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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오이디푸스가 주인공이 아닌 현대판 오이디푸스 이야기
[안치용의 시네마 크리티크] 오이디푸스가 주인공이 아닌 현대판 오이디푸스 이야기
  • 안치용(영화평론가)
  • 승인 2025.06.22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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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2010년)은 현대사의 참상인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그리스 고대 비극의 구조를 채용해 인간 존재의 의미와 구원을 탐구한 작품이다. 오이디푸스 신화가 영화 전편을 지배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오이디푸스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이다. ‘그을린 사랑’의 원작은 캐나다 극작가 와이디 무아와드의 동명 희곡이며 원제 ‘Incendies’는 ‘화염’이란 뜻이다.

 

저주받은 자의 유서

쌍둥이 남매 잔느(멜리사 데소르모-풀랭)와 시몽(막심 고데트)은 어머니의 죽음 후 유언을 듣고 충격을 받는다. “관에 넣지 말고 나체로 기도문 없이 묻어다오. 세상을 등질 수 있도록 엎어놓아라"란 유언 자체가 놀라운데 묘비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 이 유언에 따른 매장 방식은 어느 문화권이든 대체로 고인을 모독하는 장례이다.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아버지와 존재조차 몰랐던 형/오빠를 찾아 어머니가 쓴 편지를 전달하라는 내용까지 유언에 담겼다. 잔느에게는 아버지에게, 시몽에게는 형에게 전하는 편지가 각각 넘겨졌다. 두 사람은 아버지와 형을 찾는 과정에서 어머니 나왈 마르완(루브나 아자발)의 과거를 통해 충격적인 진실을 대면한다. 진실은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한 현대판 오이디푸스 이야기이다.

 

세 개의 점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 오프닝 시퀀스는 강렬한 인상을 주며 자체로 인상적인 영상이다. 나중에 ‘오이디푸스’로 판명되는 어느 소년의 삭발 장면은 이어 그 아이의 오른쪽 발뒤꿈치를 클로즈업해 보여준다. 세로로 찍힌 세 개의 검은 점. 이게 영화를 풀어가는 실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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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뒤꿈치의 세 점은 영화에서 세 번 나온다. 오프닝 시퀀스에 이어 이 아이의 출생 직후, 출생하며 헤어진 아이를 기억하기 위해 찍어놓은 점을 60살이 된 생모 나왈이 발견하는 거의 결말의 장면까지다. 사실상 수미상관이다. 유언에 따라 어머니의 고향 레바논으로 가 나왈의 과거를 확인하며 자신의 진실 또한 파악한 시몽이 “1+1=2인데 1+1=1이 될 수 있을까?”라고 읊조리고 잔느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절규하는 장면 또한 세 개 점으로 상징된다.

아버지가 동시에 형/오빠라는 오이디푸스 구도가 확인되면 마지막은 ‘오이디푸스’에게 그가 오이디푸스임을 알려주는 장면일 수밖에 없겠다. 이 사건의 당사자 중 진상을 파악한 최초의 사람은 ‘이오카스테’인 나왈이다. 오이디푸스 신화의 결말과 유사한 죽음을 맞이한 나왈은 진실을 묻어버리지 않고 당사자 모두에게 알린다. “1+1=2인데 1+1=1이 되는” 진실은 잔느와 시몽에게 맡겨진 각각의 편지 수취인이 동일인이라는 데서도 확인된다.

 

신화와 역사

그리스어 오이디푸스(Οἰδίπους)는 오이데오(οἰδέω)와 푸스(πούς)라는 두 그리스어 단어로 이루어졌다. ‘부은 발’ 또는 ‘상처 입은 발’이란 뜻이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의 발에 상처가 생기는 연원은 운명 또는 신탁과 관련된다.

영화의 ‘오이디푸스’에게 상처(세 점)가 생긴 까닭 또한 운명에서 찾아야겠지만, 이후 전개는 주로 역사와 관련한다. 다른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처럼 오이디푸스 왕은 존엄한 인물로 설정된다. 반면 영화의 ‘오이디푸스’는 역사의 격랑에 휘말려 타락한 사악한 인물이다. 두 오이디푸스 사이에 강조점이 운명과 역사로 갈린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 격랑에 영화의 ‘오이디푸스’가 자발적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고 할 때 그것 또한 운명이긴 하다.

영화에서 이 세 점은 기의 없는 기표로 부유한다. 원래 기표라는 게 기의를 미끄러지지만, 영화의 상황은 더 없이 예외적이다. 정확하게는 거의 무의미한 기호로 방치되다가 기의가 분출하면서 비극적으로 호응하며 기표로 등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세 개의 점은, 그리스 비극의 형식으로 말하면 운명의 표지이고 정신분석학에 기대면 주체 결여의 기표이다. 영화에서는, 압도적 기의가 베일을 벗으면서 떠돌다가 어쩌면 은닉되었을 기표를 통해 공포를 소환한다.

