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있어야 할 자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우리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고 우리는 이 ‘섬뜩한 자’에 대해 치를 떨었다. 이 희대의 ‘섬뜩한 것’에 대한 감금은 애당초 불완전했다. 악몽이 현실이 될 때 우리는 오래된 상징과 억압됐던 제의를 소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검은 수녀들>(권혁재, 2025)의 신화적 상징성은 시의적절하다.

검은 수녀들 혹은 마고
소년의 몸에 깃든 악령을 제압하여 소년을 구하고자 하는 <검은 수녀들>은 ‘영화사 집’의 <검은 사제들>(장재현, 2015)에서 파생된 스핀오프 영화로써, 전작과 동일한 세계관을 갖는다지만 실은 더 심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여성 성직자인 수녀와 그녀의 자궁을 통해 억압됐던 오래된 세계관을 소환했다는 점에서 전작보다 신화적 상징의 원형에 가깝다. 시쳇말로 검사 출신의 ‘섬뜩한 자’에 대해 검사 조직이 무력할 수밖에 없듯이, 남성 가부장 사회의 모순이 배태한 금력과 권력의 악령을 남성 가부장 조직이 스스로 정화하기는 역부족이다.

‘강력한 마고가 소환돼야 할 시점이다. 마고는 이 영화 속에서도 등장한 삼신할미, 신모(神母)이며 바리데기 신화의 바리공주(무신(巫神))이고, 서구 신화학 용어로는 지모신(地母神)이다. 이는 여성들이 헤게모니를 잡았던 모계사회의 흔적이지만 지금도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을 모두 수용하는 대지와 자궁의 상징으로 토속신앙과 굿 속에 잔존하고 있다. 그래서, 유니아(송혜교) 수녀가 삼신할미와 굿을 통합하여 보이지 않는 신성의 세계(하느님)와 교신(기도)하여 소년의 생명을 구하고 악령을 자신의 자궁에 봉인하는 것에는 신화적 상징성이 있다. 유니아 수녀는 마고와 수녀가 결합한 다층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구체적으로 유니아의 신체를 통해 통합되는 것은 수녀와 마고, 성직자와 제사장이라는 역할 뿐만 아니라 가톨릭이 품는 다양성과 보편성이 주는 의미도 포함된다.
‘가톨릭’이라는 말뜻이 ‘보편적’, ‘일반적’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가톨릭은 오랜 역사 속에서 매우 신중하고 보수적인 보편성을 견지하며 세계 속 주류 종교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가톨릭의 역사에는 왕들과 절대 권력을 다투었던 교황들도 있었고, 타락한 면죄부도 있었지만,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을 주도하며 민중과 함께하며 ‘낮은 데로 임한’ 근현대사도 있었다. 한국 가톨릭은 가톨릭의 보편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 가톨릭은 제사를 미사 제례로 토착화했고 103위 순교 성인이 배출됐다. 윤석열 계엄 살생부 명단에 정의구현사제단이 등재(!)되어 있는 것 역시 가톨릭의 보편성이 추구하는 민중 중심적이고 진보적인 성향에 대한 반증이다.
이렇게 가톨릭의 보편성이 가능한 이유에는 유구한 역사를 통해 견뎌낸 ‘조직’과 ‘순명’ 이 포함 될 것이다. 예컨대, 수녀는 사제에 대해 순명 해야 한다. 현존하는 가장 남성 중심적인 구조가 가톨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톨릭은 매우 보수적이다. 반면에, 그 보편성을 견지하기 위해 가장 진보적일 수 있는 양날의 칼이기도 하다.
‘호명’과 ‘봉인’ 그리고 ‘화형 혹은 정화’
유니아 수녀는 소년 희준(문우진)의 몸에 숨어든 악령을 위해 ‘서품을 받지 못한 수녀는 구마를 할 수 없다’는 금기를 깬다. 의사인 미카엘라 수녀(전여빈)는 자신의 내부에 억압해 놓았던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비한 능력을 인정하게 되고, 유니아 수녀를 적극적으로 돕게 된다. 권혁재 감독은 이렇게 여성 버디 영화의 짜임새를 갖춘 후, 남성 사제 특히 서양의학으로 무장한 채 이들의 신비주의적 접근에 반감을 갖는 바오로 신부(이진욱)에게 신비주의에 대한 ‘과학적’ 리트머스 역할을 준다.
이 영화에 요란하고 스팩터클한 구마 의식이 없어 실망스럽다는 일부의 평가 역시 바오로 신부로 대표되는 남성 가부장 시선의 잣대로 구마 의식을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악령이나 요란한 구마 의식이 아니라 ‘여성’과 ‘마고를 품은 수녀‘에서 신화적 상징을 읽는다면 기존의 오컬트 영화가 주는 시각효과는 사족에 불과하다.

유니아 수녀는 악령이 자신의 이름을 실토하도록 한다. 악령의 이름을 유니아 수녀가 ‘호명’할 때 비로소 악령은 실체를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실토하게 하는 수단은 성수도 있고 십자가도 있으며 로마에서 공수해 온 귀한 성물도 있지만, 무엇보다 ‘호명’이다.
호명 이론으로 유명한 알튀세르의 테제를 빌리자면, (그의 기념비적인 논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을 주체들로 호명한다”라는 테제를 세웠다) 이름을 불러야만 그 주체 즉, 악령의 본질이 정체성을 드러내고 드러내야만 봉인할 수 있다.
삼신할미와 마고, 대지의 신이자 제사장이라는 다층적 의미의 유니아 수녀는 출산과 죽음의 상징인 대지, 자궁을 통해 악령을 화형시킨다. 마고는 조로아스터교에서 비밀의식을 주관하는 마법사의 이름이기도 하다. 조로아스터교는 모든 것을 불로 정화한다. 그녀가 불로 죄를 씻고 봉인하고자 하는 것 역시 신화적 상징성을 잘 드러낸 장면이다. 유니아 수녀가 악령을 품고 불 속으로 들어갔을 때 수많은 쥐 떼가고속도로와 도시를 덮는 장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동양적 상징 세계에서 쥐는 어두운 자시(子時), 수기(水氣), 북망산의 그 북향(北向), 죽음의 기운이며, 물과 불은 상극이니 불이 강성할 때 물(쥐)이 사라진다.
<검은 수녀들>이 드러낸 신화적 상징의 세계가 뻔뻔한 악령 혹은 거짓과 무책임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소시오패스의 ‘섬뜩함’이 판치는 현실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기를. 영화라는 문화(Culture)도 불(火)이니까.
글·김 경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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