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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인문학,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나
거리의 인문학,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나
  • 최준영
  • 승인 2013.10.14 14: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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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1) 2006년 가을, TV 프로그램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한 노숙인 이 씨가 자신의 거처인 쪽방에서 책 한 권을 들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책을 모르고 살던 지난 세월이 후회됩니다. 책이 저를 살렸습니다.” 이 씨는 최초의 노숙인 인문학 강좌인 성프란시스 대학의 1기 수료생이다. 2005년 9월 문을 연 성프란시스 대학은 이듬해 입학생 22명 중 13명의 수료생을 배출했고, 그중 11명이 일자리를 얻어 자활의 길을 걷게 되었다. TV에 나온 이 씨는 1기 수료생 중 한 명이다.

사례2) 2007년 봄, 일군의 중년 남성들이 강원도 홍천 강변의 펜션에 모였다. 성프란시스 대학의 졸업생과 수강생이 함께 한 MT 자리였다. 깊은 밤 누군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시작했다. “16년 만에 아내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 같이 무뚝뚝하고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온 건 인문학 덕분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인문학은 그런 것입니다.” 노숙인 인문학 강좌에서 길어 올린 다양한 일화들이다.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이밖에도 노숙인 인문학의 성과를 보여주는 예는 차고 넘친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하나 같이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들이다. 어느덧 ‘거리로 나선 인문학’(이하 ‘거리의 인문학’)은 답답하고 갈증 나는 현실사회에 훈훈한 미담을 제공해주는 옹달샘이 된 듯하다. 실제 성과를 내기도 했고 다채로운 감동스토리도 생산하고 있다.

덕분에 거리의 인문학은 날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노숙인으로 시작해, 자활참여자, 재소자, 여성가장, 어르신, 탈학교 청소년, 미혼모 등 소외계층 전반을 아우르는 한편, 기업체 CEO, 임직원, 주부, 공직자 등 사회전역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바야흐로 ‘인문학 열풍'이라 할 만하다. 어느새 10년째다. 2005년 9월에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을 표방한 성프란시스 대학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여러 곳의 지역자활센터에서 인문학 강좌가 개설됐다. 2007년에는 교도소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 강좌가 시작됐다. 사회적 관심과 지원도 잇따랐다. 성프란시스 대학은 기업의 후원으로 설립됐고 이후 개설되는 인문학 강좌에는 공공기관의 지원이 줄을 이었다. 한국연구재단이 시민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서울시를 비롯한 각급 지자체와 대학에서도 인문학 프로그램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특히, 경희대학교는 지역주민과 노숙인 인문학을 위한 별도의 기구인 실천인문학센터를 꾸리기도 했다.

거리 인문학의 최대 수혜자는 인문학자?

필자는 초창기 성프란시스 대학에 참여한 이래 경희대 실천인문학센터로 자리를 옮겨 줄곧 인문학 강좌에 참여해 왔다. 덕분에 각급 인문학 강좌들의 운영상황과 특성, 현실적인 문제들을 비교적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거리의 인문학의 현실과 전망에 대한 비판적 의견 개진이 가능한 조건을 나름 갖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리의 인문학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에 나설 입장은 아니다. 아직은 학계에서도 거리의 인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이 글은 다분히 개인적 감상에 근거한 것임을 미리 밝힌다.

먼저 묻지 않을 수 없다. 거리의 인문학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를. 시작할 때 물었어야 할 것이지만 그땐 그러지 못했다. 다들 뭔가에 홀린 듯,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데에만 정신을 빼앗겼던 것이다. 10년째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그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물론 만시지탄의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이제라도 질문을 던지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이를테면 비판적 성찰을 통해 새로운 모색에 나서기 위함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거리의 인문학은 거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적 성찰을 통한 자활과 자립의 의지를 북돋우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은 앞서 소개한 일화들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내고 있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좀 더 내밀하게 들여다보면 전혀 엉뚱한 현상들도 발견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진술을 접하게 되는 것이다. “거리의 인문학의 최대 수혜자는 인문학 그 자신이거나 강의에 참여한 인문학자들”이라는…. 대체 무슨 말인가. 문학평론가 오창은의 <절망의 인문학>(이매진 간, 2013)의 한 구절을 옮겨 보자.

