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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중세’도 아닌데…
지금이 ‘중세’도 아닌데…
  • 세르주 알리미
  • 승인 2013.07.09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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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강요되는 경제정책은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가? 그리스 국영 방송국은 군사독재가 종식된 직후 설립되었다. 유럽연합(EU)의 명령을 수행하기에 여념이 없는 그리스 정부는 의회의 허가도 구하지 않고 국영방송 휴업을 결정했다. 그리스 사법부에서 방송 휴업 유보 여부를 심의하는 동안,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왜 유럽헌법의 다음 구절을 상기시키지 않았을까.

“EU 회원국의 공영방송 시스템은 사회 전체의 민주적·사회적· 문화적 필요에 직결된다.” 유럽연합은 그러기는커녕 지난 6월 12일, “그리스 정부의 방송 중지 결정은 그리스 경제를 현대화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현재 그리스 정부가 실제로 기울이고 있는 엄청난 노력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며 그리스 정부를 두둔하고 나섰다.

유럽인은 유럽헌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됐음에도 결국 채택되는 광경을 목격한 바 있다. 헌법안 재협상을 주장하던 후보들이 나중에는 쉼표 하나 고치지 않은 헌법안 채택에 앞장서는 모습도 보았다. 키프로스에서는 하마터면 모든 이들이 자신의 예금 일부가 몰수되는 사태를 맞을 뻔했다.(1) 게다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 그리스 국영방송 중단 조처다. 덕분에 EU집행위원회는 그토록 싫어하는 공공영역 노동자 2800명이 해고되는 것을 지켜보게 됐다. 그리하여 청년실업률이 60%에 달하는 그리스는 트로이카- 국제통화기금(IMF)·EU집행위원회·유럽중앙은행(ECB)- 가 강요하는 일자리 감축 목표에 접근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시점에 미국의 한 언론사는 IMF의 비밀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3년 전부터 그리스에서 추진 중인 정책은 모두 ‘명백한 실패’로 판명 났다. 과장된 성장률 예측에 따른 착각이 원인일까?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장황한 문서를 분석한 결과, IMF는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그리스 부채에 대한 즉각적인 채무 구조조정이 이루어졌다면 유럽 납세자들의 부담이 훨씬 경감했을 것이다. 그리스가 꾼 돈은 모두 민간 부문 채권자에게로 흘러갔다. 이제 그리스 정부에 대한 채권자는 은행이나 투기 펀드가 아니라 IMF와 유럽 납세자들이다.”(2)

이런 식으로 투기꾼들은 그리스 정부에 엄청난 이자율로 빌려준 돈을 단 한 푼도 잃지 않고 모두 회수한 후 손을 털었다. 투기 펀드의 이익을 위해 유럽 납세자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능란한 솜씨 덕분에 트로이카는 그리스 국민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특별한 권위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텔레비전 방송이 중단된 마당에, 병원·학교·대학 등이 문 닫는 것은 시간문제 아닐까? 이런 경향은 단지 그리스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유럽은 지금 가혹한 대가를 치르면서 중세 시대로 회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리듬분석> 등이 있다.

(1) ‘키프로스의 교훈’(La leçon de Nicosi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4월호.
(2) ‘IMF Concedes It Made Mistakes in Greece’,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13년 6월 5일.

'지성의 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monde Diplo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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