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 차이와 어법의 격차를 실감했던 두 장면이 어른거린다. 하나. 학생들 모임에서 겪은 일이다. 당시 유행하던 초성 게임에 함께하였다. 진행자는 간단한 문제부터 점차 여러 음절로 된 문항을 제시하였다. 처음부터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역시 세대 차이는 어쩔 수 없군’ 속으로 되뇌며 적어도 참여한다는 인상은 주고 싶었다. 겨우 따라갈 듯하면 누군가 벌써 정답하고 외친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ㅇㅇㅇ. 손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이완용!
그러나 반응은 뜨악했다. 나는 격하게 따졌다. 놀랍게도 이완용을 아는 학생은 많지 않아 설득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의 상식과 뇌리에서 금방 떠오르지 않는 의외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들에게 정답은 아이유. 주로 드라마와 노래 제목, 연예인 이름이 열거되었다.
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세대 간 격차는 어느 정도 인정하고 내재화된 상태라면 어법 차이는 당혹을 넘어 이질감을 느끼게 하였다.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 혼잣말인 줄 알고 힐긋 보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그는 온갖 몸짓과 가끔 하이톤을 내며 통화 중이었다.
피할 수 없어 두세 걸음 간격을 멀리했으나 여전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집에서 벌어진 해프닝을 주고받는 대화였다. 아니, 한쪽 말만 내게 들렸으니, 대화라고 보기에는 적절하지 않지만. 거슬리는 청소년들의 대화가 못마땅한데 어쩌다가 끝까지 듣게 된 것이다. 다음은 녹취가 아니라 재구성한 것이다.
야 있잖아 어제 개피곤한데 개죽는 줄 알았어.
꼰대가 ㅈㄴ 취해 갖고 개처잔소리 하는 거야.
아침에 겨우 개같이 일어났어, 하루 종일 개졸려 죽는 줄.
내일은 늦게까지 개때려 자야지.
잠깐씩 끊기는 걸 보면 상대도 만만치 않게 ‘개’타령 맞장구가 있었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 말버릇이 저래서야’ 하며 혀를 끌끌 차고 지나쳤다. 어느 순간 ‘개’ 소리를 피하려 한다고 해서 피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러서야 이 장면을 되돌아보게 된다. 무엇 때문에 저토록 ‘개 개 개’하는지 호기심이 일기 시작한다. 국어사전을 보니 접두사 ‘개’의 풀이가 다음과 같이 나온다.
① 일부 식물명사 앞에 붙어 ‘야생의’ 또는 ‘질이 떨어지는’의 뜻을 더하는 말
② 추상적인 일을 나타내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헛된,’ ‘쓸데없는’의 뜻을 더하는 말
③ 부정적인 뜻을 가지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정도가 심한,’ ‘엉망진창의’의 뜻을 더하는 말
현재 청소년들에게 ‘개’는 사전적 의미를 한참 넘어 진화 중이다. 사실 나는 개뿔, 개수작, 개코 정도를 제외한 개XX 따위 낱말은 입에 담지 못한다. 대부분 ‘개’는 비하적 언사거나 욕지거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개떡, 개망나니, 개뼈다귀, 개수작, 개죽음, 개XX, 등을 부정적으로 활용했다면 그나마 ‘개코’ 정도가 긍정적 표현이리라. 이제 MZ에게 ‘개’는 단순한 접두사, 기성세대의 부정사가 더 이상 아니다. 오픈 사전은 청소년들의 용례를 반영하여 설명한다. “청소년들이 주로 사용하며 형용사 앞에 붙어 사용한다. 의미는 ‘아주,’ ‘매우’ 같은 뜻이다.” 그들은 기성세대의 부정어 ‘개’를 단숨에 긍정을 넘어 최상급으로 격상시켜 놓았다. 예컨대, 개꿀, 개멋져, 개빡쳐, 개이득, 개지려, 개재수, 심지어 개감사 등처럼 명사, 형용사, 부사 앞에서 아무런 거침이 없다. 기존 문법과 기성세대가 담지 못하는 의미 전복이다.
