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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판적 담론이 '지젝' 환상 키워
무비판적 담론이 '지젝' 환상 키워
  • 홍준기
  • 승인 2014.06.0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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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로키움 전문

 본지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 속에 지난달 17일 경희사이버대 부설 파이데이아 홍릉과 공동으로 ‘지젝의 사유방식과 정치성’이라는 주제로 콜로키움을 개최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 홍준기 박사(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연구소 소장)가 <지젝 이론의 원천과 그 수용의 문제점: 라캉 정신분석, 기독교, 정치를 중심으로>를, 최진석 박사(수유너머 N 대표)가 <지젝과 공산주의 정치학의 (불)가능성: 실재의 윤리와 현실의 정치학>을 각각 발표했다.
 
이어 토론에는 남인숙 홍익대 강사, 고봉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발표자들과 열띤 논쟁을 벌였으며, 일부 독자들도 토론 시간에 직접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고 질문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날 콜로키움은 휴일임에도 많은 독자들이 참석했으며, 열린 공간의 진지한 학술적 열기를 반영하듯 진행 시간도 당초 예정했던 2시간을 훨씬 초과하여 5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본지는 이날 참석하지 못한 독자 여러분들을 위해 발표자 두 분의 요약된 원고를 4페이지에 걸쳐 지상중계한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관념 철학, 마르크스의 사유 전통에 기반한 슬라보예 지젝의 저서는 한국 지식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특히 본지를 통해 학술적인 논박이 연재되면서 독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은 바 있다.<편집자>
 
무비판적 담론이 '지젝' 환상 키워
 
필자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의 지난해 12월호와 올해 2월호에서 지젝 공산주의 이론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6월호에서는 지젝이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학문적 원천(라캉 정신분석, 기독교, 헤겔 철학)을 공산주의로 환원시키는지 조금 더 상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어서 논의를 확대해 들뢰즈-네그리류의 신좌파 공산주의(혹은 코뮨주의), 그리고 요즘 많이 논의되고 있는 ‘기본소득론’의 문제점이 문제점이 무엇인지 비판하고자 한다. 필자의 논지의 핵심은 지젝과 마찬가지로 다른 신좌파공산주의자 혹은 기본소득론자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신자유주의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지젝 이론에 대해 언급해보자.

  지젝 이론의 3가지 원천은 공산주의로 환원되는 라캉 정신분석, 기독교, 독일관념론

우선 지젝이 라캉의 행위(acte) 개념을 어떻게 해석하는 지 살펴보자. 라캉이 말하는 행위(acte)는 소외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정신분석적 행위를 의미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너머’에 도달하는 것 혹은 ‘병리적 상태를 벗어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개념이다. 지젝은 라캉이 말하는 중요한 이 개념을 정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지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결단은 순전히 형식적인 것으로서, 결단하기로 결단하는 것이며, (…)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 애착에 근거하는 원시적인 '병리적' 선택을 뜻한다(특정인과 사랑에 빠진 후 그가 내게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할 때 처럼)."

 

여기에서 우리는 우선 ‘순전히 형식적인 것으로서의 결단’ 등등이라는 식으로 제시된, 지젝의 라캉의 행위 개념에 대한 설명은 물론 설득력이 매우 적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소외상태를 벗어나는 중차대한 행위를 하는데, 순전히 결단을 위한 결단이라는 형식적 행위를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라캉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젝의 설명에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젝의 이러한 설명은 이미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다음의 지젝의 설명이다.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무조건적 애착에 근거하는 원시적인 '병리적' 선택을 뜻한다(특정인과 사랑에 빠진 후 그가 내게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할 때처럼).”

신비주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히려 ‘병리적’ 행위를 해야한다는 식의 ‘그럴듯해 보이는 논리’를 전개하지만, 실제로 지젝은 여기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혹은 비혁명)’을 위해 라캉의 행위 개념을 ‘상상화’하고 있을 뿐이다. 요컨대, 오직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서만, 그런 경우에만 ‘병리적’ 행위(예컨대 전체주의적 폭력)는 허용된다는 것이다. 또한 상세히 논의할 여유는 없지만 지젝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바디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적 혁명과 동의어이다.

