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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보는 학살 메커니즘
영화로 보는 학살 메커니즘
  • 이상빈
  • 승인 2015.10.06 14: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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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든 아이>/<시크릿액션> 프로젝트 중에서, 2014-배혜림
영화가 전쟁을 온전히 그려낼 수 있을까? 그려낼 수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가능할까? 이런 질문을 우문으로 느낄 만큼 우리는 이미 ‘잘 만든’ 전쟁영화를 무수히 접해왔다. 우리는 모두 <디어 헌터>가 그려낸 월남전 참전 미국 젊은이들의 절망을, <지옥의 묵시록> 속 키츠 대령의 섬뜩한 광기를 기억한다. 또 <라이언일병 구하기>가 그려낸 노르망디상륙작전의 박진감을, <쉰들러 리스트>가 담아낸 휴머니티 역시 기억할 것이다. 많은 전쟁영화들은 정치와 이데올로기의 갈등 상황 속에 본의 아니게 편입되어 버린 인간의 허약함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전쟁이 복합적인 갈등의 완결판이기에, 전쟁영화는 그 어떤 장르보다 더 리얼하고 충격적이다. 그렇다면 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홀로코스트(대규모 학살)’는 어떨까? 주제가 ‘대규모 학살’로 바뀌는 순간, 만만치 않은 문제가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을 느낀다. 이 때 문학을 비롯한 20세기 미학에 제기된 문제가 영화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미학적 수단을 동원해 대규모 학살을 그려내는 일은 온당한가? 1시간 내에 3천여 명이 가스실에서 죽어나가는 풍경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가해자와 피해자는 어떻게 다룰까? 잊혀진 역사 혹은 편파적으로 왜곡된 역사는? 대규모 학살은 오늘날 19세기에 일어난 리얼리즘이 불안하게 재현되는 가장 문제적 주제, 대상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그렇다면 대규모 학살이라는 주제는 전쟁과는 또 다른 방식의 접근을 요구하며, 그러기에 보다 정교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다. 전쟁과 대규모 학살을 다룬 영화들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검토해보자.

전쟁을 그려낸다?

  전쟁영화란 무엇인가? 개념, 정의를 생각할 때 우리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전쟁을 직접 체험하고 만든 영화와 그렇지 않은 것, 전쟁을 미학적으로 처리한 영화와 그렇지 않은 것, 전쟁 이전 혹은 전쟁 중, 그리고 전쟁 이후에 제작된 영화가 있다. 이 모두를 통틀어 우리는 ‘전쟁영화’라 부른다. 크게 보자면 <스타워즈>도 전쟁영화라 부르지 못할 게 없다. 즉 범위가 너무 넓기에 ‘전쟁영화’의 정의는 무의미해진다. 대체로 ‘파국적인 사건(전쟁)’으로부터 시간적으로 멀어질수록 영화는 객관성이 높아진다고 인식된다. 역사적 정리가 마무리된 후 세상에 나온 영화는 사건의 역사화가 이루어진 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미학적 거리’를 확보한 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 때 미학적 거리란 무엇을 뜻할까? 얼마 전 상영된 영화 <국제시장>은 세대별 수용 문제가 첨예하게 제기된 경우다. 사건을 직접 체험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의 영화 수용방식에는 극단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 배후에 박정희 시대를 미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깔려있다고 해석했다. 나 역시 광주 항쟁을 다룬 <화려한 휴가>를 볼 때 비슷한 체험을 했다. 좌석 앞뒤에서 제법 많은 학생들이 흐느끼거나 소리 내며 울고 있었다.  반면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이 전라도 출신일 학생들은 이 영화를 통해 1980년의 광주 역사를 접하고 있었을 것이고, 나는 내 나름대로 직접 체험한 당시 현실을 영화와 비교하고 있었다. 극적인 효과를 겨냥한 영화 속 러브스토리도 불편했지만, 무엇보다 리얼리티의 부재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당시 분위기를 전달하기에 전남도청 앞거리는 방금 청소를 끝낸 듯 너무나 깨끗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영화의 ‘예술적인’ 성격에 대해서도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견해를 낳고 만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아름다움은 정치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까? 대규모 학살을 미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시도에 대해, 작가 샤를로트 바르디는 극단적인 거부감을 표명하는 반면, 엘리자베스 빌은 “오직 예술작품만이 지옥(수용소)을 체험한 우리 존재를 복원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시선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정념의 역사를 집대성한 파국적 사건이라는 측면에서, 작가 개인의 세계관을 담은 영화나 문학은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편들기’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게다가 시대상의 변화 또한 미학에 대한 제한적 해석을 낳는다. 영화 <디어 헌터> 속의 월남전 참전 세대의 비극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 <알제리 전투>는 오늘날 동시대의 프랑스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공감을 줄 수 있을까? 
소련 붕괴 이후의 러시아 사회는 ‘세계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수용소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처럼 당대 사회와 현실을 다룬 영화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더없이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시대를 증언하던 위대한 작가가 ‘러시아의 영혼’을 부르짖는 극우 이데올로기의 대변인으로 전락해버린 비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념의 대립이 종식된 세계 속에서 솔제니친의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치더라도, 일정 시기에 지속적으로 울림을 선사하던 참여지식인이 깡그리 잊혀져간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러한 풍경은 정치와 이데올로기 역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20세기를 점철했던 거대 담론의 붕괴를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현실을 그려내는 영화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무엇을 그려내는가

