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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주의와 민주주의
대중주의와 민주주의
  • 이정우 철학자
  • 승인 2015.08.31 17: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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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철학 에세이
   
▲ <너의 눈이 먼 모습>, 2002 - 바산 시티켓

외국에서 장기간 체류하던 중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고 한다. 예컨대 일본의 TV 드라마들은 한국의 그것들보다 대개 밋밋하다. 극한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도 드물고, 스토리라인도 대개 일상적이고 상식적이다. 그러나 한국 TV 드라마는 많이 다르다. 50분 남짓한 사극 한 회분에 음모, 배신, 몰락 등이 끝없이 이어진다. 단 한 회의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끝도 없이 이어져 마치 사람의 감정을 그야말로 남김없이 짜내려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일본어 회화를 배웠던 학원의 선생(여성)도 한국 여성들이 “진짜로” 그렇게 있는 힘을 다해 악을 쓰는지 무척 궁금해 한 적이 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불륜 드라마, 미친 듯이 악을 쓰는 여배우들, 걸핏 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젊은이들,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는 “사극”들, 이런 TV 드라마들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장안의 화제가 된다. 그래서 인문학자들,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런 속류 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곤 한다. 현대의 ‘문화산업’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유명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비판, 저질문화의 비판이 사회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런 비판의 어려움은 아주 간단한 데에 있다. “대중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여기에서 이런 유의 비판은 말문이 막힌다.
이런 현상은 예컨대 영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위세가 워낙 강해 문제의식이 있는 작품들은 상영관을 잡지 못한다고 한다. 마블 영화사(마블코믹스라는 만화사의 만화를 영화로 만드는 제작사. <어벤져스>, <엑스맨> 등이 마블 원작이다-저자 주) 작품이 개봉되면 한 영화관이 그 영화로 도배가 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제작자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서 돈을 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여기에서도 비판가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대형 서점의 인문학 코너에, 특히 신간 코너에 가 보면 묘한 느낌이 든다. 잘 팔린다고 하는 책들의 제목이 아무리 봐도 인문학 서적의 제목이라기보다는 무슨 액션영화의 제목처럼 들린다. 책의 내부를 펼쳤을 때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성의 노력보다는 잔재주의 행진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반응은 똑같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책을 써야지 팔리지도 않을 책을 무엇 하러 쓴단 말인가?” 말문이 막힌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는 대중에게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대중이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한다면, 위와 같은 상황도 또 그에 대한 비판도 필요 없게 될 것이다.
 
대중 비판과 엘리트주의
 
그런데 이런 문제에 관련해 흥미로운 반응을 본 적이 있다. 대중의 이런 문제점에 대한 비판을 “엘리트주의”라고 비난하는 경우이다. 이 비난은 정당한 비난일까?
‘엘리트’라는 말은 한 사회의 권력(넓은 의미)을 차지하고 있는 계층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의 권력은 대부분 부로 환원 가능하기에, 엘리트라는 말은 결국 한 사회의 부와 권력을 점유하고 있는 계층을 가리킨다. 한국 사회에서는 특이하게 높은 학력을 가리킬 때 이 말을 자주 사용한다. 누군가가 외국에서 학위를 따 왔다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엘리트”라고 말한다. 하지만 외국 학위가 있다고 당장 엘리트 계층으로 들어서는 것은 아니다. 국내 박사학위를 가진 많은 사람들 중 상당수는 엘리트 계층은커녕 중산층에도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문화적 현실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이 “엘리트주의”인가?
저질 문화의 비판자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보면, 위와 같은 비난은 참으로 엉뚱한 것이라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비판자들은 대개 인문사회 계통의 지식층으로서, 이들은 지식층이긴 하지만 엘리트층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가난한 지식인들도 많다. 그래서 위와 같은 비난에서 드러나는 것은 경제적 층과 문화적 층의 혼동이다. 한 사회에서 경제적인 층들과 문화적인 층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문화적인 면에서 본다면, 하층민들은 대개 속류 문화를 향유하지만 상류층은 대개 속물 문화를 향유한다.
위와 같은 비난이 더욱 얄궂은 것은 이 비난하는 이가 옹호하고자 하는 속류 문화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곧 엘리트층이라는 사실이다. 현대 엘리트층의 일부는 과거와는 달리 바로 이런 ‘문화산업’―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 표현 자체가 참으로 낯설었는데 이제는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다 ―의 경영자들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비난하는 자가 엘리트층이 투자해서 만드는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엘리트주의”로 비난하는 기이한 아이러니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문화산업은 다름 아니라 엘리트주의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대중 비판과 반(反)민주주의
 
