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선에 기여하지만 불명예스런 6411버스의 노동
대구교육청이 2022년 7월부터 2023년 2월 사이 5년 이상 근무하거나 1년 이상 근무한 55세 이상 학교급식노동자를 대상으로 저선량 폐CT검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폐결절 이상 소견자 790명, 폐암 의심자 17명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이들 중 네 명은 폐암으로 확진돼 수술받고 현재 항암치료와 요양치료를 받고 있다.” “현재 폐암으로 투병 중인 노동자 두 명은 산재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교육청 관계자들은 그 어떤 행정적 지원을 하기는커녕 학교 현장 확인이라도 할라치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오랜 급식 노동이 폐암의 원인이라는 것도 당사자가 증명해야 한다. 당연히 법률대리인을 선임할 수밖에 없고 법률비용 또한 부담해야 한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감당해야 할 고통이 너무 많다.”(『나는 얼마짜리입니까』, 6411의 목소리 지음, 2024, 창비, 271~272) 교육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의 밥을 책임지는 자긍심을 갖고 산다는 학교 급식노동자의 눈물어린 호소다. 이들이 없으면 앞으로 이 사회를 짊어지고 나갈 우리 아이들은 영양실조로 방치된다.
“20킬로그램짜리 쌀 포대부터 거대한 캠핑 물품, 1인용 소파, 당일 배송 아이스박스까지 물품도 다양하다. 어머어마한 물품들을 네 시간 동안 가려내어 옮기다 보면 어깨는 빠질 것 같았고, 발은 동상에 걸릴 듯 얼어붙었다. 택배 물량은 요일마다 달랐는데, 물량이 가장 많은 주중 이삼일은 3백 개를 훌쩍 넘을 때도 있었고, 상대적으로 물량이 적은 주 초반과 후반은 백 개가 채 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6411의 목소리, p.246) 노동자들 중 우리가 요즘 이처럼 자주 대면하는 노동자는 없다. 이 택배노동자들 없이 우리의 생활은 거의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택배사 아르바이트 노동자 김수진은 ‘월급’으로 백만 원 남짓을 손에 쥐었다.
“가사노동에는 ‘끝맺음’이 없다. 아침식사를 하면 점심시간이 기다리고 있다. 빨랫거리는 끝없이 나온다. 하나의 과정이 계속 반복되니 휴일도 없다. 일요일은 쉬는 날이 아니다. 온 가족이 집에 있어 더욱 손이 많이 가는 날일 뿐이다. 육체가 잠시 휴식하는 동안도 정신은 쉴 수 없다...... 아이를 비롯해 집안 어른들을 돌보는 돌봄 노동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극한의 감정노동이다. .... 가사노동에서는 좀처럼 보람을 느낄 수 없다. ‘가사노동’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고 이론상으로는 가치를 인정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경력단절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니 무슨 보람을 가질 수 있을까. ..... 이 정도로 사회적 공헌도를 지녔다면 가사노동자들은 이제 온전한 경제주체 중 하나로 인정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6411의 목소리, p.225~226) 아내를 출근 보내고 하루종일 집안일에 매달리는 가사노동자 김동건의 이유있는 항변이다. 통계청은 일상 속 무급 가사노동의 가치가 GDP의 25.5 퍼센트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법원이 인정하는 전업주부 일당은 도시 일용직 건설 노동자 일당에 준하므로, 2022년 기준 15만 3671원, 월 383만원 정도다. 그러나 ‘주부’는 무능과 무직의 대명사며, 공짜노동의 상징이다.
시장 사회는 “우리가 버는 돈과 우리가 공동선에 기여한 내용의 가치를 혼동하기 쉽다.”(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2020, p.331) 이리하여 우리는 시장 주도적 사회에서 물질적 성공, 곧 높은 연봉을 도덕적 자격의 증표로 해석하도록 지속성으로 유혹받는다. 다시 말해 시장기구가 평가한 가격을 사회전체의 이익과 공동선에 기여한 것으로 착각해 버리는 잘못을 지속적으로 범하는 것이다.

공동선에 기여하는 소방관과 공익을 위협하는 펀드매니저
이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은행창구에 앉아 노인네들에게 투기를 권유하는 펀드매니저의 상담노동과,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소리 없이 쓰레기를 수거해 가거나 개똥을 치우는 환경미화원의 노동 중 무엇이 이 사회에 진정 필요하며, ’공동선‘에 기여하는가?’ 전자의 노동은 실물경제의 확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거시경제의 불안만 초래하는 수가 많다. 지난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드러났듯이 심지어 경제를 해치기도 한다.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직종이며, 궁극적으로 없어져야 할 노동이다. 그러나 환경미화원이 하루만 병들어 누워도 거리는 파리로 들끓고, 악취가 진동하며 병균이 득실댈 것이다.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직종이다. 이처럼 경제적,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노동, 곧 공익과 공동선에 기여하는 노동이 세상에 또 있을까?
<소방관>은 2001년 서울 홍제동 화재사건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인데, 당시 열악한 조건 아래서 목숨을 내놓고 화마와 싸우던 소방관들의 사투를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자신들의 신념에 의하면, 소방관은 그저 타인의 생명을 살려야 할 ‘의무’를 진 사람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구할 ‘권리’와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권리는 기꺼이 행사하고 싶은 무형재화요, 자격은 그걸 누릴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런데 위험천만해 모두가 꺼리는 일에 대한 권리와 자격이라니 말이 되는가. 아무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해서도 안 되는, 그리하여 자신들만이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그리고 ‘불평없이 즐겁게 누릴’ 일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런 숭고한 사명감이 없다면, 그 뜨거운 불길로 뛰어들지 못할 것이다. 공동선에 크게 기여하는 일들이다. 6411 버스의 노동자 못지 않게 사회적, 도덕적, 그리고 경제적 가치가 큰 일이다. 그리고 칭찬받아야 할 명예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장의 평가는 형편없다. 시장이 그렇게 평가하니, 우리도 덩달아 그 노동에 명예를 부여하지 않는다. 펀드매니저에겐 엄청난 경제적 보상과, 심지어 한없는 도덕적(!) 명예까지 수여하면서 말이다.
