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궁상과 실소
궁상과 실소
  • 김형중
  • 승인 2012.11.12 2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정영문의 소설에 대하여

<무제>, 2011-마르셀로 수아즈나바르

올해 한무숙문학상과 동인문학상, 그리고 대산문학상을 한꺼번에 거머쥔 정영문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작가가 그리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어떤 작위의 세계>(문학과지성사·2011)의 화자(자신의 미국 표류기라고 했으니, 화자는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는, 소설 중간에 불쑥 작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미국의 송어낚시> 이후 독자와 평론가들 모두에게 철저히 외면당하는 소설들을 썼다는 얘기를 꺼낸다. 그러고는 "그런 작품을 쓰는 것은 작가가 꿈꿀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이기도 한데 그것을 꿈꾸는 작가는 너무도 없다"(<어떤 작위의 세계> 75쪽, 이하 같은 책)며 한국의 문학 현실을 개탄한다. 이제 그 탄식과 마주 대하고 보니, 그가 바라는 대로 그를 철저하게 외면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로서는 그로 하여금 이상적인 작가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일조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이제 결코 외면당하려야 외면당할 수 없는 작가가 돼버린데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평론가와 독자들이 그를 외면하던 시절(다행히도 그는 독자도 상복도 많은 작가가 아니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그의 독특한 문장에 대한 호기심 탓에 그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어떤 수학적 공식 하나로 집약해보려 한 적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 공식은 이런 것이었다. (1-1)+(1-1)+(1-1)·····=0. 이 공식은 그의 문장이 독서 과정의 끝까지 독자들에게 남겨주는 의미란 없음을 지시하기 위해 고안한 것인데, 그 시절 그의 소설에는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이 부지기수로 발견되었다.

'며느리는 안방에서 낮잠을 즐기고 있겠지? 그녀는 자고 있는데 내가 소리를 내 방해하면 싫어한다. 그런다고 내가 조심을 하는 건 아냐.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보며 뭘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지는 않아. 뭘 하거나 하지 않으면서 누구의 눈치를 보는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집 안에 있을 때면 될 수 있는 한 조용히 하려고 하지. 물론 가끔은 조용히 하려다 보면,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되는 일이 있긴 해. 목청을 다해, 목청이 부서질 것만 같은,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소리를 내지르기도 하지.('무게 없는 부피', <더 없이 어렴풋한 일요일>)'

인용한 문단은 간단히 다음과 같은 세 문장으로 요약 가능하다. '낮잠 자는 며느리는 조심을 요구하지만, 나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나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 같지도 않지만, 되도록 집 안에서는 조용히 한다', '내가 원해서 조용히 하려다 보면, 원치 않게 소리를 지르게 되기도 한다', '목청을 다해 소리를 지르지만,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요컨대, 뒤따르는 문장이나 절이 앞 문장이나 절의 의미를 번복함으로써 스스로 의미를 삭제해버리는 무의미한 문장들의 행진, 그것이 정영문이 즐겨 쓰(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문장 구조였다. 그러므로 저 공식은 비교적 정확한 편이었는데, 이제 유명해진 <어떤 작위의 세계>를 읽자니 여전히 저 공식의 유효성은 다하지 않은 듯하다. '끝까지 들어(읽어)봐야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한국어, 특히 '부정문' 덕분이다. 다음의 예문을 보자.

벤저민 프랭클린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막상 그의 동상 앞에 서자 그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다.(72쪽)

손가락에 느껴지는 미끈거리는 감촉을 떠올리며 메기 고기 한 점을 먹었는데, 그것이 마들렌 과자처럼 나를 그 시절로 데려가주지는 않았다.(107쪽)

