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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좌와 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좌와 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 한성안 | 경제학자
  • 승인 2025.03.05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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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된 노동시장 안에서 벌어지는 능력주의의 폭정

비주류경제학의 주제로서 도덕

도덕은 다양한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보통사람들이 관용적으로 쓰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조명해 보자. ‘올바르게 행동하고 남과 더불어 착하게 살자’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의 일반적 내용일 것이다. 학문 역시 일반인들의 이런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도덕을 중시하는 경제학자로서 이런저런 문헌을 통해 얻어낸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윤리학자들은 ‘정의’(justice)와 ‘선’(good/virtue)을 도덕의 핵심 가치로 정리하는 듯하다. 마이클 샌델은 이 둘을 각각 ‘옳음’(right)과 ‘좋음’(good)으로 바꾸어 부른다.

호모사피엔스는 도덕적 존재인가? 곧 우리는 본성적으로 ‘옳음’과 ‘좋음’을 추구하는 존재인가? 도덕 없이도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생물체인가? 경제학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주류경제학은 호모사피엔스는 도덕과 거리가 먼 ‘쾌락주의적 존재’라고 결론 내렸다. 비주류경제학 중 마르크스 경제학 역시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 곧 ‘호모라보란스’(Homo laborans)로 일원화하면서, 도덕적 논쟁을 비켜 갔다.

반면, 나머지 비주류경제학은 도덕적 주제를 폐기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고려하는데, 대표적으로 베블런, 폴라니 등 제도경제학과 케인스 경제학이 그 범주에 든다. 이들은 많든 적든 각자의 경제학 모델에 도덕적 사유를 개입시킨다. 가령, 베블런 제도경제학은 ‘다중본능론’으로 ‘알박기’를 함으로써 스스로를 도덕적 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놓았다. 곧,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일 뿐 아니라 이타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경제 행위자의 ‘본성’이 그러하니 그쪽 경제학자들은 도덕적 사유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물학적’ 알박기에도 불구하고, 비주류경제학에서 도덕에 대한 논의는 만족스러운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가령, 베블런이 이타주의와 연대를 끌어내고자 도입한 ‘어버이 성향’(parental bent)은 과학적으로 과연 얼마나 입증되는가? 또, 도덕적으로 행동하자면, 행위자의 강력한 ‘주체성’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제도경제학자는 이 주체성을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초해 낼 것인가?

더욱이 도덕의 두 가지 축인 정의와 선, 곧 ‘옳음’과 ‘좋음’은 때때로 조화를 이루긴 하지만,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예컨대, 강도를 만나 다친 행인을 구해주고자 할 때, ‘선한 사마리아인’은 주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 다친 행인이 용서할 수 없는 흉악범이라면, 아무리 선한 사마리아인이더라도 고민스러울 것이다. ‘선한 마음을 갖고 이놈을 살려내면, 또다시 세상을 악의 소굴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좋음과 옳음은 여기서 서로 충돌한다. 그렇다면 ‘옳음’이 먼저인가, ‘좋음’이 먼저인가?

도덕적 본성에 대한 과학적 근거, 도덕적 행위자의 철학적 정초, 정의와 선 사이에 놓인 복잡한 관계, 이 모든 것은 주류경제학자에겐 매우 낯선 주제들이며, 고려할 필요조차 없는 주제들이다. 하지만 도덕과 경제의 단절을 거부하는 비주류경제학자에게 이 주제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것들이다.

 

능력주의의 도덕으로서 ‘공정’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에서 ‘좋은 사회’와 ‘좋은 삶’을 이루어낼 방법을 정치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데, 경제와 도덕의 관계를 고민하는 비주류경제학자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옳음과 함께 ‘좋음’은 도덕을 형성하는 한 축이다. 그렇다면, 옳음과 좋음, 곧 의(justice)와 선(goodness/virtue) 가운데 무엇이 더 우선적인가? 여기서 샌델은 옳음보다 좋음이 우선순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 그런가? 옳음과 관련되는 ‘절차의 공정성’은 좋음에 해당하는 ‘목적’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곧, 우리가 ‘무엇이 좋은지’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나서야 비로소 그 좋음을 달성하는 ‘올바른’ 절차에 관해 논의할 수 있는데, 예컨대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옳은’(공정한) 절차는 대학이 어떤 목표를 ‘좋다’고 결정했는지, 곧 대학이 내세운 ‘사명’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옳음과 좋음, 곧 의와 선에 관해 우선순위를 확정한 후 이를 근거로 샌델은 ‘능력주의’(meritocracy)에 메스를 가한다. 능력주의란 공정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우열을 가리자는 생각이다. 곧, 능력주의에서는 옳음이 핵심적 판단기준이다. 능력주의는 우리를 매우 신나게 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기득권과 귀족적 사회구조의 부당한 장벽에 가로막힌 나머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능력주의로 인해 지금부터 나는 나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주의는 이처럼 자유를 허용한다.