‘개처’의 활용도가 부쩍 늘어난 한국 사회
최근 ‘개’의 활용에 변화가 눈에 띈다. 접두사 ‘개’로 성에 차지 않은 듯 ‘처’와 함께 강화되는 모양새다. 국어사전에서 ‘처’는 ‘마구, 많이, 함부로’를 뜻하는 접두사라고 소개한다. ‘처먹어,’ ‘처마셔’처럼 주로 음식이나 먹는 행위에 대한 조롱 및 비하적 뉘앙스가 결합한 것이다. 긍정보다 부정적인 예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개처’의 활용도가 부쩍 상승하고 있다. 이 경우 ‘처’와 ‘쳐’의 구분은 없는 듯하다. 다음의 예와 같이 ‘개쳐’ 혹은 ‘개처’의 폭발력을 실감할 수 있다. 개처나빴어, 개처느림, 개처담아, 개처답답, 개처돌았네, 개처뒤죽박죽, 개처망한, 개처맞음, 개처매워, 개처무거워, 개처미뤘다고, 개처미쳐, 개처바빠, 개처발라, 개처비싸, 개처어이, 개처오랜만, 개처울었다, 개처웃었어, 개처통화해, 개처튕기네, 등등. 기존 ‘개’가 MZ의 입에서 ‘처’를 만나 의미가 한층 강화된 최상급으로 확장되는 형세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왜 평범한 접두사를 최상급으로 둔갑시켰을까? 여기서 우리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1등 추구 풍조를 살펴야 한다. 다음은 최근 한 방송의 뉴스 한 꼭지다.
기자: K-팝 가수들과 현지 가수들이 함께한 화려한 개막식을 시작으로 딸기 컵케이크와 크레페, 쥬스 등 다양한 상품들이 자카르타 시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한국에서 날아온 논산 딸기를 현장에서 맛보고 구매도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현지 딸기에 비해 크고 과즙이 풍부한 데다 당도까지 높다 보니 관람객들의 극찬이 쏟아집니다.
현지 시민: “달콤하네요. 그리고 겉에는 설탕 맛이에요. 너무 단 건 안 좋아하는데 이건 딱이에요. 한국 딸기는 하얗지만, 다른 딸기랑 달리 달콤하다고 들었어요.”
기자: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개막식 첫날에만 8만 5천여 명의 자카르타 시민들이 찾는 등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현지 시민의 인터뷰는 “설탕 맛”, “이건 딱”, “달콤”으로 누가 봐도 원급 묘사다. 그런데도 기자는 대놓고 “극찬”이라는 최상급 표현을 쓴다. 극찬의 사전적 의미를 몰라서일까? 아니면 외국인의 평가라면 단순 긍정이 최상급으로 바뀌는 마법이 일어난 것일까? 하긴 세로로 서 있는 ‘가로’등을 왜 ‘가로’등이냐고 묻는 세대다.
위의 예는 한 단면에 불과하다. “맛이 훌륭하다”, “현지에서 느껴보지 못한 맛이어서 새롭다”라고 말한 것은 원급이지 최상급 표현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라도 안다. 그런데도 기자는 “극찬”이라며 자랑스럽게 전한다. 한류 보도에서 유독 ‘극찬’이 잦고, 연예 관련 뉴스에도 ‘극찬’은 꽤 관용적이다. 약간의 칭찬과 긍정적 평가가 최상급으로 보도되는 행태가 언론사의 제지 없이 통용된다.
사실 원급으로 최상급을 표현하는 방식은 문화권에 따라 발견된다. 특히 로마자 권역에서는 성서의 영향 때문인지 왕중왕, 하늘의 하늘, 노래 중의 노래, 등이 있고 최근 스포츠 영역에서 ‘역사적으로 위대한’을 뜻하는 GOAT(Greatest Of All Time)가 최상급으로 쓰이곤 한다.
