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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정치여, 대중에게 커밍아웃하라
문화·예술·정치여, 대중에게 커밍아웃하라
  • 원용진|서강대 교수·신문방송학
  • 승인 2009.09.03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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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정책 문민화 프로젝트 10년, 정권 바뀌며 관치화로 퇴행
순수예술 자처 ‘예술정치인’과 대중 상대로 ‘문화 대결’ 벌여야

문화정책이 가장 유효할 시기는 삶이 극도로 어려울 때다. 유물론적 태도에 서지 않더라도 척박한 삶에서 문화적 행위가 잘 펼쳐지지 않음은 누구나 안다. 그래서 일상적 삶이 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 문화정책은 애로를 겪게 된다. 대중의 상상력 탓이다. 대중의 상상력이 날개를 펼 생활수준에 이르면 문화 예산은 더 파이가 커지겠지만 상상력을 따라가느라 허덕이게 된다는 말이다. 여러 선진사회가 문화정책을 펴는 대신 민간에 맡겨두는 것도 그 때문이다. 상상력이 넓고 깊게 펼쳐진다고 여긴 사회에서는 그를 인내하며 자율로 안내한다. 21세기 뉴 밀레니엄으로 들어서면서 한국에서도 그런 문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코드 프레이밍의 추억

‘팔 길이 원칙’은 문화정책에서 자주 인용되는 용어다. 국가는 팔 닿는 데까지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정책 원칙이다. 지금은 그 말이 공무원의 문서상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지난 10여 년간 문화정책 기조에서 단골로 인용되곤 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정부는 문화정책에서 민간 위주로 위원회를 만들고, 민간 전문가들이 합의해 행정을 펼치도록 했다. 문화부는 큰 그림을 그리고, 예산을 책정하고, 지원하는 수준에서 그 임무를 마무리하는 정책 풍경을 만들었다. 공무원에서 민간 전문가들로 문화정책과 행정이 옮겨오면서 전문가 풀, 관련 단체들이 늘어났고 두터워졌다. 이른바 문화정책에서의 문민화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지칭되는 ‘문민화 프로젝트’가 모든 문화예술인들의 박수 속에서 이뤄지진 않았다. 출발점에서 발을 떼는 순간부터 코드 논쟁을 등에 업고 다녀야 했다. 이는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가 일부 문화예술계만 편애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편애에 포함되지 못한 집단에서 만들어 널리 펼친 담론 프레임이었다. 코드 논쟁의 프레임에 갇히면서 문화예술계는 불가피하게 어떤 때보다 더더욱 정치 집단화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프레이밍(framing)이란 묘한 것이어서 그것을 피하려 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통해서 말해야 하는 마력을 갖는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 빠져드는 프레이밍 게임 탓에 서로를 정치꾼으로 바라보는 반목은 깊어졌다.

프레이밍 게임에 갇혔지만 실제로는 문민화로 인한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장르 범주를 뛰어넘는 작업이라든지, 새로운 장르 우대, 문화예술 공공성 확대, 문화예술 주변부에 대한 관심 등이 그 성과다. 그 성과를 “문예론적 관점으로부터의 탈주”라고 총괄할 수도 있다. 문화를 예술로 국한하고, 미적 부분을 추구해가는 전통적 문예론을 넘어서 문화를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이 공평하게 펼쳐지도록 하고, 새로운 현상들에 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이었다.

넘어서는 일, 새롭게 하는 일, 공평하게 하는 일, 탄생하게 하는 일 등으로 민간 주도의 문화정책이 자리잡으면서 행정 관료, 전통적 문예론자들은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전통적 문예론적 관점으로 펴는 문화예술 행위들이 소외받는다는 생각도 갖기 시작했다. 문민화로 인한 성과는 동시에 소외를 겪는 집단을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이념’과 ‘코드’라는 프레임을 생산하는 데까지 이른다.

색칠과 효율성의 시절

소외 속에서 고통받았다 생각하던 쪽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시작되자 곧바로 코드라는 프레임은 접고 이념 프레임을 강화했다. 이른바 ‘좌파 적출’이라는 정치 프레임을 앞세워 자신들의 소외를 만회하려 했다. 그동안 ‘얼치기 좌파’들이 문화예술 분야 곳곳에 침투해 문화예술을 황폐화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이념 전쟁터로 만들었다는 것이 소외당했다고 주장하는 쪽의 프레임이었다. 물론 이때부터 코드라는 프레임은 사라지고 ‘색깔’ 프레임이 자리를 굳건하게 틀게 되었다. 공공성, 공평성, 주변부에 대한 배려 등도 모두 그런 쪽으로 해석됐다. 색깔 프레임은 용광로와도 같아 비민주적 절차에 의한 기관장 해임도 용인될 정도로 강력하고 뜨거웠다.

