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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정주할 것인가? 탈주할 것인가? 클로이 자오의 선택 : <내 형제들이 가르쳐 준 노래>, <로데오 카우보이>
[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정주할 것인가? 탈주할 것인가? 클로이 자오의 선택 : <내 형제들이 가르쳐 준 노래>, <로데오 카우보이>
  • 김채희(영화평론가)
  • 승인 2025.01.3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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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 자체가 노매드인 클로이 자오

  1982년 베이징에서 태어난 클로이 자오(Chloé Zhao)는 부모가 이혼하고 사춘기를 맞이할 즈음, 부유한 아버지의 후원으로 영국 브라이튼의 기숙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LA로 거처를 옮겨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매사추세츠로 가서 마운트 할리요크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영화를 공부했다. 졸업 후, 자오는 4년 정도 부동산 사무실 보조와 바텐더로 일했다. 하지만 자오는 그 시절, 지금까지 공부했던 정치학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전공이었던 영화 공부에 매진하기 위해 뉴욕대학원의 티쉬 스쿨에 입학했다. 자오는 스파이크 리(Spike Lee)의 지도하에 티쉬에서 단편 4작품을 연출했고 시놉시스를 서른 개쯤 쓰면서 장편 데뷔를 준비하고 있었다.

  보그(Vogue)와의 인터뷰에서 자오는 “아무도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어딘가로 가서, 제 자신에 대해 알고 싶었습니다. 번잡한 대도시의 삶에 휩쓸리면,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니면 우연히 만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게 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알기 위해 그리고 첫 장편을 촬영하기 위해 한적하기로 소문난 사우스다코타의 파인 리지 원주민 보호구역(Pine Ridge Reservation)으로 향했다. 같은 인터뷰에서 자오는 “저는 항상 드넓은 평원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요. 어린 시절 내몽골을 방문했을 때 베이징에서는 불가능했던 무언가를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Badlands(National Park)’로 불리는 미국 중북부의 대평원은 내몽골의 초원과 황량한 사막 그리고 기암괴석이 혼재되어 있는 수(Sioux)족의 고향이다. 미국식 황무지에 이끌린 사람은 비단 자오뿐만 아니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와 빔 벤더스(Wim Wenders)도 유럽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넓고 황량한 대지가 주는 특별함에 매혹되었다. 비평가 맷 졸러 자이츠(Matt Zoller Seitz)는 황무지에 이끌린 수많은 감독들 때문에라도 BLTV(Badlands Television)가 있어야 한다고 농담 삼아 제안하기도 했다. 자이츠의 말대로 빛, 풍경,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 인상주의적 내러티브를 선보인 테렌스 맬릭(Terrence Malick)의 <황무지 Badlands>(1973)에 연원을 둔 수 많은 영화들이 있다. 이들의 계보에 자오의 성공적인 독립영화(<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 Songs My Brothers Taught Me>(2015)>, <로데오 카우보이 The Rider>(2017)) 역시 포함되어 있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여성 감독 중 한 사람인 캘리 라이카트(Kelly Reichardt)의 데뷔작, <초원의 강 River of Grass>(1994) 또한 맬릭의 세계관에서 파생되었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BLTV’라는 가상의 커뮤니티는 미국 영화의 정서적인 근원에 닿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원을 졸업한 자오는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동창생이자 촬영감독인 조슈아 제임스 리차드(Joshua James Richards)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파인 리지 보호구역으로 갔다. 이곳은 2010년 기준, 연간 소득이 $3,500($35,000이 아니다!)에 불과하며, 유아 사망률, 실업률, 청소년 자살, 알코올 중독(10가구 중 8가구), 암, 당뇨병, 심장병의 발병 비율이 어느 지역보다 높고 남성의 평균 수명은 48세, 여성은 52세에 불과한 원주민의 게토다. 4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지역 주민들에게 ‘Auntie Chloé’로 불릴 정도로 그들과 긴밀한 유대를 형성한 그녀는 맬릭 스타일로 데뷔작 <내 형제가 가르쳐준 노래>(이후 <내 형제...>)를 제작했다. 맬릭의 <황무지>와 달리 치정에 얽힌 남녀의 파멸 이야기가 빠졌지만, <내 형제...>에서 선보인, 사건과 대화를 대신하는 풍경 숏과 자연광을 이용한 촬영, 그리고 무엇보다도 알 듯 모를 듯 한 내레이션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기법은 BLTV의 일원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증명했다. 영화 작업을 할 때마다 마치 자동차에 시동을 걸 듯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1997)를 다시 본다는 고백한대로, 자오의 작품들에는 슬로모션, 핸드헬드, 시선을 통한 정감의 유도, 사건의 부재 등 왕가위(王家衛)의 그림자도 짙게 배어 있다.