  영화는 우리가 눈으로 본 사실을 그려낸(다고 믿는)다. 때로는 상상에 의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상 실재했던 전쟁을 그릴 때, 리얼리티를 살리려면 필연적으로 우리의 눈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극한상황에 대한 체험은 늘 상대적이고 제한적이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허구)과 역사(실제)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과연 역사는 모두 사실을 그려낼까? 소설은 늘 가공의 이야기를 꾸며낼까? 둘 다 글을 전제로 하고, 기술자(소설가와 역사가)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 그리고 둘다 과거의 질료를 바탕으로 한다. 역사에서 어느 정도 정리된 해석을 소설은 상당 부분 반영한다. 반면, 영화는 현재 진행형인 역사 해석을 ‘증인’의 형태로 담아낸다. 여기서 미학의 두 장르인 소설과 영화는 갈라진다. 특히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영화는 ‘증언’의 현재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측면에서 소설보다 훨씬 문제적이다. 일례로, 클로드 란즈만(Claude Lanzmann) 감독의 영화 <쇼아(Shoah>(1) 속 증인들은 40년 전의 증오심을 오늘의 관객들에게 피력하고 있다. 노르통 크뤼(Norton Cru)가 주장하듯 전쟁에 직접 참가한 사람만이 증인 자격이 있고, 체험담을 써낼 자격도 있다면, 우린 필연적으로 전쟁영화 역시 당대의 지배적 가치, 곧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영화를 다룰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역사의 피해자였던 유럽 유대인들은 대규모 학살 희생자의 입장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에 대한 유대인들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입장은 그들이 생산한 예술적 가치를 폄훼하고 있다. 때때로 유대인들은 영화에 해석을 거부하는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란즈만은 그의 대작 <쇼아>에 탈무드적 성격을 부여하면서, “이 영화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는 <쇼아>가 탈무드적 성격의 작품이라 강조한다. “탈무드는 재현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쇼아>는 열린 해석을 거부하는 종교적 텍스트와 다를 바 없다. 증인과 증언이 갖는 문제를 더 따져보자.

누가 그려내는가

  누가 증인이고, 무엇이 증언일까? 이 경우 증인에 대한 프리모 레비(Primo Levi)의 극단적인 정의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프리모 레비에 의하면, 대규모 학살을 증언하는 대다수 부류는 ‘가짜 증인’들이며, 진정한 증인들은 가스실에서 사라졌기에 이미 지구상에 없는 자들이다. 오늘날 증언의 독점을 부르짖는 적지 않은 부류가 있으며, 많은 이들은 그들을 ‘고통팔이꾼’이라고 부른다. ‘대규모 학살 산업’이라는 표현이 존재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대규모 학살을 소재로 글과 영화, 그림과 음악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작업이 낳는 긍정적인 효과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학살을 그리는 문학예술의 지나친 양산은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도 낳고 있다. 또한, 책의 민족이라는 유대인들이 ‘기억하라’는 명제에 입각해 과잉생산을 하고 있다면, 글을 가지지 못했던 집시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는 오늘날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또 20세기 전반 유럽을 휩쓸었던 전체주의의 한 축인 나치즘을 고발하는 책은 엄청나게 많은 반면, 소련 공산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책은 드물다. 이런 반성의 움직임에서 나오기 시작한 책들이 ‘흑서(Black book)’다. 대규모 학살 영화가 많다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전체주의의 폐해에 경중을 따질 수가 있을까? 적어도 대규모 학살로 인한 인간성의 황폐화 측면에서는 르완다 사태, 킬링필드의 비극, 소련수용소의 만행 사이에 높낮이를 둘 수 없다. 차이가 있다면 희생자의 숫자뿐일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는 대규모 학살에 대해서는 슬픔을 표명하고, 아시아의 비극에 대해서는 절제된 감정을 표출한다. 게다가 유럽 한복판에서 파시즘이 자행한 대규모 학살의 비극을 상대화하기 위해 서구인들은 소련 공산체제가 낳은 수용소의 비극성을 강조하고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가공스러움을 강조한다. 이들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전쟁을 용납할 수 없다”는 평화주의이다. 
  하지만 유대인으로서의 란즈만이 역사 속 참 증인일까? 그는 “카메라를 통해 나치를 죽이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의 시각은 필연적으로 나치와 폴란드인을 가해자로, 유대인을 희생자로 설정한다. 란즈만의 선택은 다분히 자의적이다. 역설적으로, 나치를 공식 촬영한 감독인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2) 역시 진실을 표방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낸 역사 속의 증인이다. 이 경우 우리는 한스 지버베르크(Hans-Jurgen Syberberg)(3)와 리펜슈탈을 대비시킬 수 있다. 리펜슈탈이 나치의 영광을 선정적인 방식으로 그려냈다면, 지버베르크는 히틀러 사후에도 살아남아 현대 문화 속에서 망령처럼 떠도는 악의 원칙을 다룬다. 여기서 현재는 결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과연 우리는 나치와 다른 존재인가? 전쟁은 과연 일정 시기에만 국한된 하나의 파국인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가 역사의 증인인 동시에, 프리모 레비가 설정한 ‘회색지대’에 거주하는 불가지의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해자나 피해자 어느 한 쪽이 아니라, 가해자 겸 피해자가 된다.