색깔 프레임을 만든 쪽은 자신들의 창안물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프레이밍의 주체는 그 바깥일 가능성이 크다. 문민화로 인해 또 다른 소외를 느끼던 행정 관료들이 만든 프레임이 소외받았다 생각하던 문화예술인들의 입을 통해 펼쳐졌다는 말이다. 문화정책을 국가 홍보 수단으로 사고하고 문민화를 다시 거둬들일 준비를 하던 쪽에서는 문화예술인들의 입을 빌려 복화술을 폈다. 문화예술 정책이 다시 관료 중심으로 되돌아갔지만 불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런 해석은 크게 틀리지 않다. 문화부서에 새만금, 4대강 정비사업 관련 부서가 생겨도 의아해하지 않는 모습에서도 문화행정 관료제의 복귀가 분명함을 읽을 수 있다.

지난 10여 년에 걸쳐 일어난 문화예술계 전문가들의 문화정책 참여를 둘러싼 논쟁을 ‘밥그릇 싸움’으로 마무리함을 나무랄 수 없다. 단순화하고 있긴 하지만 소박하고 강단 있고 설득력 있는 지적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마무리는 양비론에 빠져 어떤 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허무론으로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색깔 프레임을 폈던 쪽은 관료에 맞는 언행으로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고 마무리한 다음 얻을 수 있는 교훈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이미 그들은 색깔 프레임을 접고 ‘효율성’ 프레임으로 옮겨갔다. 최근 영화진흥위원회의 위원장이 경영 평가를 이유로 사직했음을 기억해보면 더욱 그렇다.

효율성 프레임의 주체는 분명 행정관료다. 어렵게 터를 닦았던 문민화가 관치로 다시 탈바꿈했다는 말이다. 그 장단에 색깔 프레임으로 문화예술인이 춤을 추었을 뿐이고. 문화예술인이 문화행정에서 주역이 되는 일은 당분간은 어렵게 되었다. 시민사회가 국가에 의해 휘둘리게 된 것은 문화예술계뿐만은 아니다. 시민사회의 주요 축이던 미디어판도 그렇게 되고 말았다. 국가가 마련해놓은 효율성 틀에 어긋나거나 국가가 판단하기에 효율성이 없다고 여겨지면 모든 것이 해체될 수밖에 없는 순간을 맞게 되었다.

새로운 경쟁을 향해

▲ 문화체육관광부가 ‘4대강 살리기’를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대한늬우스’
관치화된 문화행정이 대중의 상상력과 마주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과거의 관치 문화행정과 지금의 관치 문화행정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미 상상력을 어느 정도 펴보던 경험을 해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문화예술 행정을 문민화로 혹은 상상력을 펴는 것으로 바꿔놓으려면 새로운 대안적 프레임이 필요하다. 코드를 맞춰갔거나 이념을 좇아갔다고 말하는 대신 새로운 효율성 범주를 만들어 평가하고, 더 많은 민주적 절차가 필요함을 강조할 때다. 직접 문화행정에 대놓고 말하는 방식도 있고, 문화행정 바깥에서 벌이는 문화예술적 퍼포먼스로도 가능할 수 있다.

지금까지 문화예술 행정을 둘러싼 경쟁이 문화예술 전문인 대 문화관료로 이뤄졌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대중을 향할 때가 아닌가 싶다. 관치를 벗어난 문민화를 외치던 때나, 문민화를 뭉개고 다시 관치화로 돌아가는 지금이나 경쟁 주체는 그 두 그룹이었다. 물론 그들이 상정한 최종 대상이 대중이었다고 말하기도 하겠지만 대중과의 직접적 만남으로 그런 경쟁을 설명하던 때는 없었다. 본격적인 문화 대결의 순간이 왔다고 말하면 너무 전투적일까.

누가 더 대중의 상상력을 도모하고, 그를 추동할 수 있을지를 둘러싸고 본격적인 경쟁을 벌일 때다. 어차피 보수화된 정치 과정에서 그나마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화정책에 직접 말 걸기도 하고, 그 바깥에서 대중에게도 말을 거는 이중적 전략을 펴는 순간을 맞고 있다. 만약 지금의 문화예술 행정이 불만이고, 관치화가 볼썽사나우면 영리해지고 부지런할 수밖에 없다. 문화예술이 국가로부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릴 혜택을 받았던가를 기억해보면 그 전략·전술 방향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글·원용진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저서로는 <대중 문화의 패러다임>(1996), <광고 문화 비평>(1997), <텔레비전 비평론>(2007), <아메리카나이제인션>(2008) 등이 있다. 블로그 ‘원용진의 미디어 이야기’(airzine.egloos.com)를 통해 활발한 대중문화 비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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