  2021년 제 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년도 수상자인 봉준호는 5명의 감독상 후보들에게 “길가에서 어린아이를 붙잡고 20초간 연출(directing)이란 무엇인지 설명하라.”라는 질문을 했고 이에 대해 자오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감독은 팔방미인이지만 어느 것에도 능통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일이 어그러졌을 때, <버든 오브 드림스 Burden of Dreams>(1982)를 보면서, ‘이런 상황에서 베르너 헤어초크( Werner Herzog)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그런 존재입니다.” 헤어조크가 <위대한 피츠카랄도 Fitzcarraldo>(1982)를 제작하면서 역경을 맞닥뜨렸을 때, 그가 내린 결단과 겹겹이 쌓인 고뇌를 메이킹 필름 다큐멘터리로 옮긴 <버든 오브 드림스>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적절하게 섞는 방식을 선호하는 자오에겐 영감의 원천이자 예술적 지침이 되었다. 헤어조크 역시 <로데오 카우보이>를 보면서 상찬을 아끼지 않았고 2017년에는 자신이 설립한 헤어조크 재단을 통해 자오에게 상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중국, 유럽, 미국의 저명한 감독들의 미학적 세례를 받은 자오는 자신의 정체성이 어느 하나로 규정되는 것을 거부해왔다.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정체성에 관하여 “결코 완결되지 않고, 언제나 생성 중에 있으며, 그 과정 안에서 구성되는 모종의 산물이기에 그것은 됨(being)이자 되기(becoming)”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오 역시 삶을 영위하면서 ‘됨’과 ‘되기’ 반복했다. 특정한 방식이나 삶의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부정과 긍정을 오가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 떠나는 유목민(Nomad)의 삶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세상의 바쁜 일상에 얽매이고 않고 특정한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점이 정말 많습니다.”

 

 

2.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란 무엇인가?

 

'내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 포스터

‘US Film and Video Festival’로 불리던 영화제가 ‘Sundance Film Festival’로 바뀐 이후로 선댄스 인스티튜트(Sundance Institute)는 영화제 프로그램과 부대 행사를 관리해왔다. 여기에서 시행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는 될성부른 작품을 인큐베이팅 하는 것이다. 자오의 데뷔작인 <내 형제...>는 선댄스 워크숍의 수혜를 받아 제작되었다. 당연히 이 작품은 2015년도 선댄스 영화제의 공식 상영작에 리스트업 되었을 뿐만 아니라, 칸의 황금 카메라(Caméra d’Or) 부문에도 초청되었다. 범죄를 저지르고 탈주하는 남녀 대신 꿈을 찾아 LA로 떠날 계획을 세운 두 청춘을 메인 캐릭터로 내세운 이 영화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자제하면서 다큐멘터리 기법을 통해 미학적, 민속지적 목표에 접근한다.

