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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을 잊고 박정희를 숭배하다
부마항쟁을 잊고 박정희를 숭배하다
  • 안영춘 | 한국판 국제편집장
  • 승인 2009.11.05 23:0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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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 속 30주년 기념 심포지엄… 오늘의 한국 사회에 시사점
양자는 모순대당 관계…‘힘의 욕망’ 벗어나야 박정희 극복 가능

부마민주항쟁은 사람 몸의 꼬리뼈와 같다. 퇴화기관이라는 말이다. 지난 10월 16일은 부마항쟁이 일어난 지 꼭 30년이 되는 날이었다. 온갖 상수학적 마케팅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부마항쟁 30주년에 관한 사회적 환기는 묵상에 가까웠다.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열흘 뒤 10·26 사태가 터졌다.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일주일도 채 안 돼 자신의 심복 김재규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30년이 지난 지금, 부마항쟁은 흔적만 남은 꼬리뼈처럼 잊혀지고, 박정희는 숭배의 대상으로 되살아나 있다. 그리고 박정희의 부활을 이해하는 데 요령부득인 이들의 눈에 지금 민주주의는 고속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기억에 대한 정권 차원의 퇴행이 거듭되고 있지만, 4·19 혁명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은 그나마 부마항쟁보다 사정이 낫다. 지난 10월 9일 서울 기독교회관에서는 ‘박정희 체제와 부마항쟁의 역사적 재조명’이라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30주년을 기념하는 유일한 전국 단위의 행사였다. 내로라하는 관련 분야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5개의 주제 발표와 종합토론까지 온종일 진행됐지만, 언론은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의 말대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이날 발표되고 토론된 내용들은 30년 전이 아닌, 지금 여기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부마항쟁과 김재규의 방아쇠

▲ 부마항쟁 당시 시위대의 모습.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이날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은 부마항쟁이 고립된 돌출적 사건이 아니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했다. 부마항쟁이 10·26의 직접적 도화선이었고, 이듬해 5·18을 넘어 1987년 6·10에까지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이 정연하게 짚어졌다. 그동안 부마항쟁의 성격을 둘러싼 학술적 논쟁과 관련해, 정태석 전북대 교수(사회교육학부)는 “부마항쟁의 복합성을 인정한다면 그 의미를 민주화운동, 민중운동, 도시봉기 등 특정한 하나의 맥락 속에 고정하려는 시각은 불필요하다”며 “그것은 정치적 민주주의의 성취를 위한 것이었으면서 동시에 경제적 민주주의, 분배적 정의를 촉구한 것이기도 했다”고 정리했다.

특히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방아쇠를 당겨 유신체제가 붕괴되도록 하는 데 부마항쟁이 어떤 힘으로 작용했는지는 추상의 심급에 상관없이 공통되게 언급되는 부분이었다.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과)는 “부산에 내려가 현장을 본 김재규는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팽배해진 것이 부마항쟁 같은 국민적 항거로 현실화됐음을 확인했다”며 “그러나 박정희가 자신의 보고를 묵살하고 유혈극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유신의 심장을 쏘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했다. 조정관 전남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유신 붕괴는 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체제 정통성이 낮아진 정권 내부의 파벌적 약한 고리를 부마항쟁의 충격이 끊어낸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도 부마항쟁은 왜 한국 사회의 집단기억에서 사라진 걸까? 조정관 교수는 이를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으로 나눠, 7개월 뒤에 발발한 5·18과 비교했다. 객관적 조건에서는 1980년의 ‘서울의 봄’과 5·18이 1979년의 부마항쟁을 기억에서 밀어냈다는 것, 광주항쟁의 규모나 기간, 역사적 파장이 부마항쟁보다 훨씬 컸다는 것(부마항쟁에서는 사망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전두환은 5·18 이후에도 기억투쟁의 정점으로 현존하는 권력이었지만 박정희는 표면상으로는 부마항쟁 직후 사라졌다는 점 등을 꼽았다.

주체적 조건으로는, 5·18이 극심한 폭압 속에서도 연례적으로 일깨워진 데 반해 부마항쟁을 이어가야 할 당사자들은 이런 운동을 충분히 펼치지 못했다는 점, 광주의 경우와 달리 부마에서는 항쟁의 기간이 짧았고 첫 발화자였던 운동권의 조직 역량이 충분하지 못해 기억될 수 있는 항쟁 주체와 항쟁의 기억을 추구하는 주체가 분명히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 1980년대 부마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다시금 김영삼이라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전반적인 동원에 매몰돼, 1987년 대선 등 이후 정치 일정에서도 항쟁의 역사적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는 전국적인 문제제기가 일어나지 않은 점 등이 거론됐다.

5·18과 6·10만 기억하는 역설

그렇다면 부마항쟁이 잊혀진 것과 박정희의 부활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없을까?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과)는 이에 대해 탁월한 해석의 틀을 제시했다. 김 교수는 “오늘에 이르도록 부마항쟁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사건의 고유성과 정체성, 역사의 총체성, 그리고 나 또는 우리와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온전히 대답되지 않았고, 그보다 온전히 물어지지도 않았다”며 물음의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부마항쟁과 박정희의 관계를 정식화하고, 그 결과를 통해 왜 박정희는 지금까지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숭배되는지 탐색했다.

