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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끌벅적한 아고라를 기대하며
시끌벅적한 아고라를 기대하며
  • 임상훈 편집장
  • 승인 2014.01.08 09:5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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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몇 해 안 남긴 1996년,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싸고 학계의 논란이 벌어졌다.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소컬이 <Social text>라는 한 인문학 학술지에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글을 기고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2주 후, 소컬은 당시 (프랑스)인문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 또 하나의 글을 발표한다. 자신이 앞서 발표한 논문은 자신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한마디로 여러 과학용어들의 의미 없는 ‘짜깁기’였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조롱하기 위해 작정하고 쓴 ‘악동짓’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촉발된 이른바 ‘엄밀과학’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논쟁의 불길은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의 지면으로 옮겨 붙어 한동안 프랑스 학계와 지성인 사회를 뜨겁게 달궜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6년, 한국에서는 유목주의(노마디즘)를 둘러싼 또 하나의 논쟁이 벌어진다.

‘농부철학자’ 천규석이 발표한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라는 책에 대해 철학자 이정우 교수가 유목주의 개념에 대한 몰이해의 극치에서 나온 천박하고 성급한 덧칠하기라고 비판을 하면서 시작된 논쟁이었다. 이후 철학자 홍윤기 교수가 반박에 나서고 그에 대한 재반박이 <교수신문>을 통해 이어지면서 당시 학계를 뜨겁게 달궜던 사건이다. 앞서 포스트모던 논쟁은 과학의 전문적 용어를 인문학에서 남발한다고 생각한 한 과학자의 반발이 그 시발이었다면, 노마드 논쟁은 역시 철학적 전문용어가 타락해가는 현실에 대한 한 철학자의 한탄에서 비롯된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어느 쪽이 더 타당한가를 떠나서 무지의 침묵하는 다수와 현학적 패거리 학술문화에 젖어 있는 소수의 학자들을 모두 잠에서 깨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난해 9월 한국을 방문한 ‘스타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한국사회에 던지고 싶은 말이 본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0월, 11월호 두 달에 걸쳐 게재됐다. 그러자 이에 대해 정신분석학자 홍준기 박사가 역시 본지 12월호에 반론의 글을 기고하면서 논쟁에 불을 붙였다. 홍준기 박사는 ‘라캉주의자’, ‘가장 위험한 철학자’ 지젝의 공산주의 이념은 사민주의에 대한 부당한 거부감에서 온 고집이며, 그는 라캉주의자도 아닐 뿐 아니라 내용 없는 기호들만의 짜집기인 공산주의 이념을 말한다는 점에서 위험하지도 않고 공허할 뿐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지젝은 사상의 편의점이라는 것이 홍준기 박사의 주장이다. 그러자 여기에 대해 이택광 교수가 본지 1월호에 재반론을 기고해 왔다. 홍준기 박사의 비판은 ‘논증과 이론적 분석이 있어야 할 자리에 도덕적 판단만 들어서 있는, 기본에 충실하지 않은 게으른 추정’이라는 것이 이택광 교수의 지적이다. 치밀한 분석이 아니라 선언적 판단이라는 것이 그 핵심이다.

날카로운 눈으로 학자들간의 논쟁을 읽는 많은 독자들이 벌써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어 이번 호의 이택광 교수의 재반론에 대한 반응들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철학자 지젝이 불씨를 제공한 이후, 본격적인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대한 방법론적 고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르 디플로>는 이 논쟁이 우리 지성계에 또 한 번의 충격효과를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찬양 또는 비판은 과연 한국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인가? 이론적 공산주의와 역사적 공산주의는 같은 것인가? 사민주의는 현실 가능한 진보의 모습인가, 좌파의 가면을 쓴 사기인가? 어쩌면 공산주의-사민주의 논쟁은 신자유주의의 폐해를 고민하는 지성계의 고고학적 논쟁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未來)’라는 구상의 원석을 찾아 나서는 탐험적 논쟁일지도 모른다.

입 다물고 표 대결로 말하면 된다는 것이 진정한 참여민주주의가 아니라면 이러한 논쟁은 그야말로 모처럼 만난 가뭄에 단비 같은 청량제다. 같은 맥락일 것이다. <르 디플로> 1월호 기획특집 ‘대학이여 안녕’은 신자유주의 교육의 전진기지로 전락해버린 한국 대학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자리가 될 것을 기대해본다. 대학의 본래 취지였던 자치적 공동체는 이미 버린 지 오래, 기업들의 주문생산을 충실히 이행하는 인력하청업체로 전락한 것이 현재 대학의 모습이다. 새로운 주체성 교육을 기대하는 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대학일까? 독자분들에게 함께 고민해볼 것을 제안 드려본다. 

 

'지성의 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Lemonde Diplo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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