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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주의 문화톡톡] 하느님의 실루엣
[김창주의 문화톡톡] 하느님의 실루엣
  • 김창주(문화평론가)
  • 승인 2025.02.1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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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탄생

세계 인권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은 1948년 12월 10일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르며 생명의 존엄과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깨달은 인류가 일궈낸 지성의 큰 걸음이다. 다음은 제1조 전문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할 때 흔히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창세기의 주장에 기댄다. 중세 이후 근대까지 서구 사회를 정신적으로 이끌었던 성서의 권위를 근거로 삼은 것이다. 세계 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의 생명과 부여받은 권리가 천부적인 것으로 어떤 침해나 차별도 있을 수 없다는 경험적 인식이며 실용적 선포다.

창세기 1장은 ‘우리의 형상(צֶלֶם)을 따라 우리의 모양(דְּמוּח) 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다(26절). 전통적으로 두 낱말의 이해는 신학적 개념어로 받아들였다. 우선 초창기 번역을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기원전 3세기경 가장 먼저 그리스어 번역은 ‘είκών’과 ‘όμοίωσιζ’(인상과 닮음)로 옮겼고, 기원후 4세기 히에로니무스는 라틴어 ‘imago’와 ‘similitudo’ (이미지와 유사성), 16세기 마르틴 루터는 독일어 ‘Bild, das uns gleich sei’(우리와 같은 형상)로, 그리고 17세기 흠정역이 ‘image’와 ‘likeness’ (형상과 모양) 등으로 풀었다. 특히 라틴어와 영어가 중세와 근세 유럽 지성을 이끌면서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용어는 신학적으로 견고히 자리 잡았다. 더구나 2세기 말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니우스는 이미 두 단어의 신학적 차이를 규명한 바 있다. 그리하여 성서의 사람 이해를 논할 때 하느님의 ‘형상’과 ‘모양’이 무엇인지에 모인 것이다.

그렇다면 고대 사회에서 형상은 무슨 뜻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자. 고대 통치자는 자신의 이름이나 형상을 새겨 주요 접경지역에 세워 영역을 표시하였다. 일종의 경계석이다. 히브리어가 어느 정도 지지한다. 대부분 형상(צֶלֶם)과 모양(דְּמוּח)으로 번역되나 둘 다 사전적 의미는 ‘깎다, 자르다, 조각하다’ 등이다. 명사가 되면 ‘조각품, 형상’으로 대리자를 뜻한다. 하느님이 고대 통치자처럼 자신의 닮은 모습대로 사람을 창조하여 에덴동산과 세상을 다스리도록 보낸 것이다. 창세기 문맥을 보면 자연스럽다. 다음은 최근 발간된 <새한글성경> 번역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와 닮은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 땅과 땅 위에 기어 다니는 온갖 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하느님은 사람을 그의 ‘모습으로’ 만들어 세상의 온갖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모습’과 ‘다스리다’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많은 연구자가 ‘모습’에서 하느님의 대리 관리자 또는 통치자로서 역할을 설명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사람은 하느님의 겉모양이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또는 어떤 점이 닮았다는 것일까?

다시 ‘형상’ 또는 ‘모양’의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 성서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출애굽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행진하는 동안 ‘성막’(מִשְׁכָּן)을 지으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듣는다. 성막은 하느님의 배타적 절대 공간이며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한 장소다. 이 일을 위해 경건하고 지혜로우며 천재적인 공예가 ‘브살렐’이 등장한다(출애굽기 31:2; 36:1-2). 그는 무에서 하느님의 머물 성막을 창조해낸다. 놀랍게도 그의 이름(בְּצַלְאֵל)에 하느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성막을 만들어낸 단서가 숨겨져 있다. 한글 음역 ‘브살렐,’ 또는 ‘브찰엘’이다. 영어 음역 Bezalel을 참조하여 분석하면 세 가지 형태소가 확인된다. ‘브’(be)는 ‘안’을, ‘살/찰’(zal)은 ‘그림자’를 그리고 ‘엘’(el)은 ‘하느님’이다. 셋을 이으면 ‘하느님의 그림자 안에 거한 사람’이란 뜻이 된다. 우리의 논의에서 ‘살/찰’(lc;)이 결정적 실마리다. 여기서 ‘그림자’는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아래 그림 해설의 실루엣과 만난다. 그림자는 본체에 비친 형상이며 본체의 궤도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또한 본체를 뛰어넘을 수 없다. 따라서 ‘형상’(צֶלֶם)이 어떻게 번역되든(είκών, imago, Bild) 본체인 하느님과 관계를 놓치면 곤란하다. 사람은 하느님의 그림자로 시곗바늘이 중심을 떠나지 않고 움직이듯 하느님을 떠날 수 없는 불가분의 존재다.