 지젝과 헤겔의 빗나간 만남

 그렇다면 헤겔은 어떠한가. 초기에 지젝은 자유주의적으로 라캉과 헤겔을 패배주의적인 자유주의자로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고,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하여 지젝은 아주 빠른 속도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선회하며, 라캉의 행위 개념을 공산주의적 혁명(혹은 비혁명)과 등치시켰다. 그리고 헤겔 철학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관점에서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지젝은 헤겔을 다시 ‘진보적 관점’에서 해석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는 국가의 문제와 관련시켜 논의해 보자. 지젝은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헤겔 해석, 즉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혹은 (역시 다분히 자유주의적인) 인정 이론에 근거한 헤겔 해석(하버마스, 호네트)을 다시금 비판하고, 마르크스-레닌에 의해 시도되었던 공산주의적 헤겔 해석을 다시 시도하는 것이라고 위치지울 수 있다. 이를 위해 지젝은 바디우를 따라 라캉을 ‘밀수입해’, 라캉이 말하는 실재, 즉 상징계에 의해 배제된 실재와의 대면을 공산주의의 도래로 직접적으로 ‘번역’한다. 이중의 논리적 비약을 감행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헤겔은 자코뱅의 공포정치는 국가와 개인의 직접적 일치, 즉 보편성과 특수성의 무매개적 일치를 추구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헤겔은 보편과 특수의 직접적 일치는 보편(국가)에 의한 특수(개인)의 자유의 억압으로 이어지므로 개인의 자유를 지켜 줄 중간 집단(Korporation)들의 체계, 즉 시민사회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하지만 헤겔은 동시에 시민사회에서 발생하는 빈부의 격차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보편적 기구로서의 국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반면 지젝은 헤겔 정치철학의 기본 구조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오히려 헤겔로부터 헤겔이 반대하는 ‘로베스피에르적 공포정치의 필요성’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지젝의 헤겔 해석에서는 개인이 우선인지, 전체가 우선인지 조차도 모호해진다. 지젝에 따르면 특수자(공산주의자)는 보편성(공산주의로 대변되는 전체 혹은 인류)을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개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전체를 위한 것인가?

이러한 지젝의 헤겔 독해는 물론 폭력 옹호론으로 이어진다. 지젝의 폭력 옹호론은 메를로-퐁티가 <휴머니즘과 테러>에서 주장한 (그러나 소련의 남침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사르트르가 찬양한 이후 포기한) ‘진보적 폭력 옹호론’의 21세기 판본에 다름 아니다. 한때 메를로-퐁티가 스탈린주의적 폭력을 진보적 폭력을 찬양했듯이 지젝도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열렬히 옹호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것을 위하여(또는 공포들의 특수한 형태를 위하여) 자행된 공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공산주의는 본래적으로 진리-사건(10월 혁명)에 관련되어 있는 반면에, 파시즘은 의사-사건, 진정성을 가장한 거짓말이었다고 주장한 바디우를 따라야 한다.”(<시차적 관점>, 562면).

필자는 여기에서 헤겔에 대한 (자유주의적이거나 공산주의적이 아닌), 사회민주주의적 독해가 가능하다고 본다. 자유주의적 헤겔 정치철학 독해는 주로 시민사회 혹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고자 한다. 반면, 지젝의 입장은 항상 그렇듯이 모호하지만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기반한 (공산주의)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지젝의 입장은 모호하므로 정반대의 견해를 읽어낼 수도 있다. 국가 그 자체를 거부하는 무정부주의적인 정치체제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면 여기에서 지젝의 입장은 들뢰즈-네그리 철학에 근접한다. 하지만 지젝 스스로 네그리의 <제국>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산주의적 전체주의의 입장이 지젝의 생각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헤겔 정치철학을 해석할 때 많은 논자들은 헤겔은 국가를 중시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헤겔을 보수주의자로 간주한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의 보편적 기능을 강조한다는 것만으로 어떤 이론을 무조건 보수적인 이론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물론 국가를 강조한다고 해서 모두 ‘건강한’ 진보는 아니다.

