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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작곡가, 에릭 사티 탄생 150주년
침묵의 작곡가, 에릭 사티 탄생 150주년
  • 아가드 멜리낭
  • 승인 2016.09.01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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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랭 들라 갈레트>, 1891 - 라몬 카사스 이 카르보

가장 독창적인 선대 예술가에 대해, 후대 사람들은 단 몇 편의 매력적인 작품에 대해서만 떠올리곤 한다. 1.5세기 전에 태어난 작곡가 에릭 사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감미롭기로 유명한 사티의 ‘짐노페디’는 배경음악으로 수없이 쓰이며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벨에포크 시대에 공산주의자로 자신을 갈고 닦던 에릭 사티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에릭 사티(1866~1925)에 대해 묘사하려니 복잡한 심정이 된다. 그의 성품에 대해 말하려니 조심스럽다. 그는 반항적이었고 농담을 즐겼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등을 돌렸고, 거처인 아르쾨유의 오두막에 처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그를 되살리는 것은 아슬아슬한 곡예와 같다. 벨벳 정장차림의 젊은 혁명가와, 공증인 차림을 한 사티 중 누구 이야기를 해야 할까? 아니면 언제나 걸어서 교외 생제르맹의 노아유 마을을 가끔 방문하던 사티? 아니면 아르쾨유에서 “구덩이에서 잠을 자고 주정을 부리던”(1) 사티?
<르 샤 누아(Le chat noir)>(‘검은 고양이'라는 뜻으로, 예술가들이 모이던 몽마르트의 카바레 이름-편집자 주)의 피아니스트? 아르쾨유-카샹에서 비종교선도회를 이끌던 남자? 사티는 많은 데생과 글을 남겼고, 심지어 무려 840번 반복하는 곡 <짜증(les Vexations)>도 남겼다. 그는 말했다. “이 곡을 제대로 연주하려면, 아주 조용한 곳에 꼼짝 말고 앉아서, 미리 단단히 연습해두는 게 좋을 것이다.” 맞다. 1963년 존 케이지와 9명의 피아니스트들이 최초로 15시간이나 연주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의 우스꽝스러운 강연, 음악에 대한 비평, 아포리즘, 분노에 찬 외침, 그의 시들과, 그의 주장에 대해 말해야 할까? 그가 가담했던, 아르쾨유 공산당 제1지부에 대해 이야기할까? 사티 음악의 다채로운 측면을 간과하게 만드는, 그 유명한 ‘그노시엔’과 ‘짐노페디’ 이야기로 만족해야 할까? 장 콕토, 모리스 라벨, 르네 클레르 아니면 피카소의 친구였던 사티, 화가이자 모델인 쉬잔 발라동과 짧은 연인이었던 사티, 그리고 클로드 드뷔시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티에 대해 이야기할까? 비참했다 할 것인가, 신비스럽다 할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그 자신이 유일한 성직자이자 신도였던 <지휘자 예수의 메트로폴리탄 예술 교회>의 설립자를 찬양할 것인가, 아니면 수도도 전기도 없이, 28년이나 모기에 뜯기던, 아르쾨유에 있는 그의 방으로 초대할까?
그만하자. 에릭 사티 탄생 150주년을 맞아 강연도 열리고, 사업비도 지급되고, 생장드뤼즈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에릭 사티를 추모하는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자신의 음악에 흡족해하지 않던 그가 이 모습을 본다면 기뻐할 것이다. 그는 말한다. “짧은 청소년기를 보내고 나는 그럭저럭 평범하고 괜찮은 청년이 됐다.  딱 그만큼이었다. 내 인생의 그 지점에, 나는 악상을 떠올리고 작곡을 시작했다. 맞다. 그런데 그것은 유감스러운, 대단히 유감스러운 아이디어였다! 실상 나는 목적을 벗어난 불쾌한 독창성, 전혀 프랑스적이지도 않고, 자연스럽지도 않은 독창성을 지체 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2)
그렇다. 이는 그의 기질과 어울린다. 도발과 반목과 격노(한 평론가에게 우산을 휘둘러 감옥에 갈 뻔했을 때 최고조에 달했던)가 뒤섞인 예민함과 결합된, 모든 권위와 “원래 그런” 모든 것을 거부하는 그의 반골기질과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카데미 입학이 거부됐을 때 느낀 분노와 아르쾨유 시에서 교육공로훈장을 받았을 때 느낀 기쁨···. 에릭 사티는 언제나 모든 것이자, 그와 상반되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지만 격노와 알코올과 격동의 청소년기는 접어두자. 사티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화이트와인이 필요하다. 그가 좋아하던 화이트와인을 비울수록 유기적인 방식으로 그의 음악이 폭발적으로 소용돌이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사티는 침묵 이전에 온 것과 이후에 올 것을 작곡했다. 