한편, 중국의 한자 표기에 이따금 볼 수 있는 지고(至高), 지극(至極), 지대(至大), 지성(至誠), 지순(至純), 지엄(至嚴), 지존(至尊) 등에서 ‘더할 나위 없는’이란 의미의 최상급으로 읽는다. 한국에서도 ‘끝판왕,’ ‘역대급,’ ‘존잘,’ ‘짱’등이 아직은 비속어로 분류되나 청소년들 사이에는 최상급을 뜻하는 말로 소통된다. 한글 ‘역대급’은 GOAT에서 유래한 번역이거나 관련되어 사용된 듯 보인다. 주로 MZ 세대의 조어와 어법이지만 최상급의 등장과 활용은 환영할 만하다.
대부분의 MZ 세대를 ‘개’로 만든 사회 풍조
그렇다면 부정적이며 비하적 뉘앙스의 접두사, ‘개’와 ‘처’가 어떻게 청소년 사이에 급속도로 파고들었는지 궁금하다. 그들의 최상급 뿌리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MZ 세대는 한국 사회의 줄 세우기와 승자 독식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들이다. 대학입시 위주 교육, 1등만 배출하고 추앙하는 풍조는 MZ 세대의 대부분을 ‘개’로 만들었다.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청소년들에게 ‘개’는 싫고 귀찮은 대상이다. 그들은 싫지만 ‘개’를 끌어들임으로써 ‘앗싸’를 자인한다. ‘개’를 통하여 ‘인싸’에 들지 못한 불만과 울분을 표출한다. 그것은 치열한 생존 피라미드에서 배제된 자들의 자학적 언어이다. 자기 패배적 투영이다. ‘앗싸’의 응어리를 ‘개’로 소화해 배출할 통로가 필요한 것이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을 직시한다.
그러자 더 센 ‘처’를 소환하여 그들의 속마음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두 접두사가 겹쳐 ‘개처’로 활용되는 것은 보기 드문 사회 현상이다. 앞의 용례에서 확인하듯 ‘개처’는 모든 용언 앞에서 최상급 접사로 쓰일 기세다. 지금은 ‘개처···’에 머물지 않고 ‘개존,’ ‘개쌉’ 등으로 보폭을 확대하는 형국이다.
청소년들의 ‘개…’는, 강력한 저항의 언어
입시 위주와 줄 세우기 교육의 병폐는 꼭대기의 한 사람을 향한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을 겨냥한 교육이며 최후 승자를 위한 배열이다. 최고는 하나, 최후 한 사람만 남는다. 최상급 또한 한 사람에게 허용되는 배제의 용어다. 하나, 혹은 한 사람 외에 활용할 대상을 찾지 못한다.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교육과 세상 풍조는 최후의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를 만들고 배제의 배제를 낳는다. 나머지는 그저 아류, 패배자일 뿐이다.
청소년들의 ‘개…’는 오직 한 사람의 행복과 한 사람의 성공을 위한 세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언어다. 그들에게 J.S. 밀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요원하지만, 한국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분명하다. ‘개’의 사전적 의미처럼 사회의 ‘정도가 심하여 학생들의 인성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현실에 대한 그들의 자각적 진단이다.
인터넷 환경에 뿌리를 두고 성장한 MZ 세대는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전통을 가뿐히 넘을 수 있는 자유와 문화 창달의 힘이 있다. 부정적 뉘앙스를 단숨에 긍정적 개념으로 바꿀만한 역량이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의 접두사 ‘개’가 변화시킨 단적인 예를 직관한 셈이다. 청소년의 어법이 거슬린다고 타박하지 말고, 그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일 때다.
한류의 선봉에 선 MZ 세대의 문화 창조 역량이 기존 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정신을 만나 배제의 언어 대신 상생과 포용의 언어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한다. 그들의 분방한 사유가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모두가 공유할 포근한 말과 가치를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글·김창주
한신대 신학부에서 신학을 가르치며, 히브리 유산을 인문학적으로 푸는 글을 주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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