하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보적 역할을 하는 ‘뛰어난’ 사회민주주의적 국가가 없다면 과연 누가 신자유주의의 전횡으로부터 우리를 막아줄 것인가?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스스로를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공산주의자 혹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이 종종 협동조합 혹은 소액주주운동 등을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틀 속에 잘 포섭될 수 있는 이러한 운동을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시민사회 속에 존재하는 빈부격차의 문제를 간파하고 ‘보편적’ 역할을 해야 하는 국가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아직 ‘사민주의’가 존재하지 않던 당시 상황에서 헤겔은 적절한 정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헤겔의 이러한 바램은 북유럽과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실제로 실현되었다.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삶의 평등을 달성할 수 있었다.

반면,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기능의 축소에 근거한 체제이다. 국가 개입의 철폐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주리라는 공리주의의 환상이 가져온 폐해는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엄청난 비극적인 사건들을 통해 아주 극명하게 입증되었다. 실제로 헤겔 국가론에 대한 정치철학적 평가는 다양하다. 하지만 헤겔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중요한 것은 전통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회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민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을 중시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파행적 흐름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국가에 의한 자본의 통제와 이에 기반한 복지정책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이론에서 국가의 긍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사실상 유일한 이론은 사회민주주의 국가이론과 헤겔 철학 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신좌파 담론의 한계는 진보적 자유주의, 들뢰즈-네그리, 기본소득론

지젝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 영향력 있는 공산주의 이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공산주의자는 다양한 외양 혹은 개념으로 자신을 치장한다.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과거의 공산주의자, 즉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즉 구좌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지젝, 바디우, 들뢰즈, 네그리, 발리바르 등 프랑스 철학자를 등에 업고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도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이름을 바꾸어 무대에 다시 등장하면서 그것은 원조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좀더 ‘부드럽게 치장’하거가 몇 가지 교리를 수정하는 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들 변장된 공산주의는 더욱 모호해지고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차라리 솔직하게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주장하라는 비판이 생겨나는 이유이다.

어쨌든 중요한 점은 공산주의가 어떤 이름, 어떤 철학 사상으로 자신을 치장하든 내용 없고 공허한 공산주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진정한 진보는 불가능해지며 따라서 오히려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진보적 자유주의가 공산주의의 ‘대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진보적 자유주의는 우리나라에서 글자 그대로 자유주의자로부터 출발해 공산주의자까지 포함하는 매우 모호한 정치사상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자 중에서는 사민주의를 명시적으로 비판하는 논자도 있고, 또 반대로 자신을 사회민주주의로 지칭하고자 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진보적 자유주의와 반드시 충돌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예컨대 소액주주 운동 등을 주창하는 진보적 자유주의자가 이러한 실천을 사회민주주의적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악용 혹은 착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액주주운동은 결국 (신)자유주의 운동과 전혀 다름없지 않은가?(이에 대한 논의로는 정승일, 「자유주의 프레임에 갇힌 안철수」<르몽드 디플로마티크지 5월호> 참조)

이런저런 이유로 과거의 전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지지자였던 논자들이 지금은 지젝, 바디우, 그리고 들뢰즈, 네그리를 경유해 ‘레닌을 넘어선 레닌’을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철학 연구 경향을 보면 매우 특이한 점이 눈에 띤다. 그것은 들뢰즈, 네그리, 푸코를 인용하면 무조건 진보적이고 훌륭한 사람이며, 라캉, 프로이트를 인용하면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제 거의 관행처럼, 아니 하나의 공식적인 학문적 담론으로 되었다는 사실이다. 외국의 특정한 학자를 추종함으로써 오늘날 신좌파는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무능력을 은폐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의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던 사람들이 변장을 위해 다시 교주로 삼은 들뢰즈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네그리를 통해, 공산주의자로 ‘번역’되고 우리나라의 많은 신좌파들이 이를 따른다.

들뢰즈는 상징계를 거부하고 실재를 중시하는 철학자다. 상징계를 거부한다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규범, 법, 제도 등을 모두 철폐하고 제약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즉 실재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징계=자본주의라는 등식이 덧붙여지면, 상징계를 벗어난 실재는 (공산주의자들의 환상 속에서) 소외와 억압이 없는 공산주의와 동의어가 되고 만다.

