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진실의 시대, 정치에 종속된 위태로운 현실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탈진실의 시대’로 구분된다. 2016년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가결되고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같은 해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post-truth’를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이를 계기로 ‘진실 이후의 세계’, 즉 사실과 진실을 외면한 채 가짜뉴스와 조작된 정보 등을 유포하는 방식으로 사사로운 정치적 이익을 편취하는 ‘정치에 종속된 위험한 현실’의 시대로 진입했다.
이런 뉴스를 접할 당시만 해도 기나긴 인간의 역사에서 가짜뉴스나 음모론의 폐해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트럼프는 변함없이 자신에게 불리한 언론보도를 가짜뉴스와 음모론으로 몰아가며 미국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유럽에서는 극우 포퓰리즘을 내세운 정치세력이 급부상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넘게 공유해왔던 상생의 가치가 무시되고 배타와 혐오를 조장하는 등 파시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추세이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그동안 사실과 진실이라 믿었던 신념과 가치가 뒤흔들리는 혼돈의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절감했다. 그런데 ‘지금-여기 이 땅’에서 진행되고 있는 탈진실의 현장과 직면하고 보니, 막연한 절망감이나 두려움의 차원을 넘어 일상적인 삶이 무너지고 국가의 기강이 위태로운 지경이다.
정권 초기부터 ‘허위 조작과 선전 선동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에 맞서 항전해야 한다’고 선언했던 윤석열 대통령은, 이미 가짜뉴스와 허위정보라고 판명이 난 ‘부정선거론’을 명분으로 내세워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천만다행으로 시민들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최악의 위기 상황은 모면했지만, 계엄 수괴 윤석열은 ‘국민에게 단순히 경고하기 위한 경고성 계엄령일 뿐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계엄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 경악할 일은, 장기 집권이라는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야권의 정치인과 좌파 성향의 인사와 연예인 및 종교인 등 500명을 체포한 후 사살하거나 북한을 끌어들여 몰살시키는 이른바, ‘수거 대상 목록과 처리 계획’을 치밀하게 세웠다는 점이다.
그동안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를 이룩한 손꼽히는 정치 선진국’으로 평가받아 왔던 한국의 위상이 일시에 무너지고 있다. 일제 식민 통치와 6.25 전쟁, 군사독재와 민주화운동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른 굴곡진 현대사를 돌이켜보면, 정치적 대립이 첨예화될 때마다 정치 세력들은 친일과 반일, 반공과 종북 등의 이념적 대립을 심화시켜 혐오와 반목의 골을 만들고 그 틈을 타 정치적 이익을 누려왔다. 그러나 국민주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대다수 국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선거에 의해 국민대표를 선출하고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는 제도와 민주적 절차를 지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거듭해 왔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거듭될수록 “계엄선포는 국민주권을 부정하는 반국가적인 내란이자 민주주의를 역행시키는 시대착오적인 퇴행”이라는 비판이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분열과 대립의 여진은 쉽사리 잦아들지 않고 있다. 탄핵소추의 절차에 따라 탄핵 인용 결정을 내리는 법적 절차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경제적 손실과 민생 혼란을 불러일으킨 계엄의 무도한 후과를 최소화하는 방안 마련이 시급하다.
정치 이론가이자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신민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닌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갈파했다. 계엄의 무도한 후과를 최소화하기 위해 시민이 실천해야 과제는, 다름 아닌 이 무참한 현실에 매몰된 인지적 무기력에서 벗어나 ‘사실과 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임을 일깨워준 금언(金言)이다. 탈진실의 시대에 다시 탐정 뒤팽의 추리를 읽는 이유는, 명석한 추리능력으로 오리무중에 빠진 범죄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는 ‘사실과 거짓, 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사리 분별력’을 되새기려는 데 있다.
탐정 뒤팽의 추리가 주는 세 가지 교훈
오귀스트 뒤팽은 애드가 앨런 포(Edger Allen Poe)의 추리소설 3부작에 등장하는 탐정이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1842)과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1842), 「도둑맞은 편지」(1844)에서 뒤팽은 프랑스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파리에서 발생한 미스터리한 세 가지 범죄 사건을 명쾌하게 분석·해결한다.