시장주의 상품으로 전락한 인문학

“한 연극평론가는 실천 인문학을 향해 의외로 매섭게 질책했다. 미술, 문학, 문화, 연극평론가가 함께 모여 행동주의 미학을 토론하는 자리였다.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강의가 활발히 전개돼 인상적이지만 그 진상은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노숙인이나 교도소 재소자가 인문학 수업을 통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에 감동을 받은 사람은 노숙인과 재소자가 아니에요. 그 강의에 나선 인문학자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 감동에 겨워하는 것 아닌가요?” ‘강의에 나선 인문학자들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스스로 감동에 겨워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듯한 기분이다. 철학 없는 실천이 빚어낸 우화라고나 할까. 국외자의 시선이 그러할진대 막상 강의에 나섰던 필자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좀 얄궂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언컨대 ‘거리의 인문학(오창은은 ‘실천인문학’이라 불렀던)’의 최대 수혜자는 거리의 사람들이 아니라 인문학 그 자신, 그리고 강의에 나선 강사들이었다. 

최초 노숙인 강의가 그 나름 사회적 화제가 된 뒤 곳곳에서 다양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들이 개설됐다. 앞서 살펴봤듯이 기업과 한국연구재단, 지자체가 나서는가 하면, 대학들도 연거푸 인문학 강좌 개설에 발 벗고 나섰다. 그 결과 인문학 강좌 수가 전국적으로 1백여 개를 넘어설 만큼 활성화됐고, 그것은 곧 대학 내에서 불안한 신분에 처해 있던 일군의 인문학자들에게 강의 기회를 제공해 주는 효과를 낳았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의 비정규교원들이었다. 간혹 정규교원 즉, 전임교수들이 나서기도 했지만 그들은 곧 꽁무니를 빼고 말았다. 실제로 2009년 ‘서울형 시민 인문학 강좌’에 참여했던 한국외국어대학교의 경우 인문대학 내의 전임교수 위주로 강의계획을 꾸려 의욕적으로 거리의 인문학에 참여했으나 이듬해 스스로 사업 참여를 포기하고 말았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전임교수들에게 거리의 인문학은 ‘얼핏 의미는 있어 보이지만 솔직히 귀찮고 골치 아픈 부가적인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반면 비정규교원들에게 거리의 인문학은 실로 기회의 바다였다. 크게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우선 대학 강의보다 높은 강사비를 받는 강의였다. 둘째, 사회적 이미지를 제고할 기회, 즉 상징자본을 축적할 기회였다. 셋째, 드문 경우이긴 했지만 만년 비정규교원에서 전격 전임교수로 계층상승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쯤에서 거리의 인문학이 최소한 어떤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의미 있고 보람차며 삶의 활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는 결론을 내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실로 강의에 참여한 인문학자들이 감동에 겨워할 만한 일이었던 셈이다.

거리의 인문학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다. 기본적으로 강의에 참여하는 다양한 계층의 수강생들의 기대심리가 높은 데다 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근원적인 동경과 존중의 심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덕분이다. 아울러 거리의 인문학이 표방하는 순기능과 순수성에 대한 동의와 응원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 반면 해를 거듭할수록 거리의 인문학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다. 여러 지점에서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곤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앞서 필자가 제기한 전도된 현실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비판도 있다. 귀담아 들을 만한 것이어서 간과하기 힘들다. 이를테면 어느덧 인문학조차 시장주의의 상품으로 전락돼 버렸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수유너머’의 연구원들이 펴낸 <불온한 인문학>(휴머니스트 간, 2011년)은 그러한 비판의 시발점이었다.  자신들이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인문학 열풍이 불러온 왜곡과 변질에 대한 경계를 모토로 하고 있다.

<불온한 인문학>은 작금의 “‘지금의 인문학(인문학 열풍)’은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가 하면 외려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봐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라고 꼬집는다. 아울러 책은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버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거리의 인문학은 어쩌면 오창은의 주장대로 ‘철학 없는 실천이 빚어낸 우리 시대의 슬픈 초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비판의 주된 목적은 발전적 해체를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거리의 인문학은 다양한 비판의 도마 위에서 스스로 몸부림쳐 벗어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철학 없는 실천이 문제를 야기했지만 실은 그 이전의 고민들에 대해 새삼 되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실천 없는 철학’이 빚어낸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말이다.

글·최준영
200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로는 <어제 쓴 글이 부끄러워 오늘도 쓴다>, <결핍을 즐겨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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