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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사체험과 죽음: 인간의 사후
임사체험과 죽음: 인간의 사후
  • 성해영
  • 승인 2013.06.1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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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수수께끼 중 하나다. 그런 사실을 반영하듯 인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끝없이 던져왔다. '인간은 왜 죽는 것일까?' '죽음 이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육체적 죽음 이후에도 존속하는 영혼과 같은 그 무엇이 과연 있는 것일까?' 동시에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 압도적인 평등 감각을 부여한다. 연령, 성별, 학식, 재산, 명예, 권력 등과 무관하게 이런 질문이 모든 인간에게 절실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모두 미래의 어느 시점에 예외 없이 죽는다. 아무리 큰 권력과 부를 가졌다 할지라도!

'죽음'이라는 수수께끼

미국의 신경외과 의사 이븐 알렉산더의 <나는 천국을 보았다>(김영사)와, 예일대 철학 교수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엘도라도)는 모든 인류의 오랜 수수께끼인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만, 그 접근 방식과 결론이 사뭇 달라 눈길을 끈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Proof of Heaven)는 제목 그대로 사후 세계인 천국을 얘기한다. 즉,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죽은 다음에나 갈 수 있다는 천국을 다녀왔다는 체험담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천국을 방문한 보고담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게다가 인간 의식이 뇌의 부산물에 불과하다고 굳게 믿어온 신경외과 의사가 사후 세계를 다녀왔다니 더욱 그러하다. 반면 <죽음이란 무엇인가>(Death)는 영혼, 영생, 사후 세계, 자살 등 죽음에 관한 주제를 꼼꼼하게 되짚는다. 철학자답게 죽음의 문제를 이성적 추론에 입각해 끈질기게 사색한 저자는 영혼과 사후 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여야 할 근거가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죽음이라는 주제를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두 책의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다. <나는 천국을…>가 임사체험이라는 비일상적 사건의 보고에 치중하는 데 반해, <죽음이란…>는 죽음에 대한 이성적 사유를 철학적 관점에서 정리하기 때문이다. 케이건 교수는 인간 존재를 이해하는 태도를 크게 '이원론'과 '일원론'으로 구분한다. 인간을 영혼과 육체라는 독립적 실체의 결합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이원론이라면, 물리주의(Physicalism)라고 일컫는 일원론은 육체가 좀더 근원적이고 정신은 이에 수반되는 현상으로 본다. 이 구분에 따르면 알렉산더 박사는 갑작스러운 임사체험으로 인해 이원론자로 변모한 셈이고, 케이건 교수는 육체와 분리되는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원론자이다. 특히 초자연적 현상의 가치에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케이건 교수는 임사체험에 대해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차이는 임사체험을 둘러싸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일원론을 견지하는 케이건 교수에게 임사체험은 쉽사리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그 가치를 인정할 수도 없는 곤란한 대상이다. 뇌 과학에 입각한 물리주의적 해석을 제안하지만, 이 체험을 개인적인 망상이나 두뇌 작용의 결과물로 곧장 환원시킬 수 없다는 점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임사체험을 사후 세계나 영혼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강조한다. 반면 완전한 죽음은 아닐지라도 죽음에 가까이 가보았다고 주장하는 알렉산더 박사는 신경외과 전문의로 쌓은 유물론적 과학이 그가 겪은 임사체험을 깔끔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임사체험은 의식이 뇌에 수반한다고 믿던 그를 사후 세계와 영혼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이원론자로 만든 것이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는 체험

인간 경험의 하나로 간주되는 임사체험은 비체험자에게는 입증이 불가능한 그 무엇이다. 이 말은 임사체험이 마치 '바나나'를 맛보는 것처럼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체득하기 어려운 앎을 수반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비체험자는 체험자의 보고를 간접적으로 비교하거나, 보고담의 내적 일관성에 초점을 맞추어 그 타당성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케이건 교수의 유보적 처지도 결국 임사체험의 특성을 십분 반영한 것이리라. 하지만 예기치 않게 임사체험을 겪은 알렉산더 박사는 그 체험으로 인해 다른 차원에 대한 의미 있는 통찰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임사체험이 자신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이 곧바로 그가 경험한 임사체험의 타당성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임사체험은 여러모로 주목할 만한 인간 경험이다. 임사체험은 뜻밖에도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전면에 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자동차 보급은 교통사고로 인한 응급환자를 양산해냈고, 심폐소생술의 발달은 죽음을 피하기 힘든 환자들을 소생시켰다. 이처럼 문명의 이기 때문에 죽을 뻔했지만, 의료 기술에 힘입어 되살아난 사람들이 저쪽 세상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물리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임사체험은 역설적으로 유물론적 과학으로 인해 가능했다. 다른 한편으로 임사체험을 사후 세계와 영혼의 증거로 받아들인 종교계 반응은 뜨거웠다. 그러나 열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임사체험자들이 저 세상을 다녀온 후, 심판보다는 무엇이든 수용하는 사랑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판과 징벌을 강조하는 전통적 교리와 임사체험은 쉽사리 화해할 수 없었다.

이처럼 과학 발달로 인해 빈번하게 등장한 임사체험은 도리어 물리주의의 한계를 되물었고, 동시에 종교를 강력하게 지지할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전통적 교리와도 충돌했다. 결국 임사체험은 체험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의 많은 이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완전히 죽은 자는 말 그대로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 사후 세계와 영혼의 존재를 증언할 수 없다. 한편 이성적 담론은 죽음에 관한 여러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죽음 이후의 세계를 확정적으로 입증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다. 심지어 삶의 경계를 넘어 죽음 가까이 가보았다는 임사체험 역시 죽음을 수수께끼로 만들기는 매한가지다. 물론 임사체험은 경험자들을 변화시킨다. 그러니 체험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체험을 곧장 사기나 착각으로 치부하기는 곤란하다. 그렇지만 임사체험은 사후 세계를 확증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 체험이 어디까지나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사체험은 우리에게 물음을 제기한다. 무엇보다 죽음과 삶을 잇는 것처럼, 과학과 종교를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만나게 한다. 나아가 임사체험은 죽음과 종교의 근원적 관계를 되묻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종교는 생겨나기 어렵다. 구약성경에 나온 아담과 이브의 신화는 죽음을 신에 대한 불복종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덧붙여 지혜의 열매를 따 먹어 죽음을 맛보게 된 인간에게 남은 과제는 영생을 주는 생명의 열매를 따먹어 죽음을 넘어서는 일이라 주장한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와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해묵은 그러나 영원히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두 책은 확고한 답이 아닌, 더 큰 의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

글•성해영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미국 라이스대학에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A Happy Pull of Athene: An Experiential Reading of the Plotinian Henosis in the Enneads>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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