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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새 세상이 열리는 5월의 첫날
참말로 새 세상이 열리는 5월의 첫날
  • 방정환
  • 승인 2016.05.02 10: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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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

- ‘어린이 동무들에게’ 중에서, <어린이>(1924)

사월 그믐날 밤

사람들이 모두 잠자는 밤중이었습니다.
절간에서 밤에 치는 종 소리도 그친 지 오래 된 깊은 밤이었습니다. 깊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밖에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한 밤중이었습니다.
이렇게 밤이 깊은 때 잠자지 않고 마당에 나서 있기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습니다. 참말 내가 알기에는 나 하나밖에 자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시계도 안 보았어요. 아마 자정 때는 되었을 것입니다.
어두운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별들을 쳐다보고 있은즉 별을 볼수록 세상은 더욱 고요하였습니다. 어데서인지 어린 아가의 숨소리보다도 가늘게 속살속살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가 들어서는 큰일 날 듯한 가늘디가는 소리였습니다. 어데서 나는가 하고 나는 귀를 기울이고 찾다가 내가 공연히 그랬는가 보다고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살거리는 작은 소리는 또 들렸습니다. 가만히 듣노라니까 그것은 담 밑의 풀밭에서 나는 소리였습니다.
“아이그, 인제 곧 새벽이 될 터인데 꿀떡을 이 때까지 못 맨들었으니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것은 고운 보랏빛 치마를 입은 조꼬만 조꼬만 앉은뱅이꽃의 혼이었습니다.
“에그, 꿀떡은 우리가 모두 맨들어 놓았으니 염려 말아요. 그런데 내일 새들이 오면 음악할 자리를 어데다 정하우?”
하는 것은 보라 옷을 입은 진달래꽃이었습니다.
“음악할 자리는 저 집 이 층 위로 정하지 않었나배. 잊어 버렸나?”
하고 노란 젓나무 꽃이 말을 하고는 복사나무 가지를 쳐다보고,
“에그, 여보, 왜 이 때껏 새 옷도 안 입고 있고. 그 분홍 치마를 얼른 입어요. 그러구 내일 거기서 새들이 음악 할 자리를 치워 놓았소?”
하고 물었습니다.
“치워 놓았어요. 인제 우리는 새 옷만 입으면 그만이라오. 지금 분홍 치마를 다리는 중이에요. 그 아래에서는 모두 차려 놓았소?”
하고 복사꽃의 혼은 몹시 기뻐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보니까 거기는 진달래꽃, 개나리꽃,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날만 밝으면 좋은 세상이 온다고 그들은 모두 새 옷을 입고 큰 잔치의 준비를 바쁘게 하는 중이었습니다. 할미꽃은 이슬로 술을 담그느라고 바쁜 모양이고 개나리는 무도장 둘레에 황금색 휘장을 둘러 치느라고 바쁜 모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벌써 심부름을 다 하고 앉아서 날이 밝기를 바라는 아가꽃들도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때 ‘따르릉 따르릉’ 하고 조꼬만 인력거 한 채가 등불을 켜 달고 손님을 태워 가지고 왔습니다. 인력거꾼은 개구리였습니다. 인력거를 타고 온 손님은 참새 새끼였습니다. 왜 이렇게 별안간에 왔느냐고 꽃들이 놀라서, 하던 일을 놓고 우루루 몰려왔습니다.
참새의 말을 들으면 제비와 종달새들은 모두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꾀꼬리가 목병이 나서 내일 독창을 못하게 되기 쉽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에그, 그래 어쩌게?”
“꾀꼬리가 못 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들을 하다가 좋은 꿀을 한 그릇 담아서 약으로 잡수어 보라고 주어 보냈습니다. 참새 새끼는 꿀을 받아가지고 다시 인력거를 타고 급히 돌아갔습니다. 
참새가 돌아간 후 얼마 안 있어서 이번에는 ‘따르릉 따르릉’ 하고 불 켠 자전거가 휘몰아 왔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은 다리 긴 제비였습니다.
“어이그, 수고 많이 하였소.”
“얼마나 애를 썼소.”
하고 꽃들은 일을 하는 채로 내다보면서 치사를 하였습니다. 제비는 오월이 오는 줄 모르고 잠자고 있는 꽃과 벌레를 돌아다니면서 깨워 놓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 우선 애썼다고 이슬 술을 한 잔 얻어먹고 좋아하였습니다.
동네 집, 불 끈 방 속에서 시계가 새로 두 점(새벽두시)을 치는 소리가 들려 올 때에 나비 한 마리가, ‘나비들은 무도복을 모두 입고 기다리고 있는데 다른 준비가 모두 어떻게 되었느냐’고 그것을 알러 왔다가 갔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은 내일은 날이 좋을 것이다고 일러 주는 것같이 빤짝빤짝하고 있었습니다.
고요하게 평화롭게 오월 초하루의 새 세상이 열리어 가는 것이었습니다.
 
