노동자들과 꼭대기에서 도시를 지배하는 상류층 청년들 간의 경계를 강조한다. 먼저 죄수마냥 유니폼을 입고 복종적으로 고개를 숙인 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노동자 무리는 나치가 운영했던 절멸수용소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타자의 연설에 좌지우지되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모습은 나치즘에 열광한 당시 독일 대중의 표상으로도 읽힌다. 그들은 마리아의 설교에 감복해 중재자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하다가도, 기계-마리아의 선동에 휘둘려 떼로 몰려가 지하층의 기계들을 부숴버리기도 한다. 다음으로 존 프레데슨과 그가 통치하는 도시(city)’의 면면을 담은 영화 초반 초고층 빌딩 옥상에서 벌어지는 그의 아들 프레더와 상류층 청년들의 육상 장면은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 간의 차별 및 그 기준이 되는 강건한 신체 숭배라는 나치즘의 이념과 연결된다.

 프리츠 랑 자신은 나치즘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메트로폴리스>를 본 독일 극우 정부는 랑에게 국가영화국 수장 자리를 제안했다고 하니(랑은 이를 거절하고 익일 독일을 떴다), 여러 비평가들이 언급한 이 영화의 양면성 내지 모호성의 기원에는 극의 전개에서도 엿보이는 감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자리할 수도 있을 듯하다. 결국 랑의 망명 이후 이 영화는 온갖 난도질을 당하는 운명에 처한다.

 

과학과 기술, 프랑켄슈타인의 도구

 인종 우월주의를 주된 이념으로 삼았던 나치즘은 장애인이나 LGBT를 유대인에 버금가는 말종으로 취급했고, 공공연하게 처리했다. 인류사에서 최악으로 손꼽힐 만한 오만함의 발로다. 비록 근대 이후 신의 존재가 미미해지긴 했으나, 인간의 오만한 행위는 흔히 천벌 받을 짓’, 달리 말하면 신의 응징 대상으로 간주된다. <메트로폴리스>는 그런 가공할 짓의 도구로 크게 과학기술, 그리고 같은 인간에 대한 착취(곧 생명 박탈)를 제시한다.

 그중 과학기술을 무기로 창조주에게 도전하는 인간의 서사는 흔히 프랑켄슈타인 신화와 연결된다. 랑의 영화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 로트왕은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후예라 할 만한 인물로, 다양한 실험기구로 가득 찬 연구실에서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로봇을 창조해낸다. 메리 쉘리의 고전소설 속 괴물이 실제 죽은 사람들의 신체 부위들로 구성된 일종의 유기체인데 반해, 프리츠 랑의 영화에서 로트왕의 피조물은 강철에 기반한 비유기체 로봇이다. 다만 로봇이 마리아와 합체될 때에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탄생할 때처럼 전기가 작용한다. 로트왕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 헬(Hel)의 재창조물인 이 로봇을 그녀의 남편이었던 프레데슨에게 소개할 때, “미래의 인간은 기계-인간(Machine-Man)’”이라고 외친다. 표현주의적으로 강조된 광기어린 눈빛과 몸짓, 외침에는 기계생명체의 창조주로서 만끽하는 희열이 깃들어 있다.  

 

인간과 기계의 합체 실험
인간과 기계의 합체 실험

 흥미롭게도 이 로봇은 안드로이드로 변신한다. 창조주가 예상하지 못했던 길을 걷게 될 이 기계-인간은 도시의 지배자인 프레데슨이, 마리아를 사랑하게 되어 노동자들의 편에 선 아들 프레더의 마음을 돌려놓고자 로봇에 그녀의 얼굴과 외양을 입히도록 명령한 결과물이다. 초기 SF물인만큼 변신 장면에서 과학적 설명 내지 설득 절차는 생략된다. 로트왕의 실험실에서 로봇과 정신을 잃은 채 잡혀온 마리아가 복잡해보이는 전자기기에 의해 접속됨으로써 안드로이드형의 기계-마리아가 몇 초만에 탄생할 뿐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실화된 기계와 인간의 합체에 관한 실험을 영화사 초기에 선견한 장면이라 할 만하다.

 인간 마리아와 쌍둥이처럼 닮은 안드로이드-마리아는 프레데슨이 구축한 도시에 혼돈과 타락, 갈등의 씨앗을 뿌리며 선을 상징하는 인간 마리아와 대척점에 선다. 선정적인 춤과 공연을 통해 상류층 남자들을 현혹시킨 뒤 그들의 난동을 초래하면서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을 구현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지하층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기계를 죽이러가도록 이끎으로써 메트로폴리스를 상하로 휘젓고 다니며 파괴를 시도한다. 창조주의 통제에서 벗어난 기계의 반란이라는 SF의 주제를 성경의 디스토피아적 종말과 연결시킨 이러한 연출은, 과학기술이 주조한 피조물의 한계, 바꿔 말하면 인간의 한계를 암시하며 뚜렷한 종교성을 띤다. 안드로이드-마리아가 여러 SF 피조물들처럼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화형에 처해져 인간의 외피에 가려진 로봇이라는 실체를 드러낼 때, 기계는 급기야 마녀와 동일시된다.

 

바벨탑 혹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프랑켄슈타인 신화와 함께 <메트로폴리스>의 연출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신화로 바벨탑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우선 직접적인 대사(중간자막)로써 선을 대변하는, 그야말로 천사 같은 마리아가 노동자들이 모인 앞에서 구약성서의 이 유명한 일화를 설파한다. 비밀 회동은 권력층의 눈을 피해 열리는데, 그 장소가 카타콤이며 십자가의 존재와 경청하며 기도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인해 매우 기독교적 색채를 띤다. 널리 알려진 바, 바벨탑 신화는 인간이 신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새롭게 구축한 도시 중심에 신 가까이 높게 탑을 쌓으려 했다는 게 주 내용이다. 결말은, 역시 널리 알려진 바, 신의 인간에 대한 응징이며, 인간들은 언어 분화로 인해 소통이 불가능해져 뿔뿔이 흩어지고 바벨탑은 미완으로 남는다. 