또, 능력주의 뒤에는 ‘우리는 우리 운명의 주인이며 뭐든 우리가 얻은 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버티고 있다. 곧, 모든 경제적, 비경제적 성과는 나의 능력이 일군 결과일 뿐이어서, 내게 온전히 귀속되며 나는 그것을 독점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결과 능력주의는 우리에게 ‘사회적 이동성’을 허용한다.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 자유, 성과의 소유, 사회적 상승은 능력주의의 유쾌한 장점이다.

 

능력주의가 착각하고 있는 공정

그러나 샌델이 보기에 능력주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잘못되었다. 첫째, 능력은 재능과 노력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저명한 정치철학자 존 롤스가 드러내 주었듯이 능력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 중 대부분은 ‘우연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가령, 재능은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자연이나 신이 내게 내린 선물이다. 아인슈타인의 높은 IQ와 우사인 볼트의 강한 심폐력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또, 김구라의 잡담이 높은 경제적 보상을 낳게 된 것은 그러한 노력을 선호하는 오늘이라는 시대적 상황 덕분이다. 김구라가 조선시대에 태어나 그런 잡담을 지껄여 댔더라면, ‘실없는 놈’으로 핀잔을 들었을 것이다. 반면 요즘 시대엔 십수 년을 학문에 전력투구하고도 대부분 백수나 보따리 장사로 생계를 근근이 이어간다. 롤스는 묻는다. 엄청난 연봉을 받는 마이클 조던이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처럼, 농구선수가 아닌 프레스코 화가가 각광을 받던 사회에 태어났더라면 어땠을까?”(p.201) 노력이 내게 보은할 것이지, 배반할 것이지는 이처럼 우연적 요인에 달려 있다.

능력주의자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성공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는 정당하게 평가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롤스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노력하려는 의지 자체도, 그러한 시도도, 그리고 흔히 말하는 자격이라는 것도 행복한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근거한 것이다.’”(p.210) 노력과 의지마저도 가정환경과 사회적 환경 등 우연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롤스에게 능력주의자들의 ‘공정’은 사실 정의롭지 못하다! 그들의 공정은 사실 착각일 뿐이다.

이런 우연적 요소를 고려하면, 내가 직면하고 있는 성과는 온전히 노력으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성과의 대부분은 사회에 분배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분배하면 정의로울까? 롤스에 따르면 ‘차등의 원칙’에 따라 분배하는 것이 정의롭다. 차등의 원칙이란 쉽게 말해 노력에 따른 불평등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우연적 요소를 고려해 그 불평등이 최소수혜자, 곧 가장 불우한 동료시민의 처지를 개선할 경우에만 허용된다는 원칙이다.

 

능력주의의 오만과 패자의 굴욕

둘째, 앞에서 본 것처럼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하는 한편,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능력주의는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강화한다. 샌델이 주목한 학력 위주의 능력주의는 경제의 글로벌화와 함께 ‘기술관료적’ 대졸자와 육체노동 비대졸자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크게 벌려 놓았다. 노동시장은 크게 ‘분단’되었다! 그러나 샌델은 이 경제적 불평등 뒤에 숨겨진 새로운 측면에 주목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능력주의적 오만’이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 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반면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신의 은총 또는 행운 덕분에 나는 성공할 수 있었어.’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그와 함께 정상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고 치부해 버린다.

여기서 패자의 굴욕과 분노의 정치가 싹튼다. 오만이 굴욕과 모욕을 낳은 것이다. 노동시장은 분단을 넘어 급기야 ‘분열’되어 버렸다. 이제 승자의 오만과 경멸 그리고 패자의 굴욕과 분노, 이 모든 것들은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경감시키고,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p.53). 마르크스식으로 번역하자면, 샌델은 능력주의의 ‘상부구조’에 주목한 것이다. 이는 롤스가 놓친 부분이다. 물론 노동자는 하나라고 믿고 있는 마르크스도 이 분열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여적 정의가 필요한 21세기

‘상부구조의 블랙박스’를 여는 샌델의 여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굴욕과 함께 패자들은 삶의 의미도 잃어버렸다. 왜 그런가? 그들이 자부심을 갖고 해 오던 그들의 ‘일’은 갈수록 저평가되고 있다. 그마저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설 자리가 없어진 것이다. 사회에서 배제되고 쓸모없는 존재, ‘고물 덩어리’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일은 단지 경제적 보상만을 노리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원하며, 사회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을 얻는다. ‘나는 동료 시민의 삶에 뭔가 도움이 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뿌듯한 마음 말이다!