  자오는 <노매드랜드 Nomadland>(2020)와 <로데오 카우보이>에서도 그랬지만, 과거를 훑으면서 인물을 설명하지 않는다. 자오는 영화의 절반을 Badlands를 서성이거나 이 황량한 풍경과 하나가 되는 인물을 롱 숏으로 채운다. <내 형제...>에는 섹스, 자동차 폭발, 폭행 씬이 등장하지만 이 장면들은 드라마틱한 순간을 구성하는데 복무하지 않는다. 자오는 섹스 씬 이전에 에로틱한 장면들을 배치하지 않았으며, 자동차 폭발로 인해 그 누구도 다치도록 설계하지 않았다. 폭행 씬 이후에도 복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하는 장면 역시 부재하다. 여타 영화들과 달리 이 민감한 장면들은 풍경 숏의 기능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영화는 ‘조니’라는 원주민 청년이 발화하는 “야생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 나쁜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남겨두는 이유는 그들이 밖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것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제부터 관객들은 영화에서 주로 ‘나쁜 것들’을 보게 된다. 남매의 엄마는 알코올 중독이며 무직이다. 그녀는 자식들을 사랑하지만 그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에 더 신경 쓴다. 주인공 조니는 술이 금지된 이곳에 밀주를 들여와 마을 사람들에게 되팔아 집안 생계를 책임진다. 조니의 동급생들은 거의 대부분 로데오 선수가 되는 것 이외의 꿈을 생각조차 못한 채, 무기력하게 시간을 허비하며 지낸다. 이 답답한 불모의 땅에서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마리화나와 술에 중독된 채 정크 푸드만 먹고 지낸 탓에 쉰 살 무렵에 유명을 달리한다. 파인 리지 보호구역이라는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나쁜 것들’을 극복하거나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조니는 야심찬 여자 친구 오렐리아를 따라 LA로 탈주하려 한다. 클로이 자오는 “과연 조니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하나의 물음으로 시종일관 유지되는 서스펜스를 만든다. 이 단순한 로그라인은 놀랍게도 영화가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을 적절하게 방어한다.

 

조니의 탈출을 가로막는 유일한 인물은 동생 자슌이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이 소녀는 황무지에 피어난 들꽃 같은 존재다. 그녀는 나쁜 것들 천지인 파인 리지 보호구역에 거의 유일하게 남은 ‘좋은 것’이다. 조니는 혼자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만, 자신이 떠나면 동생은 절멸의 대지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하다가 결국 탈주를 포기한다. 마지막 시퀀스는 “그녀(자슌)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라는 조니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자슌이 붉은색의 파우와우(Pow-wow) 드레스를 입고 부족 사이에서 즐겁게 춤추는 장면을 비춘다. 이윽고 조니가 밤에 부족민들과 모닥불을 피우면서 전통 의례에 참가하고 남매가 사이좋게 자전거를 타고 석양으로 사라지는 숏들이 이어진다. 이 몽타주 시퀀스를 배경 삼아 다음과 같은 마지막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옛 어른들은 구름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바람이 너무 세게 불면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몸을 기대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방백이 끝나면 불모의 땅에서 메마른 흙을 만지다가 이를 한 움큼 쥐어서 허공이 흩뿌리는 조니를 비추는 것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 창공에 연기처럼 흩어지는 대지의 흔적들은 마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사물은 반드시 우주의 품으로 되돌아간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 형제...>는 현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서부극이며, 몰락한 아메리칸 원주민의 삶을 시네마-베리테 스타일로 재현한 민속지학적 연구이다. 더불어 전형적인 성장드라마이며 길을 떠나지 않는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도 ‘형제가 가르쳐 준 노래’는 들을 수 없다. 클로이 자오는 이야기가 아닌 이 수수께끼 같은 영화 제목에 살포시 주제를 심어놓았다. 나쁜 것들 천지인 이곳에서 유일한 ‘좋은 것’인 자슌을 바라보면서 조니 또한 “She’s good one”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도입부에서 들려오는 “야생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에는 어느 정도 나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 중 일부를 남겨두는 건 그들이 밖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라는 내레이션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재 진술 되어야 한다. 남매는 아버지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한 채 자랐다. 유명한 로데오 선수였던 아버지는 9명의 부인 사이에 24명의 자식을 둔 마지막 남은 수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재로 집이 불타는 바람에 비명횡사하고 만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제들이 모여든다. 같은 부족일 뿐만 아니라 한 핏줄인 그들은 따듯한 눈길로 조니와 자슌을 바라본다. 그런가하면 수많은 이복형제들 중에 한 사람일 수도 있는, 온몸에 문신을 한 트레비스는 숫자 ‘7’과 연관된 부족의 역사를 자슌에게 들려주면서 이 땅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그녀에게 각인시킨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쏟아내는 방언과도 같은 트래비스의 구술사(口述史)는 부정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오는 그를 가로막지 않는다. 그녀는 어떤 부족이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반드시 실증적인 서구의 그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래서 트래비스는 자신만이 방식으로 부족의 역사를 자슌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제 자슌은 ‘Badlands’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이 땅을 구성하는 먼지, 바람, 빛, 풀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조니는 자신의 뿌리이자, 역사 자체가 된 자슌을 떠날 수 없다.