위에서 토론한 대로 형상과 모양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인간 본연의 두 가지 특징적 면모가 아니다. 다만 창조주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에게 부여함으로써 존엄한 피조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새한글성경>과 한국가톨릭의 <성경> 번역은 새길만 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와 닮은 모양으로 사람을 만들자.<새한글성경>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가톨릭 성경>

전통적인 ‘형상과 모양’이라는 개념어 대신 위와 같이 풀어쓰듯 외형적 특징을 묘사한다. 불필요한 논쟁을 일으키는 추상적 언어를 피하고 사람은 곧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핵심적인 점을 파악한 번역이다. 창세기의 ‘형상과 모양’이란 고대 히브리인에게 익숙한 수사법으로 사람이 하느님과 비슷하지만 결코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더구나 사람은 육안(肉眼)으로 하느님을 볼 수 없다. 성서의 일관된 주장이다. 하느님의 모습이라고 할 때 얼굴이나 외양이 아니라는 점은 성서가 내적으로 입증한다. ‘하느님의 얼굴’이 성서에 단 한 번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말라. 그 표현 자체는 빈번하지만 정작 얼굴을 묘사하거나 형태를 기록한 예를 찾을 수 없다는 말이다. 심지어 하느님을 보면 죽는다는 경고가 주어진다(출애굽기 19:21; 이사야 6:5). 금기에 가까운 이름이다. 그의 성품과 인격은 역사를 통하여 드러낼 뿐 육체적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다.

 

Samuel Bak, "Creation of Wartime III," 127x190.5cm (1999-2008)

위 그림은 홀로코스트 생존자 사무엘 박(Samuel Bak, 1933~)의 <전쟁 때의 창조 Ⅲ>다. 누구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아담 창조>를 떠올릴 것이다. 중세의 거장이 장엄한 장조의 순간을 절제적으로 포착했다면 사무엘 박은 극도의 혼란과 불안 가운데 절박한 순간을 그렸다. 그림 속의 병사는 전쟁을 피해 지친 몸을 잠시 피하려는 모습이다. 어린 시절 게토와 포로수용소 기억을 담은 자전적 장면이다. 오른쪽 어깨 뒤의 이젤은 화가라고 말한다. 잿빛 배경 가운데 벽과 바닥, 기둥과 하늘 등에 청명한 파란색이 언뜻언뜻 비친다. 집은 폭격으로 무너지고 겨우 한 사람이 누울만한 두 벽면이 남았다. 거실인지 작업실인 온갖 쓰레기 위에 몸을 반쯤 기대고 있다. 머리 뒤편 포탄과 오른쪽의 날카로운 이를 가진 미사일은 언제 터질지 모른다. 더구나 의자와 침대가 부서져 병사는 편히 누울 수 없고 물 한 모금 남아있지 않다. 한쪽 벽마저 곧 무너져내릴 것 같다. 휜 기둥으로 간신히 버틴다. 기둥을 감싼 더러운 하늘색 천은 이스라엘의 정체성, 혹은 화가의 마지막 희망이다.

병사는 왼 무릎을 괴고 왼쪽 팔과 손을 올린 채 골똘히 앞을 응시한다. 무채색의 해진 옷과 짧은 머리카락은 전쟁 중이라고 말한다. 포탄이 뚫고 지나간 벽은 신기하게 하느님의 실루엣이다. 신의 형상이 너덜너덜하기 그지없다. 실루엣의 오른 어깨는 벽에 걸린 팔 조형물로 연결되고 뒤편 벽면은 두 막대기로 겨우 지탱한다. 신이 없는 현실 공간이다. 그 너머 현실을 더욱 비참하다. 독가스실의 굴뚝 두 개가 연기를 내뿜는다. 그림 오른쪽 기도 숄을 두른 십자가 일부가 살짝 보인다. 신의 실루엣과 십자가 사이로 시체를 태운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솟구친다. 실체가 없는 허공에 병사는 하느님의 실루엣을 향해 간신히 손가락을 내밀고 있다. 그의 눈은 지긋이 신의 실루엣을 마주하고 둘의 손가락은 닿을 듯 가깝다. 화가에게 아담의 탄생은 장엄한 창조의 순간이라기보다 비참한 전쟁의 결과다. 병사의 현실적인 두려움과 절망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열망을 만나는 순간이다. 비인간적인 상황 앞에서 기적적인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창세기의 우주 창조는 태평성대, 평화로운 시절에 형성된 신학이 아니다. 기원전 6세기 최강대국 바빌론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무너뜨리고 그 구성원을 흩어놓았다. 제국의 횡포 앞에 인격은커녕 전리품 신세였다. 그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이나 내일의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이 무엇이며 생명은 무엇인가 묻고 또 사유하였다. 위대한 신학이 비롯된 지점이다. 멸절의 공포와 삶의 불안 가운데 역설적으로 우주 창조라는 신학을 일궈낸 것이다. 그로부터 이천 육백여 년 후 가스실의 참상과 고통은 숨을 죽이며 두려움에 치를 떨게 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나온 사무엘 박이 모색한 ‘아담의 창조’다. 그는 실루엣처럼 보이는 신의 형상 앞에서 ‘오 (awe)’라고 놀라며 경외감에 사로잡힌다. 그림자가 본체를 떠나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 알아차린 신의 형상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 후에 유엔의 인권선언이 선포되었듯 화가에게 아담의 창조는 비인간적 전쟁과 인권 파괴의 여파로 인한 것이었다. 놀라운 반전이다. 아담은 한 사람이다. 그 순간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얼굴 색깔이나 성별, 빈부나 이념까지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생명 존엄만 있을 뿐이다.

 

1)Claus Westermann, Genesis 1-11: A Commentary (Augusburg: Minneapolis, 1974) 148ff. 
2)“하느님의 형상: 홍수 이후 일어난 변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인터넷 판 2024년 1월 호 참조.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 교수.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으로 푸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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