엄밀히 말해, 위 문장에 문법적 오류는 없다. 그러나 두 문장 모두 공히 독자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문장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평소 벤저민 프랭클린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더라도 (정영문이 아닌) 이방인들은 흔히 그의 동상 앞에 서면 갑자기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그런 의미에서 최후의 부정 어미 '않았다'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 문장에 대해 기대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프루스트>를 읽지 않아서 설사 그 유명한 마들렌 과자에 대해 모른다손 치더라도, 유년기에 메기의 미끄러운 피부 감촉을 느껴본 사람이면 후에 성인이 되어 다시 같은 감촉에서 자신의 유년기를 상기해내지 않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두 번째 문장의 종결어미 역시 부정어일 것이라고 짐작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문장 안에서 내내 기대되고 예측되던 어떤 의미를 최후의 종결어미에 의해 순식간에 삭제해버리는(한국어스럽기 그지없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그는 일각의 비판과 달리 사뮈엘 베케트의 아류가 아니다) 위 두 문장의 공식은 여전히 '1-1=0'이다. 정영문의 글쓰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이 무의미 지향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어차피 정영문의 소설을 외면함으로써 그가 이상적 작가의 대열에 오르도록 돕기는 틀려버린 판이니, 오늘 나는 저 공식에 또 하나의 공식을 더할 참이다. 이전 소설에 비하면 <어떤 작위의 세계>의 문장에서는 다른 공식 하나가 더 추출될 수도 있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1+1+1+1+1+1+1+1+1······)×0=0. 이 공식은 서사 전개나 주제(그런 게 있다면)의 심화에 의미 있(어 보이)는 문장이 문단이나 장(章)을 이룰 만큼 길게 나열되고 누적되었다 하더라도, 정영문 소설 속에서 그것들은 일거에 무의미해질 수 있음을 지시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그 가장 적절한 예는 <어떤 작위의 세계> 아홉 번째 장인 '내가 매사에 의욕이 없어 태평양을 떠돌지 못하게 된 과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145~152쪽까지 무려 일곱 페이지에 걸쳐, 화자는 몸소(정영문의 화자나 주인공으로서는 참 이례적인 부지런함인데) 비바람이 심하게 치는 금문교 위에서 많은 종류의 과일과 한 종류의 채소(양파)를 던져 넣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그것들이 태평양을 떠도는 장엄한 상상을 한 후, 그 장이 끝나갈 즈음 돌연 이런 말을 뱉는다.

하지만 내가 한밤중에 과일들과 양파를 금문교까지 갖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태평양을 떠돌게 할 수 있게 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할 의욕조차 없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내가 매사에 아무런 의욕이 없어 침대에 조용히 누워 상상한 것이었다. 결국 내가 매사에 의욕이 없어 과일들을 태평양을 떠돌지 못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본래 이 글은 내가 매사에 의욕이 없어 태평양을 떠돌게 된 과일들에 관한 것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내가 매사에 의욕이 없어 태평양을 떠돌지 못하게 된 과일들에 관한 것이 되고 말았다.(152쪽)