쌍둥이가 유언을 수행한 후 읽는 어머니 나왈의 편지에서 나왈이 공포와 사랑을 언급하지만, 이 대목이 직접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연관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연민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의 도달이란 그리스 비극의 공식이 이 영화에서 구현됐다고 보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영화 대부분을 공포와 연민이 작동하다가 마지막에 이름이 들어간 비석이 세워지고 그 앞에 아들이자 아이들의 아버지가 서 있는 엔딩 장면 등은 카타르시스를 지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인체의 가장 낮은 곳에 새겨진 운명의 흔적은 그리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 외에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우스(Ἀχιλλεύς)에서도 나타난다. 아킬레스건이란 단어를 통해 현대까지 살아남은 아킬레우스란 이름의 어원 중엔 ‘슬픔의 자식’이 있다. 영화의 ‘오이디푸스’와 그 자녀,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이자 ‘창녀’였던 나왈 모두 ‘슬픔의 자식’이라고 할 때 어울리는 어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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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카스테

출생과 함께 가족에게 버림받고 운명의 꼬임으로 고문기술자가 돼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한 영화의 ‘오이디푸스’에게 도달한 나왈의 편지 두 통은 사건을 모두 해명한다. 해결은 없다.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운명은 때로 해답 없는 문제만을 내어놓는다.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해답일 때가 있다. 나왈이 헤쳐나온 레바논 내전은 중세가 아닌 20세기에 같은 국가에 속한 사람들이 어느 날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나눠 살육을 벌인 종교전쟁이다. 영화는 이 내전의 잔혹함을 보여주며 그 비인간적 사태에 휘말리고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한 나왈의 삶을 가슴 아프게 그렸다.

그리스 비극의 이오카스테와 영화의 ‘이오카스테’에게 출제된 문제가 공히 해답이 없거나 외면해야 하는 문제였다. 나왈에게도 문제를 외면하는 것만이 해답일 수 있었지만 나왈의 바로 눈앞에다 영화는 문제를 던져놓는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나왈이 어느 청년의 발뒤꿈치에서 점 세 개를 확인하는 순간은 회피불능으로 주어졌다. 수영장 물 안에서 풀사이드에 서 있던 남자의 발뒤꿈치에서 점을 확인하고 곧바로 그가 자신을 고문한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며 나왈은 외통수에 걸렸음을 지각한다. 자신을 고문하고 강간한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지 않는 게 이상하다. 그 남자의 발꿈치에 세 개 점이 새겨져 있는 게 이상할 뿐이다.

평생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찾아낸 아들. 그가 ‘오이디푸스’라면 자신은 ‘이오카스테’이어야 하고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비극일 수밖에 없다는 지각. 운명에 그을린 사람에게 해법은 없지만 영화나 비극을 만드는 사람에겐 해법이 있다. 사랑이란 해법이자 카타르시스다. 하지만 ‘이오카스테’ 자신에겐 그 해법을 적용할 수 없었다. 관객과 자녀들에게 가능한 해법이다. 마찬가지로 ‘오이디푸스’에게도 해법은 불가능하다.

이 영화에서 빠져있는 건 부친살해이다. 대신 고문과 강간을 통한 모친살해 비슷한 구도가 성립한다.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는 오이디푸스에게 부친살해와 근친상간 등 운명의 저주가 집중된다.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 사랑>에서는 모친살해와 근친상간, 근친상간을 통한 출산 등 모든 저주가 ‘이오카스테’에 집중된다. 레바논 내전을 배경으로 현대판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푸는 중심으로 ‘이오카스테’를 택한 건 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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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핵심 대사 중 하나인 “함께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는 반어에 가깝다. 정말로 그랬다면 나왈이 발뒤꿈치에 점 세 개를 가진 남자를 발견하고도 죽지 말았어야 한다. 자신의 부재를 전제하며 “함께 하는 것”을 말한 까닭은, 장례에 관한 유언에서 밝혔듯 모든 죄책과 저주를 자신이 지고 가니, 남은 자들은 남은 삶을 소중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빌뇌브 감독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그을린 사랑>에는 2010년 개봉돼 화제를 일으키며 전 세계 영화 팬의 뇌리에 남았다. 그는 레바논 태생의 캐나다 극작가 와즈디 무아와드의 연극 <화염>을 우연히 관람한 뒤 곧바로 영화화 판권을 구매해 5년에 걸쳐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그을린 사랑>은 빌뇌브 감독의 <듄> 시리즈의 시작점이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2009년 <그을린 사랑>의 촬영지를 물색하던 중 요르단의 사막에서 광활한 사막의 풍경에 감명을 받아 <듄>을 떠올렸다고 한다.

 

글 안치용, 사진 티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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