그런데 또한 위와 같은 반응보다 더 흥미로운 도발을 접한 적이 있다. 그것은 대중이 좋아하는 문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곧 반(反)민주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 앞의 비난이 문화적 맥락과 경제적 맥락이 기이하게 착종된 비난이라면, 이 비난은 이번에는 문화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이 기이하게 착종된 비난이라 하겠다.
이런 비난에는 다음과 같이 변형된 삼단논법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민주주의는 대중을 위한 정치이다. 대중은 대중문화(속류 문화)를 좋아한다. 따라서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자들은 반민주주의자들이다.” 문화적 맥락과 정치적 맥락이 착종된 이 기이한 논리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왜냐하면 속류 문화와 대중의 현실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는 자본주의 비판자들이고 민주주의 옹호자들이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의 문제점으로서 속류 문화를 비판하는 것이 어떻게 갑자기 반민주주의로 둔갑하는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대중주의’와 ‘민주주의’를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는 한 국가의 주권을 국민에게 두는 정치체제이다. 대중주의―잘 쓰이는 용어는 아니지만―는 모든 가치의 기준을 대중(다수)에게 두는 주의이다. 그런데 대중주의와 민주주의는 일치할까 일치하지 않을까?
대중주의라는 용어는 잘 쓰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이 말에는 어느새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와 대중주의가 혼합되어 버린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에서 정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와 거기에 섞여 있는 대중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민주주의란 군주제, 과두제와 더불어 세 가지 정체 중 하나였다. 군주제는 한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고, 과두제는 여러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고, 민주제는 모든 사람이 통치하는 것이다(정확히는 통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이며, 오늘날 민주주의의 확립은 인류의 역사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그러나 오늘날의 정체는 사실 세 정체가 합쳐진 것이다. 대통령제는 군주제의 유산이고, 의회는 과두제의 유산이고, 선거제도는 민주제의 유산이다) 이런 정확한 의미에서의 민주제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는 의심할 여지없이 크다.
그러나 다음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곧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는 대중주의와 섞여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대중주의는 정치적 맥락과는 구분되는 맥락 즉 근대성을 특징짓는 ‘등질화(homogenization)’의 맥락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등질화란 곧 모든 존재자들을 양/수로 환원시키는 것, 그리고 대개는 보다 더 큰 수에 가치를 두는 것을 뜻한다. 이 대중주의는 근세에 과학기술, 대중주의와 함께 세 쌍둥이로 태어난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은 모든 사물을 양화해서 법칙화하고자 하며, 자본주의는 모든 사물을 화폐의 양으로 환산해서 조작하고자 하며, 대중주의는 모든 가치를 대중의 머릿수에 두고자 한다. 이것은 곧 양/수 지상주의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에는 이 두 가지 갈래가 섞여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는 것이 중요하다. 순수 정치적 맥락에서 쟁취해 온 민주주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민주주의가 있는가 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대중의 머릿수로 판단하는 대중주의가 혼재한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분명 역사적으로 정당할지 몰라도, 후자는 무조건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양과 질이 일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 전자는 인류의 위대한 성취이지만, 후자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이 혼재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수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 다수가 항상 옳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속류 문화 비판을 반민주주의로 매도하는 것은 틀린 생각이지만 바로 그 틀림으로 인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생각이 옳지만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틀리지만 뭔가를 일깨워 줄 수도 있다. 위와 같은 매도는 우리에게 문화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모종의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즉, 정치와 문화를 잘못 연결시키고 있는 이 매도에서 우리는 오히려 그 올바른 연결, 정치적 민주주의와 문화적 대중주의를 혼동하면 안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대중주의의 착종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완성된 민주주의가 아니다. 다만 형식적으로 완성되었을 뿐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이란 무엇을 뜻할까? 민주주의란 주권을 국민에게 두는 정체이고, 그 현실적 표현은 선거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으로, 적어도 궤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정은 달라진다. 민주주의란 국민 개개인이 ‘주체’가 되는 제도이다. 그리고 이 주체란 곧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는 주체를 뜻한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국민들의 판단의 질을 확보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판단의 질이란 국민 개개인의 지적 수준과 판단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방금 말한 대중주의와 민주주의의 구분과도 관련된다. 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완성되었다 해도, 선거 주체들의 판단의 질이 낮다면 이는 곧 대중주의의 폐해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결국 양의 폭력(violence of quantity), 머릿수의 폭력에 불과하게 된다. 민주주의에서는 정치학자도 한 표를 행사하고, 정치에 관심도 없는 사람도 한 표를 행사한다. 질적 차이는 하등의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오로지 양만이 문제가 되는 철저한 등질화의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요컨대 오늘날의 민주주의란 형식적으로는 주권재민을 실현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대중주의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선거란 정치에 대한 옳은 판단보다는 단지 개개인의 이해타산의 모자이크가 될 뿐이다. 질은 양에 파묻혀버린다.
앞에서 속류 문화의 비판을 반민주주의라고 비난한 경우를 보았거니와, 바로 이런 비난에는 양적으로 많은 것은 무조건 옳은 것이라는 대중주의를 민주주의와 구분하지 못하는 생각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는 바로 이런 대중주의 때문에 민주주의가 한계에 부딪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완성을 향하여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부정할 것인가?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으로, 아무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대중이 질적으로 성숙해져서 대중주의와 민주주의가 일치하게 되는 길, 즉 양과 질이 일치하게 되는 길이다.
속류 문화 비판자를 반민주주의자로 매도하는 경우를 보았거니와, 이제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속류 문화 비판 즉 대중주의 비판이야말로 바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조건이라고. 대중의 문화적 수준에 대한 비판은 정치와 상관없는 비판이 아니라, (바로 위의 매도가 틀린 방식으로나마 일깨워 주었듯이) 정치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대중의 성숙이 없이는, 즉 판단의 질을 높이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란 발전할 수 없다. 아니 작금의 상황이 보여주듯이 오히려 퇴보해 갈 것이다.
민주주의는 ‘무조건’ 긍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접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주장자의 의도와는 달리 반민주주의적 주장이다. 어떤 제도이든 역사적으로 진보해 나가는 것이며, 끝없이 개선되어 가야 한다. 민주주의를 그 현실태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곧 그것의 발전을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과도 같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어떤 부분이 발전되어 가야 하는가? 바로 민주주의의 내용적 측면인 대중주의가 극복되어 가야 하는 것이다. 대중의 판단의 질이 성숙해지고 그로써 판단의 양과 질이 합치해 나갈 때 민주주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의 질적 측면 즉 그 대중주의를 비판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화에서의 비판이 곧 정치 발전의 중요한 한 조건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고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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