김상봉 교수는 부마항쟁과 박정희가 ‘모순대당(矛盾對當) 관계’ 또는 ‘상호부정 관계’에 있고, 이것이야말로 부마항쟁만이 지닌 고유한 의미라고 했다. 부마항쟁을 긍정하면 박정희를 부정할 수밖에 없고, 박정희를 긍정하면 부마항쟁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1) 5·18 및 6·10과 모순대당 관계에 있는 것은 전두환과 신군부 집단이다. 이 두 사건을 긍정하면 전두환은 부정될 수밖에 없고, 자연히 그 역관계도 성립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5·18과 6·10을 통해서는 박정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입각점을 확보할 수 없게 되고, 5·18과 6·10만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부마항쟁을 잊어버린다면 박정희를 필연적으로 부정해야 할 까닭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부마항쟁은 잊혀졌다. 왜 박정희가 부정되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할 수 없다. 김상봉 교수는 “실제로 이것이 오늘날 박정희가 다시 숭배될 수 있는 이유”라며 “오직 우리가 부마항쟁을 잊지 않을 때에만 우리는 왜 박정희가 부정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부마항쟁은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위대함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 반항했던 철없는 학생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제 부산에서는 일부 보수 단체들이 부마항쟁의 기억을 지우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기도 하다.(2)


그렇다면 물음은 다시 물어져야 한다. 왜 한국 대중은 박정희를 다시 긍정하고, 대신 부마항쟁을 망각하게 되었는가? 한국 대중에 의해 부정됐던 박정희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부마항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조성관 교수가 부마항쟁이 잊힌 이유를 ‘조건’에 초점을 맞춰 설명했다면, 김상봉 교수는 내면으로 눈길을 돌린다. 김 교수는 정치한 사유를 거쳐 답을 찾아가지만,(3) 불가피하게 그의 여정을 도식화하면 1980~90년대의 집단기억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는 5·18과 6·10에 대한 기억의 연보와 겹친다.

박정희를 승인하기 시작한 지식인들

김상봉 교수에 따르면, 광주의 대학살을 시작으로, 한국 대중은 1980년대를 관통하며 분노와 증오를 내면화한다. 분노와 증오는 다시 힘에 대한 ‘욕망’으로 전화된다. 힘이 있어야 학살자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1987년 대중은 독재정권을 완전히 종식시키지는 못했지만, 자기 힘으로 지배 권력을 누르고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경험을 얻는다. 그러나 승리의 관성도, 불완전한 승리의 기억도 힘에 대한 욕망을 더욱 부추긴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부끄러움(4)도 분노도 아닌, “부자 되세요”로 상징되는 힘의 욕망이 지배적 정념이 된다. 박정희는 그런 힘의 욕망 속에서 서서히 부활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에서 힘의 화신으로 환유되는 존재였다.(5)

김상봉 교수의 이런 이해는 부마항쟁을 기억에서 지운 책임도, 박정희를 되살린 책임도 대중에게 돌리는 것으로 자칫 비칠 수 있다. 그러나 구조와 환경 탓만 하는 것도 대중을 타자화하는 것이기에, 곧 박정희의 통치관과 동전의 양면 관계에 놓일 수 있다. 특히 진보적 지식인으로 불리는 이들 가운데서도 박정희를 부분적으로 승인하는 언설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김 교수의 진술은 누구보다 지식인 사회를 향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김 교수는 이들 지식인에게서도 ‘힘의 욕망’을 읽어낸다).(6)

김상봉 교수는 “지금 부마항쟁을 생각한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잊은 시대에 다시 부끄러움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을 뜻한다”며 “우리 시대에 부활한 박정희의 유령을 퇴치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30년 전의 부산과 마산이며, 그 시절의 순수한 부끄러움”이라고 진단했다. 퇴화된 꼬리뼈에 손을 갖다 대보라는 말처럼 멀리 들리지만 않는다면, 그의 말은 시원으로서 새로운 출발점을 지시하는 것이 아닐까. 


<각주>

(1) 부마항쟁이 유신정권, 즉 박정희를 정면으로 부정한 투쟁이라는 분석은 모든 발제·토론자에게서 일치했다. 심포지엄 자료집(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부설 민주주의사회연구소)을 참조할 것.

(2) “‘민주부산’이 그렇게 부끄럽나? 민주공원 돌리도”, <민중의 소리> 2009년 9월 4일.(www.vop.co.kr/A00000266208.html).

(3) 김상봉, ‘귀향-혁명의 시원을 찾아서: 부끄러움에 대하여’, 위 자료집.

(4) 김상봉은 부마항쟁의 정신을 ‘부끄러움’으로 규정했다. 위 자료집.

(5) 박정희가 1980년대에 부활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위 자료집 참조.

(6) 위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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