하지만 <안티 오이디푸스> 등 들뢰즈의 주저를 읽어보면, 들뢰즈가 옹호하는 것은 정신분열증자이지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들뢰즈는 정신분열증자를 억압하는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도 동시에 공격한다.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들뢰즈가 ‘예찬하는’ 정신분열증환자는 네그리의 손에서 다중으로 ‘번역’된다. 네그리는 들뢰즈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개인(즉 다중)을 무제한적으로 예찬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다중들이 공산주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적인(공산주의적)  목적론을 제시한다. “생산수단의 재전유...그리고 지식, 정보, 소통, 정서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과 통제.”( <제국>, 513면)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네그리의 탈근대론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와 정보사회화의 허구적 논리를 충실하게, 즉 무비판적으로 따른다. 네그리에 따르면 전근대, 근대와 달리 포스트 모던 시대의 단일한 제국은 영토적 경계나 권력의 중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포스트 모던적 제국은 하나의 틀, 즉 국가에 포섭되지 않는, 그리고 물질적 노동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다중을 산출한다. 국가의 해체 경향 및 자본의 탈중심화, 자유로운 국제적 이동 및 노동의 유연성, 즉 정주하는 개인이 아니라 ‘유목민’이라는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정보 사회화 이데올로기와 네그리의 이론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것이 ‘공산주의적 목적론’이라는 요술을 통해 진보적인 이론으로 순식간에 변화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다.

 기본소득론의 허구성?

 네그리 이론에서 또한 흥미로운 점은 ‘사회민주주의’를 역시 반대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네그리가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이 무엇인지, 더 정확히 말하면 사실상 아무런 실천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네그리는 '지구화 시대‘에 가능한 세 가지 실천적 대안을 검토한다. a. 지구적 시민권, b. 사회적 시민권, c. 재전유권(=궁극 목적)(509). 물론 네그리가 지지하는 것은 세 번째의 것이다.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시즘으로 네그리가 제안하는 새로운 ‘코뮤니즘’은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다중)이 함께 엮어져, 즉 “집단적 주체성 속에서”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재전유”하자는 것으로 요약된다. “재전유권이란 무엇보다도 생산수단을 재전유하는 권리이다.”(513). 물론 이러한 기획은 환상 속에만 가능해 공허하고 무의미이다. 이 점에서 네그리 이론은 지젝 이론만큼 이나 허구적이다.

여기에서 네그리가 말하는 두 번째 대안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인데, 네그리는 이를 “모두에게 사회적 임금과 보장된 수입”, “동일임금, 동일노동”이라는 것으로 요약하고 이를 거부한다. 실제로 네그리의 대안은 기본소득론과 무관하거나 그것에 반대하는데 우리나라의 네그리주의자들은 기본소득론과 네그리주의를 결합시킨다. 기본소득론과 네그리가 결합될 수 있는 지점은 네그리가 즉각적인 국가의 폐지, 자본의 폐지를 주장하는 아나키즘-코뮨주의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은 이러한 이유에서 네그리를 환영하며 동시에 기본소득론을 환영한다.

어떤 경우든 기본소득론은 정통 공산주의 혁명을 대체하는 새로운 전략으로서 여전히 허구적이다. 외양만 바꾸어 다시 무대에 등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에서 기본소득론의 문제는 무엇인가? 우선, 무상의료나 교육 등 전통적인 사민주의 정책은 커녕 신자유주의적 국가 수준의 복지도 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나라는 이미 빈부격차가 벌어질 대로 벌어져 있다. 그리고 교육, 의료, 주택 등 기본적인 삶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시스템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본소득이 시행되면, 아마도 신자유주의자들이 무척 즐거워할 것이다. 자본가들은 소비를 조장해서 결국 그 돈을 다시 자신의 수중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자유주의자들 중에서도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원조인 밀턴 프리드먼이다. 신좌파와 (신)자유주의자의 결합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

기본소득론은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 체계가 갖추어지고 난 후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신자유주의 시스템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관철되어봐야 여전히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 국가로 남을 것이다.