 

 

3. 그는 왜 로데오를 그만 둘 수 없는가?

 

'로데오 카우보이' 포스터

2017년 작품 <로데오 카우보이>는 <내 형제...>에서 시작되었다. 4년 가까이 파인 리지 보호구역에 머무르면서 원주민의 삶을 탐구하던 자오의 눈에 브래디 잔드로(Brady Jandreau)라는 사람이 들어온다. 그는 자오에게 틈틈이 승마를 가르쳐준 실존 인물이다. 자오는 그를 통해 로데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잔드로를 기용한 차기작을 구상하기에 이른다. <내 형제...>에서도 꿈이 없는 원주민들의 유일한 탈출구가 로데오였듯이 <로데오 카우보이>의 주인공 브래디는 라이더(rider) 이외엔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사람이다.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타고 벌이는 가장 위험한 스포츠인 로데오는 백인들이 야생말과 들소를 포획하는 솜씨를 겨루던 놀이에서 출발했다. 전통과 문화를 거의 잊어버렸지만 원주민들은 여전히 그들과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했던 말의 존재까지 망각하지는 않았다. 비록 로데오가 백인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주민들에겐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어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이 스포츠가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브래디 잔드로라는 실존 인물에 연원을 둔 브래디 블랙번(Brady Blackburn)은 전작, <내 형제...>를 이끌던 조니의 성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조니에겐 ‘좋은’ 동생 자슌이 있기에 그가 보호구역을 떠나지 못했듯이 브래디에겐 자폐증을 앓고 있는 15살 릴리가 있다. 릴리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함으로 브래디를 다독이며 때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인생의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20대 초반인 브래디는 <내 형제...>의 조니와 달리 편부 슬하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조니의 어머니가 그랬듯, 브래디의 아버지 역시 가족에게 짐만 될 뿐이다. 알코올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 조니의 어머니처럼 브래디의 아버지는 도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폐를 앓고 있는 동생을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브래디의 책임으로 전가된다.

  브래디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말을 타기 시작했다. 어떤 말과도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가 이 척박한 환경에서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말 길들이기와 로데오밖에 없다. 그는 이 두 가지에 몰두하면서 현실의 번뇌를 잠시나마 잊는다. 그러나 브래디는 로데오 경기 도중 두개골이 함몰되는 부상을 당해, 스무 개가 넘은 핀을 머리에 박는 수술을 받는다. 그는 사고의 여파로 자율신경이 통제되지 않아 고삐를 쥐는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뿐더러 가끔씩 구토를 하거나 기절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브래디는 라이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한다. 어쩌면 <내 형제...>의 주인공인 조니에게 닥칠 4-5년 후의 미래를 그린 듯한 <로데오 카우보이>는 전작처럼 단 하나의 질문, 즉 “그는 과연 다시 라이더의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통해 서스펜스를 구축한다. <내 형제...>가 영화라기보다는 풍경 화첩(landscape vignette)에 가깝다는 일부 비평가들의 볼멘소리에 자극받은 자오는 <로데오 카우보이>에서는 전작보다 드라마에 조금 더 신경 쓴다. 그렇지만 자오는 빛, 바람, 바위, 황혼과 새벽이 만들어내는 매직타임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신 관객과 비평가가 원한 드라마에 대한 갈증은 핵 사건(kernel)이 아닌 위성 사건들(satellites)을 동원해서 해결하려 한다. 자오는 로데오 재개 여부를 통해 서스펜스를 구축하면서 빈약한 서사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로 채운다.