 

바벨탑 형상과 도시의 오버랩
도시 전경과 삼각형 탑의 오버랩

 이 신화에 대해 마리아는 한 권력자의 꿈이 다수의 저주가 되어버린 이야기라고 서두를 떼며, 이후 영화의 흐름상 바벨탑은 프레데슨이 세운 도시에 대한 은유로 작동한다. 그런데 랑은 직접적인 서술과 액자구조로 연출된 바벨탑 장면 이전 이미 영화 초반에 도시 전경과 삼각형 탑의 오버랩 숏을 통해 시각적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입부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하면 영화의 주제의식을 바벨탑 이야기와 연계시켜도 될 만한 까닭이다. 특기할 점은 랑이 창세기에 기록된 동 사건의 핵심을 인용하되 변형을 가하여 기계에 의한 인간의 종속, 권력자에 의한 다수의 통제라는 SF적 주제를 살린다는 데 있다. 고대를 배경으로 한 바벨탑 장면에서 탑을 쌓기로 하는 권력자의 결정과, 이를 위해 도구로 소비되는 손들(Hands)’ 즉 다수 노예들에 대한 육체 착취, 나아가 그들의 반란은 프레데슨이 통치하는 도시의 지하층에서 기계에 종속된 채 끊임없이 일하던 노동자 무리의 봉기와 맞아떨어진다. 이 영화에서 과학기술에 기반한 모던 프로메테우스의 신에 대한 도전이 온전히 인용된다면, 바벨탑 신화의 변형 혹은 확장은 신의 응징 대상인 인간의 오만이 동일한 인간에 대한 우월의식에 토대를 두고 소수 권력자에 의한 다수의 착취로써 실현된다는 유추된 의미를 부각시킨다. 그럼으로써 영화는 당시 전체주의의 득세라는 시대적 배경과도 연결된다.

 <메트로폴리스>에는 종교적이고 고전적이라 할 만한 신과 인간, 선과 악에 관한 직접적, 시각적 언급이 두드러지는 동시에,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권력자에 의한 통제 및 처벌이 통용되는 사회와 기계-인간의 디스토피아적 위협에 대한 SF적 경고도 들어있다. 그럼에도 영화 말미에 인간이 기계 없이는 못 산다는 다소 갑작스런 변에 이어 상하층이 화해하게 되는 설정은 이 영화가 모호성을 띤다는 평가의 근거 중 하나로 다가온다.

 

디지털 종속의 만연

 20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메트로폴리스>에서 프리츠 랑은 기계에 의한 인간의 종속을 예견했다. 컴퓨터가 상용화되지 않았던 근대에, 권력자는 고층 건물에 들어앉아 몇 가지 특수한 기계를 통해 자신이 착취하는 하층민들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 후 SF는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고 기계와 인간의 관계는 다양한 변주를 겪었다. 랑의 영화에서 과학보다는 마술에 근접한 기술이 탄생시킨 기계-마리아보다 (이론적으로나마) 신빙성을 갖춘 안드로이드들도 스크린상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로봇 역시 나날이 발전한 결과 스크린을 뛰쳐나와 우리 일상에까지 등장하게 됐으니, 여러모로 인간의 삶에서 기계는 동반자의 자리를 꿰찬 셈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메트로폴리스>의 모호한 결말이 불러일으키는 경각심은 하트 컴퓨터를 담당하는 노동자의 기계 없이는 인간이 살 수 없다예언이 실현되었다는 사실에만 기인하지는 않는다. 이 영화를 통해, 디지털혁명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는 21세기 현재, 특정 권력자에 의한 육체노동자층의 통제를 넘어 모든 인간 혹은 거의 모든 인간으로 확장된 기계 주도의 착취를 고민하게 되었다면 과도한 비약일까.

 동시대에 디지털에의 종속은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동시에, 개인 단위에서 자발적, 중독적 속성을 띠고 퍼져나가고 있다. 디지털은 자본주의 세계를 추동하는 거대한 동력으로 확고히 자리잡았으며, 로트왕 같은 과학자와 프레데슨 류의 지배층의 오만과 신에 대한 도전이 거부하기 힘든 인간의 편리를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이 제공하는 편리와 쾌락에는 반드시 반대급부가 따르기 마련이어서, 이를테면 많은 대중이 의식하지 못한 채 빅데이터의 구축에 일조하며 통제 및 착취를 당하고 있거나 서버 구축과 부품 마련을 위해 환경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메트로폴리스>의 상황을 넘어, 기계가 디지털의 형식을 취한 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수를 지배하는 파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푸코가 언급한 판옵티콘에 의한 감시와 처벌과 일맥상통하면서도 다소 상이한, 새로운 종류의 통제와 착취가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메트로폴리스>가 신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라는 고전적 테마를 부각시킨다는 점은 명확하다. 랑이 생각했던 신의 입장에서라면 디지털화와 그 여파는 응징 대상으로 보일 것이다. 혹은 신이 아니더라도 세계나 지구가 오늘날 디지털 종속의 만연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게 될지는 이미 예견 가능하다. 다만, 늘 그렇듯, 인간이 너무 늦지 않게 각성할 수 있을지가 미지수다.

글·이수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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