네그리나 기본소득론자들의 말대로 국가의 개입과 비용을 최소화하면, 예컨대 신좌파들이 좋아하는 ‘자율적인 협동조합’들 간의 경쟁, 즉 ‘공산주의자들간의 무한한 경쟁’과 또 그로 인해 생겨나는 빈부 격차는 어떻게 해결할 것이며, 실업 문제, 그리고 생산설비 투자 등 경제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개입은 과연 누가할 것인가? 현 단계에서 기본소득을 전국민에게 나눠준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소득론적 신자유주의’의 파행을 막기 위해서 우리는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의 국가의 역할에 관한 ‘선입관’을 버리고 이를 긍정하며, 우선적으로 그러한 국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국가가 부패했다고 해서 신자유주의적 자유관을 옹호할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냉엄하게 고치고 개혁하며 감독해,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깨끗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다.

또한 기본소득론은 ‘지속 가능성’의 측면에서 볼 때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본소득론자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될 수 있기 위해서는’ 사실상 혁명을 통해 자본 전체가 사실상 국유화되어야 한다. 차라리 여전히 혁명을 주장하는 정통 맑스-레닌주의자 혹은 그 변종이 더 정직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학술대회에서 기본소득론에 대해 발표한 곽노완이 기본소득을 위한 재원 마련으로 “주식 유상 몰수”를 제시한 적이 있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국유화 혹은 몰수 이후에 그 나라가 제대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기본소득을 청년층까지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동과 노인, 극빈층을 중심으로 먼저 시행하자는 기본소득론의 논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계층을 위한 복지적 개입은 전통적인 사민주의 국가에서 이미 실행되고 있는 정책이다. 이미 시행되고 있는 사민주의 정책을 말을 바꾸어 기본소득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초점을 다시금 흐리는 역할을 한다.

복지사각지대를 없애기 위해서 기본소득을 시행해야 한다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사각지대가 존재하지 않도록 담당자들이 ‘진정성 있게’ 노력하고 철저하고 정의로운 규정을 만들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기본소득만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나라 같은 신자유주의적 복지 체계에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기본소득론자는 이러한 방식으로 사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복지체계차이를 다시 한 번 무화시키고자 한다.

기본소득론자는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는 행정비용이 많이 든다고 항상 비판한다. 예컨대 복지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드는 비용(복지 공무원 임금)을 절감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스웨덴처럼 복지와 서비스 분야의 고용 창출도 진보적인 국가가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러므로 ‘행정비용 절감’ 혹은 ‘효율성’을 근거로 기본소득론의 우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매우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비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기본소득론자들은 종종 ‘게으를 권리’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의 생각을 기본소득론의 근거로 제시하는데, 이는 하루 종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신화’를 이야기하는 「고타강령비판」에서의 마르크스 만큼이나 공상적이다.

기본소득론자들은 보편적 복지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의제를 ‘왜곡 혹은 악용’하고 있다. 보편적 복지란 모두에게 기계적 평등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데 기본소득론자는 이러한 사민주의적 복지정책을 ‘선별적 복지정책’이라고 비판한다. 그럼으로써 사민주의와 자유주의의 차이를 없애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마치 공산주의만이 보편적 복지를 하는 것인 양 주장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우리나라 상황에서 적용될 때 기본소득론은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 기계적 평등, 혹은 ‘절대적 자유의 환상’, 혹은 ‘현금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허구적 이론이다. 사회민주주의적 보편적 복지는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선별적(시혜적) 복지와는 철저히 구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 평등주의에 근거하지도 않는다.

우리나라의 신좌파는 지젝, 들뢰즈-네그리, 혹은 그 누구를 추종하든 상관없이 허구적인 환상을 불러일으키며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아무런 대안도 아닌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의 인문학―그리고 사회과학―의 과제는 외국 이론에 대한 무비판적인 사대주의적 추종과 공산주의라는 환상으로부터 벗어나 창의적이며 현실적인 인문학(그리고 사회과학)을 개척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글·홍준기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라캉과 현대 철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 <라캉과 현대철학> 등이 있다. 역서로는 <라캉과 정신분석 임상: 구조와 도착증>, <강박증: 의무의 감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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