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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정치사회학
위선의 정치사회학
  • 성일권
  • 승인 2013.10.12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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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배우가 연극의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얼굴을 가릴 수 있게 만드는 도구이자 수단이었다. 반면, 그리스어 1ποL5ιτηζ(위선자)는 원래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은유적 용례에서도 배우가 쓰는 가면이 아니라 배우 자신을 지칭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칼 구스타 프 융은 자아가 겉으로 드러난 의식의 영역을 통해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내면세계와 소통하는 주체라면 페르소나는 일종의 가면으로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 또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화제의 중심에 있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페르소나는 은유적으로 그가 맡은 검찰 총장 역할로서의 ‘법적 인격’을 의미하는 셈이다. 그런데 그의 페르소나가 망가짐으로써 법적 인격이 박탈되었고 그 주체마저 위협받고 있다.

도대체 누가, 왜 채동욱의 페르소나를 발가벗기는가? 한나 아렌트는 <혁명론>에서 “로마 시민이라면 페르소나, 즉 법적 인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마치 법이 그에게 공공 무대에서 그가 맡을 것으로 기대되는 역할을 부여하는 것과 같았다”고 말했다.(1) 페르소나를 착용하지 않을 경우 권리와 의무를 지니지 않은 자연인만 존재하겠지만, 이럴 경우, 그는 법의 영역과 시민 정치체 밖에 있는 사람, 예컨대 위선자나 노예로 지칭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위선을 그다지 크게 위험하지 않은 악덕 중 하나라고 지나치는 경향이 있지만, 위선은 그 어떤 악덕보다도 더 증오되어야 한다. 위선은 악덕이며, 부패는 악덕을 통해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천하가 다 알 듯, 명문가가 운영하는 한 보수신문의 폭로로 촉발된 채동욱에 대한 경쟁적 페르소나 벗기기는 또 다른 보수신문의 ‘채동욱 아버지 전 상서’라는 창작 소설로 절정에 달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어리석은 음모와 일탈, 공명심, 허영심, 멸시, 추잡한 행위를 아주 정교하게 조작하여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끌고, 그를 즐겁게 하고 타락시키느라 공인으로서의 페르소나를 휴지조각처럼 내던진 국정원 간부는 유유히 휘파람을 불고 있다. 위선의 껍질들은 미디어의 조명 속에 휘황찬란하게 그럴듯한 빛을 밝힌다. 위선자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은 탓에 그의 정체를 드러낸다고 한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위선자는 또한 가장한 배역인 체 하면서도 사회 공동체에 참여할 때에는 어떠한 연기행위도 하지 않는다. 가증스러운 것은 그런 위선자가 진실성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위선자는 정치 무대의 모든 가면을 마음대로 취할 수 있으며 모든 극중 인물의 역할을 맡을 수 있으나 가면을 진리의 공명판과 사회행동 규범이 아닌 새로운 기만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위선자가 가진 위험성은 우리 사회의 행동규범이나 역할을 무너뜨리고, 우리 모두를 이성과 판단력이 마비된 심적 노예의 상태로 내몰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잠시 혼미해진 사이에, 위선자들은 기고만장하여 또 다른 ‘악덕’을 지속해간다. 부패로 가는 지름길이다.

<르 디플로>는 창간 5주년을 맞아 우리가 지켜야 할 페르소나와 위선자들의 악덕을 가리는 데 가일층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한다. 10월. 귀뚜라미 소리를 들어야 할 낭만의 가을이지만, 유난히 피에 굶주린 모기떼들이 극성을 부린다.

(1) 한나 아렌트, <혁명론>(홍원표 옮김,1962:2004, 한길사)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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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일권 sungilkwon@naver.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