미국의 소설가인 포의 추리소설에서 파리가 배경으로 등장한 이유는, 당시 파리가 범죄도시로 급부상했던 시대상과 관련이 깊다. 프랑스혁명 이후 혁명과 폭동, 폭력과 유혈 등에 대한 강박관념과 트라우마가 퍼져나갔던 파리는, 산업혁명과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행됨에 따라 문화가 번성하고 범죄가 범람하는 대도시로 변모했다. 범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신문과 잡지는 뉴스와 삽화 등의 형태로 범죄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자극성 강한 범죄를 소재로 삼은 신문연재소설과 범죄소설이 쏟아졌다.
당시 범죄소설은 도둑질과 살인, 매춘과 강간 등을 비롯한 각종 범죄 사건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등 감정적인 경험을 다뤘다. 이에 반해 포의 추리소설은 범죄 사건의 해결 과정에 초점 맞춰졌다. 이처럼 생소한 포의 추리소설이 발표되자 당시 프랑스 문단은 “심정에서 두뇌로, 열정에서 사고로, 드라마에서 해결로 전환한 새로운 유형의 소설”이라 칭송하며, 포를 추리소설의 창시자로 추대했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과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 「도둑맞은 편지」 3부작에서 뒤팽의 추리는 사회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는 ‘합리주의적인 지식의 힘’을 보여준다. 미국인이라는 외부인의 시점으로 파리에서 일어난 범죄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냉철하게 사회문제를 탐구하는 관찰과 추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르그가의 살인사건」에서 뒤팽의 추리는 모르그 거리의 한 건물 4층에서 끔찍하게 살해당한 모녀의 살인범을 찾아내는 데 초점 맞춰졌다. 난장판이 된 사건의 현장에는 거금이 흩어져 있고, 딸의 시체는 벽난로 굴뚝에 거꾸로 처박혀 있고 엄마의 시체는 뒤뜰에서 목이 절단된 상태로 발견됐다. 경찰이 현장 검증과 목격자들의 진술을 확보했지만, 범인은 물론 사건의 진상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실정이다. 화자인 ‘나’로부터 이 사건을 전해 들은 뒤팽은 먼저 신문 기사를 꼼꼼히 비교·분석하여 사건의 개요를 파악한 다음, 현장으로 찾아가 직접 발견한 결정적인 단서를 토대로 사건을 해결한다. 우선, 보도기사를 통해 범인에 관한 이웃들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고 시체의 끔찍한 모습에서 사람이 아닐 가능성을 추론한다. 두 번째 단계로 살인 현장을 방문한 뒤팽은 죽은 시체의 상처 모양, 사람의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발견된 시체의 위치, 방에 떨어진 동물의 털 등을 근거로 범인은 오랑우탄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세 번째 단계에서 뒤팽은 신문에 ‘오랑우탄을 포획하여 보관 중’이라는 광고를 내고, 오랑우탄의 주인이 찾아오도록 유인하여, 마침내 범인과 사건의 전말을 밝혀낸다.
이에 비해 「마리 로제의 수수께끼」에서 뒤팽은 전적으로 신문 기사를 비교·분석하는 방식을 취한다. 각 신문이 파리에 소재한 향수 가게의 점원 마리가 돌연 자취를 감춘 지 나흘 만에 센 강기슭에서 시신으로 떠오른 사건에 대한 경쟁적인 기사를 쏟아낼 정도로 장안의 화제가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수사에 실패한 G 국장이 사건 해결을 요청하자, 뒤팽은 사건의 전말과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신문을 비교·분석하며 신뢰할 만한 기사를 선별해 나가는 소거법으로 접근한다. 그러나 모든 신문이 편향성과 추측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선정적인 통속극과 같은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는 문제점을 발견한 뒤팽은, 신문의 이런 문제점은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를 선호하는 독자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한 전략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파하고 더 이상 진상 파악을 위한 추리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다른 한편, 「도둑맞은 편지」에서 G 경찰청장으로부터 범인과 범죄 경위에 대한 정보를 미리 접한 뒤팽의 추리는, 편지를 훔쳐 간 범인과의 심리적 대결을 펼치는 심리추리 방식을 취한다. 뒤팽이 접한 정보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익명의 의뢰인(여왕)이 비밀리에 도둑맞은 편지를 찾는 데, 범인은 D 대신이다.