공동선에 이처럼 크게 기여하는 일이라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공적자금이 그쪽으로 더 많이 배분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요긴하게 쓸 곳이 많은데, 요즘 정치인들은 이 돈으로 표를 구하는 데만 관심을 둘 뿐이다.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더욱이 펀드매니저의 세금마저 깎아주고자 한다.
외면하면 안 되는 민주당의 우클릭
요즘 우리 사회가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까지 진보의 축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던 민주당마저 보수우파를 천명할 정도다. 혹자는 정의당, 진보당, 노동당 등 적극적으로 진보를 지향하는 정당이 이미 존재하고 있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자신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군소정당들이 우리 사회에서 진보의 책무와 멍에(!)를 짊어지기엔 그 역량이 너무 취약하고, 주장도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할 정도로 조야하며 하나의 주제(!)로 지나치게 치우쳐 있다. 그러한 선명성과 논리적 완결성은 운동권과 학문세계에서 미덕이 될지언정 현실 정치에선 종종 악덕으로 작용한다.
이들이 과거 민주당만큼은 아니더라도 지금보다는 좀 더 타협적이고 개방적으로 되지 않으면 수권능력을 확보할 수 없다. 국민 중 일부는 자기이익만 챙겨주면 표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공동의 이익과 공동선, 곧 ‘공화주의적 시민정신’을 견지하고 있다. 이들은 사실 공동선에 무책임한 ‘자유지상주의적’ 진보에 대해 무척 걱정한다. 지난 대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무차별, 무조건 지급하려던 이재명식 기본소득정책이 거부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국민을 너무 계급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만 오해하면 안 된다. 대다수 국민은 이재명의 민주당과 몇몇 진보정당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공동체적이고 타인의 삶을 염려한다. 수권능력을 갖추기 위해 진보정당들이 계급이익이나 권리에 더해 ‘공동선’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란 무엇인가? 권리와 자유를 쟁취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몫을 더 챙기는 것도 맞다. 대다수 민중이 심각한 경제적 빈곤과 정치적 억압아래 놓였을 때는 이런 게 정치적 미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경제적 빈곤이 상당 부분 해결되고, 정치적 자유가 확보된 상황에서까지 이런 것이 정치적 목적이 될 순 없다. 더욱이 민중 ‘내부에서’ 불평등이 심화되고, 노동시장이 심각하게 ‘분단’된 21세기에서 정치의 목표는 달라져야 한다. 마이클 샌델이 지적한 것처럼, 이제 정치는 ‘공동선을 제고하는 활동’이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21세기 현대자본주의에 걸맞는 진보라고 여긴다. 우클릭한 민주당의 대안적 진보정당이 되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시장가격과 공동선의 이러한 간격을 메우기 위해 샌델은 우리 사회가 바야흐로 다음과 같은 토의를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공동선에 우리가 진정으로 가치있게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에서 시장의 낙인이 잘못되었는지를 반성하고, 숙고하고 민주적으로 공동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이다.”(마이클 샌델 p.331) 민주당의 우경화를 정략에 따라 간단히 퉁치며, 넘어가면 안 된다. 어려운 책무를 감당하기 위해 진보정당들이 국민과 함께 논의해야 할 주제다. 바야흐로 민주시민들의 숙고와 토론이 필요한 때다.
이 경우 진보정당들은 과거의 실수를 더 이상 저질러서는 안 될 것이다. 성급하지 않고 좀 더 참을성을 가지면서, 나아가 극단적 주장을 거두고 열린 자세로 공적담론에 참여해야 한다. 전투적이고 거친 논쟁 당사자가 아니라 중재하고 종합해 내는 부드럽고 합리적인 ‘의장’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이다.
큰 정부는 효율적이어야 한다
21세기에도 큰 정부는 여전히 필요하며, 이전에 비해 오히려 한층 더 요구된다. 하지만 효율적이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저 큰 것만이 미덕은 아니라는 말이다. 진보경제학자로서 나는 당연히 큰 정부를 옹호한다. 하지만 경제학자 일반으로서 나는 ‘낭비적’ 큰 정부에는 동의할 수 없다. 큰 정부는 ‘분단된’ 노동시장에서 꼭두새벽에 6411버스를 타고 다니는 ‘투명 노동자’와 더불어, 화마와 싸우며 공동선에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봉사해야 한다. 그게 경제적으로 효과적인 동시에 도덕적으로 공동선을 이루는 길이다.
영화 <소방관>을 관람하다 갑자기 마이클 샌델과 6411버스의 승객들이 떠올라 두서없이 써 본 글이다. 요즘 감수성이 많이 예민해선지, 열악한 근무조건과 박봉 속에서도 공동선을 이루고자 동료시민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소방관들의 헌신적 노력에 눈물을 흘렸다. ‘큰 정부’가 할 일이 태산같이 많다. 반사회적이고 불명예스러운 곳, 그리고 비효율적인 곳에까지 공적자금을 낭비할 명분과 여유는 우리에게 없다.
우경화! 외면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논의하면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처럼 우리도 보수 장기집권 시대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 역임. 중앙대 대학원 객원교수.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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