그렇기에 샌델이 제안하는 정의는 롤스의 차등의 원리와 다르다. 그는 “기여적 정의”(p.327)를 제안하는데, 모든 사람이 공동체와 동료 시민에게 기여할 기회와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진보진영이 새겨야 할 ‘공공정책의 정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는 ‘일의 존엄성’을 재확인하고 시민들에게 그러한 일을 분배함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돈을 분배한다고, 나아가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한다고 포퓰리즘적 폭동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미국 공화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헤겔에서 가톨릭 사회교육에 이르기까지 기여적 정의의 이론은 ‘우리는 공동선에 기여할 때만 완전한 사람이 되며, 우리가 한 기여로부터 우리 동료 시민들의 존경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 전통에 따르면 근본적인 인간 욕구는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일의 존엄성은 그런 필요에 부응하는 우리 역량의 발휘로 이루어진다.”(p.320) “이것이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면 소비를 ‘모든 경제 활동의 유일한 목표이자 대상’이라 보는 것은 잘못이다.”(p.328) 케인지언 복지정책이 음미해 보아야 할 통찰력이다.

일하는 동료 시민들이 수없이 ‘쓸모없는 잉여인간’으로 전락해 가는 지금, 샌델의 기여적 정의가 최우선 경제정책으로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방법론적 정리’가 필요하다. 이는 맨 앞에서 언급한 도덕의 두 가지 축, 곧 옳음(의)과 좋음(선/미덕) 가운데 어떤 것이 앞서야 하는가의 질문과 관련된다. 여기서 샌델은 단연코 ‘좋음’이 우선적이라는 입장이다. 왜 그렇게 생각할까?

 

좌와 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기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대상과 목적이 정해져야 한다. 어떤 대상에게, 무엇을 위해 기여해야 한단 말인가? 앞에서 거론한 것처럼 대학이 신입생을 공정한 절차에 따라 선발하기 전 그 대학이 지향하는 목적이 정해져야 하듯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고자 하며, 그리하여 어떤 사회를 지향할 것인지가 먼저 정해져야 하는 것이다.

가령 경제체제에 관한 한 자본주의사회로 갈 것인가, 사회주의사회로 향할 것인가, 자본주의체제 안에서도 사회민주주의냐 자유시장체제냐, 윤리적 측면에서 볼 때 쾌락과 공리에 내맡기는 사회인가, 공동선과 의무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인가, 결국 ‘나쁜’ 사회인가, ‘좋은’ 사회인가? 이처럼 ‘좋음에 관한 목적’이 정해진 다음에야 거기에 맞는 ‘올바른 절차’가 비로소 정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우리 모두가 ‘일의 존엄성’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공동선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에 관해 탐구하고 논의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카지노 자본주의의 펀드매니저
카지노 자본주의의 펀드매니저

어떤 일이 공동선에 기여하는가? 일단 샌델은 카지노 자본주의에 종사하는 일들을 공동선에 기여하지 않는 일들로 평가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증명되었듯이, 그런 일은 경제를 오히려 망친다. 대신 시장이 저평가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에 눈을 돌린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은 잡화상 계산원들, 배달원들, 방문 의료서비스 담당자들, 그 밖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면서도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었다. 아주 잠깐이라도 말이다.” (p.330). 이왕 샌델이 드러내 주었으니 나도 추가하자. 택배노동자, 공공병원 의료진의 사회적 기여가 코로나 팬데믹 과정에서 비로소 드러났다면, 환경미화원, 버스운전기사, 보육교사, 상담직원, 요양보호사 등 ‘투명인간’들의 사회적 기여는 만성적으로 망각된다.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지만, 불명예스런(!) 환경미화원
공동선에 기여하고 있지만, 불명예스런(!) 환경미화원

그러나 이런 일들은 시장가격과 능력주의의 폭정에 휘둘린 나머지, 존재하고 있지만 잊고 있었던 수많은 일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가격과 공동선의 이러한 간극을 메우기 위해 샌델은 우리 사회가 바야흐로 다음과 같은 토의를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p.331) 공적 담론과 시민교육이란 이런 것이다!

요즘 내가 민주당의 ‘우클릭’ 앞에서 계속 보수와 진보에 관해 물고 늘어지고 있으니, 민주당 강성지지자들은 불편해 하실 것이다. 그러나 다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는 ‘좋음’에 관한 것이며, 이 좋음과 목적을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샌델은 정치를 ‘공동선(common good)을 제고하는 활동’으로 규정함으로써, ‘좋음’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그가 염두에 두는 좋은 사회는 일의 존엄성이 회복되고, 동료 시민들이 좋은 일로써 서로에게 기여할 기회를 가지는 사회, 곧 기여적 정의가 구현되는 사회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현대자본주의에 매우 적절한 ‘진보’이자 ‘좌’라고 생각한다. 특히 노동시장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브라만 및 크샤트리아’ 노동과 ‘바이샤 및 수드라’ 노동으로 분단되어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보수와 진보, 우와 좌 가운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윤석열의 패악질에 묻혀선 안 될 질문이다.

경제학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이 질문을 외면하는 경제학이 과연 쓸모 있을까? 경제학자들이 도덕적으로 사유하고, 도덕 중에서도 특히 ‘선’, 곧 좋음과 미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비과학적이거나 불명예스러운 게 아니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 역임. 중앙대 대학원 객원교수.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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