내내 공들여 읽어온 장 전체의 문장이, 기실은 일어난 적이 없는, 오로지 매사에 의욕이 없어 과일들을 태평양에 내다버리지 못한 화자의 상상 속에서만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이었음을 실토한다. 이를 두고 무의미한 문장들의 평면적 누적으로 이루어진 덧셈 공식이, 유의미한 문장들의 더미 전체를 일거에 무화시켜버리는 곱셈의 공식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해서 과장은 아닐 듯싶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영문이 이제 여러 공식을 자유자재로 사용해 무의미한 세계에 대해 무의미한 문장으로 대적하는 그 오래되고도 기이한 작업을 여전히, 계속해서, 질리지 않도록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작가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독자 앞에서 또 한 번 크게 '궁상'을 떨었고, 이때 그 궁상 앞에서 독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웃음'이다. 프로이트를 인용할 것도 없이 '웃음'이란 곧, 기대되는 이후의 사태에 대해 집중될 준비를 하고 있던 심리적 에너지가, 그 기대의 배반과 함께 폐와 성대로부터 방출되는 어떤 소리로(정영문 독자의 경우 '피식!') 해소되는 신체적 현상을 일컫는 것이 맞다면 말이다. 정영문 소설을 읽으면서 문장 말미 혹은 문단이나 장의 말미, 바로 그 배반당한 기대 때문에 웃는다. 아니 웃어야 하고, 또 웃는 게 맞는 독법이다. 그런데 웃음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바, 이때 웃음은 그중에서도 가장 실없는 웃음, 곧 '실소'(失笑)여야만 한다. 그러니까 정영문 소설을 두고 벌어지는 혹은 벌어져야 하는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작가는 궁상을 떨고 독자는 실소를 금치 못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궁상과 실소라니. 이제 외면하기 힘들 만큼 존재감이 커져버린 작가의 작품에 주어지는 수사치고는 너무 하찮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실은 그가 떠는 궁상이 베케트나 카프카, 혹은 이상의 궁상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터뜨릴 실소가 세계 전체에 대해 터뜨리는 실소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자는 자신이 떠는 궁상을 두고 "일종의 정신적인 형태"로서, "어쩌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자 하면서 기어코 떨어지고자 하는 어떤 정신적 분투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한다. 또 "궁상은 가혹하게 권태롭고 무의미한 이 세계에 맞서기보다는 패배를 받아들이며 백기를 흔들면서 속으로 웃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이 말에 따르면, 겉으로는 무의미한 세계 내에서 무위도식과 언어유희와 기행을 계속하며 매일을 궁상떨 듯 살아간다 하더라도, 만약 그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한다면 그것은 '정신적 분투'가 된다. 그때의 웃음은 세계 전체의 무의미함에 대한 조롱이자 가장 완고한 거부이기 때문이다. 세계를 향해 대드는 자보다 항상 더 무서운 자는 무심히 웃으며 세계를 조롱하는 자다. 그에게는 아예 세계에 참여할 의사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카프카와 이상 같은 작가들이 그 점을 가장 잘 보여주었"는데, 화자에 따르면 우리가 다만 조심할 것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의식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그것을 떨어야"(65쪽)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의도적으로, 웃음의 의미를 개관하면서 터뜨리는 실소만이 세계에 대한 '복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라고 했거니와, 소설 말미 정영문의 '소설 복수론'은 따로 경청할 만하다.

한데 소설에 대한 복수 말고도, 나는 소설을 통해 뭔가에 복수를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것이 뭔지는 확실치 않았다. 샌드위치를 먹고 있자 내가 소설을 쓰는 것은 무와 무의미, 그리고 존재의 근거 없음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내가 오래전부터 해온 것이었지만 그렇게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고, 그러한 표현으로도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무와 무의미, 그리고 존재의 근거 없음에 대한 복수라는 표현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고,…처절한 복수를 되새기며, 그 복수를 하기 위해서는 더욱 기이한 생각들을 하며 더욱 기이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며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242쪽)

마요네즈가 어떻고 샌드위치가 어떻고 하며 그가 떠는 궁상들, 마치 우연히 생각났다는 듯 혹은 즉흥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뱉는다는 듯 써 내려간 저 문장들의 게으른 어투들, 그런 것들에 대해서라면 역시나 실소를 금치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정영문의 소설에 동참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면서 그가 떠는 궁상과 그가 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흘리게 될 실소가, 전혀 근거라곤 없는 존재와 세계에 대해 얼마만 한 복수가 되는지는 늘 가늠하면서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존재의 근거 없음에 대해 말한 소설적 유산을 거의 물려받아 본 적 없는데다, 유희에 바쳐지고 무의미한 것들을 찬양하는(이것들은 또 얼마나 정치적이고 전복적인지!) 언어에 대해서도 극도로 인색했던 나라의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

글 김형중 문학평론가, 조선대 국문과 교수,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및 <문학들> 편집위원. 저서로 <소설과 정신분석> 외, 평론집으로 <켄타우로스의 비평> <변장한 유토피아> <단 한 권의 책>이 있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유료 독자님에게만 서비스되는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잡지를 받아보실 수 있고, 모든 온라인 기사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온라인 전용 유료독자님에게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모든 온라인 기사들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김형중
김형중 info@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