미학적 수단은 유효한가

  영화는 어느 장르보다 더 직접적으로 기억을 현재와 연결시키는 수단이다. 영화 <쇼아>는 생존자들의 여과되지 않은 증오심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글로 기록된 문학과는 달리, 이 영화는 관객 모두를 가해와 피해로 점철된 과거 및 현재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면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현실과의 직접 대면이 늘 바람직할까? 영화를 통해 대학살을 그려내는 작업은 이 주제에 던져진 논리의 아포리아를 드러낸다. 다시 말해, 침묵은 오늘날 아베 류의 역사수정주의에 협력하는 행위인 셈이고, <쇼아>와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엄청난 고통의 바다에 돌을 던지는 행위인 셈이다. 결국 영화 역시 문학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바깥 세계를 담아내는 증언의 차원을 뛰어넘어 스스로의 미학 세계를 재검토하는 데 주력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이데올로기적 환경이 변화하고, 증인들 역시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롤모델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현실 속 정치나 이데올로기와의 직접 대면을 피하면서도 예술 고유의 아이러니, 상상력, 동화적 세계를 통해 대규모 학살의 비극을 승화시키고 있다. 영화는 세상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창이자, 세상의 갈등을 외면할 수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소설이나 영화 같은 문학예술은 인간의 삶을 해방시켜야 하는 조건을 동시에 안고 있는 것을.  

글·이상빈
파리8대학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예술의 여러 장르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외국어대 대학원 비교문학과에서 겸임교수로 재직중이며,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 <르몽드 20세기사> 등을 옮겼으며, <유럽 여행 유럽 이야기>(공저) 등을 썼다. 

(1)  <Shoah>,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다룬 전쟁 다큐멘터리. 제목 '쇼아(Shoah)'는 히브리어로 '절멸'을 의미한다. 1985년 프랑스의 클로드 란즈만 감독이 발표한 작품으로 8년간의 촬영과 350시간 분의 인터뷰를 9시간30분에 달하는 다큐멘터리로 완성시켰다. 학살 당시의 기록 영상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생존자, 증인, 그리고 과거 나치였던 이들의 인터뷰만으로 구성되었다. 
(2) Berta Helene Amalie ‘Leni’ Riefenstahl, (1902.8.22 ~ 2003.9.8)은 독일의 배우, 감독, 영화제작자. 촬영 기술에서 혁신을 일으키는 등 영화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나치 독일의 선전 영화를 제작했으며, 이 때문에 2차 대전 이후 영화계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어 사진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4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6차 나치전당대회를 기록한 다큐영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는 선전영화의 백미로 꼽힌다.
(3) <히틀러(Hitler - ein Film aus Deutschland)>를 제작한 독일출신 영화 감독. 그의 영화세계는 18세기적인 합리주의와 19세기적인 신비주의라는 독일의 정신적 유산에 근거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히틀러>는 상영시간 7시간이 넘는 대작으로, ‘한 편의 독일 영화’, ‘독일의 꿈’, ‘겨울 동화의 끝’, ‘우리, 지옥의 아이들’의 4개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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