▲ <그림자 놀이>, 2016 - 권재원

오월 초하루

새벽 네 시쯤 되었습니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벌써 종달새가 하늘에 높이 떠서 은방울을 흔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꽃들이 그를 듣고 문을 딸깍 열고 빵긋 웃었습니다. 참새가 벌써 큰북을 짊어지고 왔습니다. 제비들이 길다란 피리를 가지고 왔습니다. 주섬주섬 모두 모여들어서 다 각각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층, 아래층에서 꽃들이 손님을 맞아들이기에 바빴습니다. 아침 해 돋을 때가 되어 무도복을 가뜬 입은 나비들이 떼를 지어 왔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더 판이 어울려졌습니다.
목을 앓는다던 꾀꼬리도 노란 새 옷을 화려하게 입고 인력거를 타고 당도하였습니다. 꾀꼬리가 온 것을 보고 모두들 어떻게 기뻐하는지 몰랐습니다. 일 년 중에도 제일 선명한 햇빛이 이 즐거운 잔치터를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버들잎 잔디풀은 물에 갓 씻어 낸 것처럼 새파랬습니다. 
오월 초하루!
거룩한 햇볕이 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복사나무 가지 위 꽃그늘에서 온갖 새들이 일제히 오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맞춰서 나비들이 춤을 너울너울 추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잔디풀, 버들잎까지 우쭐우쭐하였습니다.
즐거운 봄이었습니다. 좋은 날이었습니다.
특별나게 햇볕 좋은 아침에 사람들은 모여들면서,
“아이고, 복사꽃이 어느 틈에 저렇게 활짝 피었나!”
“아이그, 이게 웬 나비들이야!”
“인제 아주 봄이 익었는걸!”
하고 기쁜 낯으로 이야기하면서 보고들 있었습니다.
오월 초하루는 참말 새 세상이 열리는 첫날이었습니다.
(이때는 어린이날이 5월 1일이었다. 방정환 선생님이 1923년에 정했다. 어린이날은 1927년에 5월 첫 번째 일요일로, 나중에 다시 5월 5일로 바뀌었다-편집자주)
-<어린이>, 1924년 5월   


글·방정환 
 
아동문학의 보급과 아동보호운동의 선구자인 아동문학가. 방정환 선생은 1923년 3월 30일 어린이 운동단체인 색동회의 설립을 주도하고, 같은 해 5월 1일 ‘어린이날’ 제정에 앞장섰다. 국내 최초 순수아동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만든 방정환은 언론인이자 출판인, 운동가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재정난, 소년운동 진영의 분열이 가져온 스트레스로 쓰러졌다. 1931년 7월 17일 신장염과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7월 23일에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 직전까지도 동화집필과 구연동화에 몰두했던 어린이들의 대부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어린이를 두고 가니 잘 부탁하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글은 1924년 <어린이>5월호에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날 제정의 의미를 동화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낸 것으로, 고통 받는 우리 어린이들의 암담한 현실에서 여전히 많은 생각거리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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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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