② 여왕이 남모르게 편지를 읽던 중 정적인 D 대신이 들어오자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태연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대화를 나누던 중, 교활한 D 대신이 다른 편지와 맞바꿔 훔쳐 간 후 이 편지를 빌미로 여왕을 협박했다.
③ 여왕이 G 경찰청장에게 편지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자, G 경찰청장이 D 대신의 저택을 수색하고 소매치기를 고용해 그의 소지품을 세밀하게 조사했으나 도통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이런 정보를 토대로 뒤팽은 ‘협박은 곧 지식의 힘을 권력으로 활용하는 전형적인 형태’라는 점을 확신한다. D 대신이 여왕의 편지를 훔치고 협박할 수 있었던 힘은, 사회적 지위를 활용해 편지를 훔치는 간교함과 편지 내용에 관한 지식을 가진 자의 우월적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편지를 발견하지 못한 G 경찰청장과 편지를 대범하게 감춘 D 대신의 관계 역시, 덜 영리하고 덜 영악한 피해자들의 권한이 지식과 권력을 소유한 자에게 이행된 형태를 띤다. 고로 편지의 내용과 ①~③에 관한 모든 정보와 지식을 입수한 뒤팽은 영악한 D 대신의 지식수준에 비해 훨씬 높은 위치를 점하게 마련이다.
이런 점을 꿰뚫어 본 뒤팽은 색안경을 착용한 상태로 D 대신을 방문하여 편지꽂이에 버젓이 꽂혀 있는 편지를 발견하고, D 대신의 심리 상태를 이용한 심리추리를 발휘한다. 즉 뒤팽은 예사로운 방문인 것처럼 태연하게 행동하며 D 대신의 책상에 금제 담뱃갑을 두고 나온 후, 다음날 담뱃갑을 찾으러 왔다는 핑계로 다시 방문한다. D 대신의 심리를 교란하기 위해 소총 쏘는 사람을 고용해 인근 거리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 틈을 타 자신이 준비한 가짜 편지와 D 대신이 훔친 편지를 맞바꿔 유유히 집을 빠져나온다. 뒤팽이 남긴 편지에는 “두 사람 사이에 얽힌 과거의 악연을 복수하기 위해 편지를 훔쳐 간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탈진실의 시대는 권력자와 그에 추종하여 권력과 자본을 탐욕하려는 자들이 초래한 고의적인 불합리성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초기에 윤석열과 그의 추종자들은 ‘경고성 계엄’을 선포한 것이라며 방어 전략을 취했으나, 탄핵 심판의 막바지 단계에 이르자 ‘민주당의 탄핵·내란 공세가 곧 정권 찬탈을 위한 내란이자 정치공작이라’며 모든 책임을 민주당에 전가하는 덮어씌우기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영구집권 획책에 방해되는 자를 대거 수거하고 전 국민을 출국금지 시킨다는 악랄한 구상이 발각됐음에도 불구하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진영논리를 활용해 지지 세력을 향해 계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허위정보와 가짜뉴스가 넘쳐나는 불합리성의 시대에 깨어있는 시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심정 아니라 두뇌, 열정이 아니라 사고, 드라마가 아니라 해결’을 추구하는 탐정 뒤팽의 추론 능력(power of ratiocination)을 갖추는 것이다. 나아가 이 능력을 바탕으로 사실과 허구,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여 명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권력자의 권위와 억압에 짓눌리거나 선정적이고 편향적인 언론보도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로 사회적 무질서에 맞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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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출처 : 네이버와 구글
참고문헌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김재경 옮김, 두리반, 2019.
에드거 앨런 포, 『모르가의 살인』, 권진아 옮김, 시공사, 2019.
한나 아렌트, 『전제주의의 기원 2』, 이진우·박미애 옮김, 한길사, 2006.
Jon Thompson, Fiction, Crime and Empire, University of Ilinois Press : Urbaba and Chicago, 1993.
글·이정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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