 

영화에서 브래디를 곤혹스런 갈등에 빠트리는 인물은 레인 스콧(Lane Scott)이다. 자오는 브래디 잔드로를 브래디 블랙번으로 각색했지만 레인 스콧은 실존 인물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긴다. 브래디와 동년배이면서 유명한 라이더였던 그는 경기 도중 사고를 당해 반신불수가 되어 극심한 언어 장애까지 겪고 있다. 그런 그에게 자기 자신을 연기하라고 주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브래디는 자신의 우상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였던 레인을 자주 병문안 가는데, 그때마다 그는 양가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레인은 자기 마음대로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지만 어렵싸리 수화를 동원해 브래디에게 꿈을 좇으라고 추동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를 가정하면, 그의 미래 모습은 현재의 레인과 오버랩 된다. 브래디는 다시 로데오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한다. 아버지는 브래디를 걱정하며 그의 의지를 꺾으려고 한다. 아버지 역시 브래디에게 로데오 이외에는 삶의 목표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돈이 한 푼이라도 생기면 도박에 탕진하는 아버지로 인해 가족은 트레일러 임대료를 지불하지 못해, 브래디가 아끼던 말(거스)을 팔아치운다. 이 때문에 브래디는 좌절하지만, 아버지는 친구에게 부탁해 새로운 말(아폴로)을 맞아들여 아들을 다독거린다. 브래디는 이 거친 말을 길들여 Badlands를 달리는 것으로 로데오에 대한 갈증을 조금씩 해소한다. 하지만 아폴로는 야생성이 적절히 제거되지 않아서인지 좌충우돌하다가 날카로운 철제 울타리에 다리가 찢기는 치명상을 입는다. 달리지 못하는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 브래디는 아폴로를 안락사 시키려 한다. 말의 커다란 슬픈 눈방울과 마주치자,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한 그를 대신해 아버지가 방아쇠를 당긴다. 브래디는 아폴로의 안락사를 계기로 자신의 ‘쓸모’를 깊이 고민한다. ‘어떤 결심’이 선 브래디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옷장 속에 묵혀 두었던 카우보이 복장을 꺼내 입는다. 이윽고 찾아온 릴리에게 “주님은 각자에게 목적을 주시지. 말은 평원을 달리기 위해, 카우보이는 말을 달리기 위해 존재한단다.”라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선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화가 난 나머지 “나가 죽어 버려”라고 폭언을 퍼붓는다. 브래디는 “아버지처럼은 안 될 거예요.”라고 쏘아붙이고 나서 로데오 경기장으로 향한다. 브래디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더 이상 초원을 달릴 수 없는 말이며,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하는 이미 ‘죽은' 사람에 불과하다. 브래디는 아버지처럼 죽은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다시 라이더가 되기로 결심한다. 브래디는 경기에 출전할 준비를 하고 아버지와 릴리는 그가 걱정이 되어 찾아온다. 브래디는 주변을 돌아보다가 가족들과 눈이 마주친다. 아버지는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브래디 차례가 다가온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그는 로데오 경기장을 떠나 가족 곁으로 걸어간다. 며칠이 지나 브래디는 레인을 보러 다시 병원에 들른다. 그가 웃옷을 벗자, 등에는 레인이 로데오 하는 문신이 새겨져있다. 레인은 흡족해하면서 그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힘겹게 말한다. 브래디는 레인에게 거스를 타고 거침없이 달리는 장면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이윽고 화면은 브래디가 말을 타고 Badlands를 질주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아래의 자막이 떠오르면서 마무리된다.

Dedicated to all the riders who live their lives 8 seconds at a time(8 초에 인생을 거는 카우보이들에게 이 영화를 바칩니다.)

 

 

4. 떠나야 하지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또 그 반대인 사람들

 

'노매드랜드' 포스터

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신탁을 빙자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다. 라이어스는 아들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으며, 이오카스테는 남편을 죽인 아들과 통정해 또 다른 자식을 낳을 운명이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는 무던히 신탁에서 벗어나려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통정하는 대역죄를 저지른다. 그는 참담한 심정을 가누지 못해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죽을 때까지 황야를 떠돌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마르티아(hamartia)라는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을 비극의 원인으로 주장했다. 낯선 사람들이 가던 길을 막자 화가 난 오이디푸스가 그 일행에 아버지, 라이어스가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들을 도륙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여기서 착안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의 급한 성격이 그리스 최대의 비극을 만든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하마르티아보다 앞서서 오이디푸스를 신탁의 소용돌이에 빠트린 것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운명을 거스르는 것은 신의 명령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비극은 인간으로서는 달리 어찌 해볼 수 없는 사태를 그 앞에 내던진다. 여기에는 복종 이외에 길이 없다. 운명과 신탁은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하여 사멸하거나 양자택일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현대의 비극은 개인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소포클래스 이후 2,5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니체로 인해 ‘신이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이데거를 통해 ‘인간은 이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피투적(被投的) 자아’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통탄했던 아도르노의 계시처럼 현대의 비극은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클로이 자오는 ‘삶 자체가 비극’이라는 20세기적 퍼스펙티브에서 더 나아가 떠나야 하지만 떠나지 못한 자의 자괴감, 그 반대로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자의 비애를 엮어 멜랑콜리를 제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내 형제...>와 <노매드랜드>는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대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계로 비상해야 하는 젊은이는 결국 머물고, 지친 중년 여성은 여전히 미국이라는 Badlands를 떠돌아야 한다. 그들 각자의 선택은 운명이나 신탁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포괄자 혹은 공기호라는 환경(Situation)이 그들의 행동(Action)을 강제한다. 행동에 의해 야기된 또 다른 환경(Situation′)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된 세계이다. 인물들은 S-A-S′라는 큰 형식(grand form) 속에서 내적 투쟁을 펼친 끝에 세계 질서를 거부하거나 그 반대로 질서에 안착한다. <내 형제...>, <로데오 카우보이>의 주인공, 조니와 브래디는 정주할 수 없는 본성을 지니고 있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새파란 젊은이들도 해내지 못한 일을 <노매드랜드>의 나이든 펀이 해낸다. 그녀는 정주로서 해결 될 수 없는 자신의 영속(永續)에 관한 문제의 해결책을 탈주에서 찾는다. 가정(home)이라는 정주 공간이 사라진 펀의 탈주는 세계 속에서 모든 실체들이 자신을 유지하려는 코나투스(conatus)로 이행된다. 정주할 가정이 없는 펀은 다시 엠파이어로 돌아와 창고에 보관 중이던 물건들을 이웃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마침내 집(house)의 속박에서도 벗어난다. 가정과 집을 뒤로하고 펀이 향하는 세계는 온기보다는 차가움이, 안전보다는 위험이 도사린 공간이다. 그녀는 자기보존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공간으로 뛰어든다. 자연주의의 충동-이미지들이 득실대는 원초적 공간으로의 탈주는 절대 무로 돌아가려는 본성에 다름 아니며 이는 노마디즘의 정수와 통한다. 그러므로 노마디즘은 개척이나 정복의 정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왜냐면 노마디즘은 지배적 가치와 질서에 대항하면서 본래의 자신에게 귀환하는 사유적 태도 그 자체를 일컫기 때문이다.

 

할리우드는 진부하게 표현하면, 이민자 혈통에 의해 사막에 건설된 꿈의 공장이다. 영화는 애초부터 해외에서 유입된 새로운 피에 의해 유지되고 보충된 산업이었다. 이 할리우드의 오래된 전통을 클로이 자오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 프리츠 랑(Fritz Lang),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빌리 와일더(Billy Wilder)의 후손인 그녀는 자신의 저명한 조상들처럼, 꿈의 공장에서 환대받았고 그 보상으로 아카데미까지 거머쥐었다. 할리우드는 어느 순간 그녀가 정주하기를 원하는 고향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힘들게 제작비를 구하지 않아도 되고, 배급라인과 직접 교섭을 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올랐다. 그렇다면 클로이 자오는 다시금 <노매드랜드>의 펀처럼 탈주를 감행하여 Badlands로 기수를 되돌릴 수 있을까? 반항기 가득한 클라우스 킨스키(Klaus Kinski)의 머리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던, 존경해마지않는다는 헤어조크의 자취를 그녀는 따라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클로이 자오는 베이징-브라이튼-LA-매사추세츠-뉴욕-사우스다코타를 거쳐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에서 탈주할 것인가? 노매드 인생을 살아온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던지 그것은 신탁이나 운명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며, 향후 벌어질 모든 일들은 그녀의 선택에 의한 결과일 따름이다. 다만 그 선택이 파인 리지에 주저앉은 자신의 페르소나들과는 다를 것을 내심 바라본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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