스펠링이 k로 끝나는 에릭 사티는 1866년 5월 17일 “옹플뢰르(칼바도스), 퐁레베크 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의 성장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게도 유년기와 청소년기 비슷한 게 있었지만 진지한 글감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시기는 건너뛰겠다.”(3)
오트 가에 사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없는 꼬마 소년이었던 그가 배와 “넓고 물이 가득한 바다”(4)를 보고 듣는다. 12세 때, 그는 외젠 부댕이 그린 풍경과 비노의 수업을 떠나 파리로 간다. 그곳에서 악보 출판업을 하는 아버지와 아마추어 작곡가인 새어머니와 재결합하는데, 새어머니는 그에게 “진짜 음악”을 가르쳐준다.
“풋내기(Enfant), 당신의 수업을 들었습니다. 나의 영혼은 당신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여렸고, 내 발걸음은 꽃들도 놀라게 했지요. 나는 초보였고, 발랄하고 영민했지만, 당신의 무지함은 나로 하여금 당신이 가르치는 조악한 예술을 경멸하게 만들었습니다.”(5)
음악원은 발칵 뒤집혔다. 교사들은 사티의 재능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지만, 그를 무기력하고 실천력이 부족한 게으른 학생이라고 평가했다. 사티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음악의 미래는 어두웠고, 분노에 찬 채로 학교를 떠나면서 사티는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아마추어들이여, 만세!”라고 외쳤다. 무엇을 할까? ‘환상곡 왈츠’나 ‘왈츠 발레’를 시도해볼까, 노트르담 위의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낼까? 20세에 단선음악 ‘4개의 오지브’를 작곡한 사티는 마디줄 없이도 잘 짜여진 악보를 실험하고 창조해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그 해 사티는 옷을 꺼내 둘둘 말아 바닥에 굴리고 발로 밟고 음료를 퍼부어 걸레로 만들었다. 그는 모자를 뜯고 신발에 구멍을 내고 넥타이를 찢었다. 그리고 면도도 이발도 하지 않았다.”(6)
그는 노르망디, 음악원, 아버지까지 떠났다. 그런 후에야 그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후에 ‘아르쾨유의 착한 아저씨’가 되는 사티는 20세의 나이로 몽마르트 아래에서 시인 친구 J. P. 콩타민 드 라투르와 함께 방을 쓰며 진짜 자신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독한 술이 함께하는 방탕한 삶이었다
 “우리는 모든 관습과 우매함과 편견에 맞서 싸운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을 보여줄 용기가 있고, 이 시대 풍조를 따른다. 우리에게 있어 주인이란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밖에 없다!”(7)
그는 카바레 <르 샤 누아>에서 10년 동안 피아노를 쳤다. “완두콩으로 만든 오리, 마늘 부조, 눈으로 만든 빈혈에 걸린 소녀들의 첫 영성체 등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이들이 만든 그림”을 추구하는 ‘기괴예술파’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알퐁스 알레는 단연코 최고권위자였다. 사티의 유머와 시어(詩語)는 이 웃기는 친구들 덕택에 영원히 남았다.  이 그림자 연극에는 기 드 모파상, 에밀 졸라, 알퐁스 도데, 폴 베를렌, 마르셀 프루스트, 카랑 다쉬, 샤를 크로 등이 등장한다. 사티가 드뷔시를 만난 것도 그림자 연극에서라고 한다. 또한, 비의적(秘儀的)인 성격을 지닌 사티는 작가이자 신비술가인 사르 펠라당의 지부 장미십자단 분파의 성가대 지휘자가 됐다. 그리고 라투르와 함께 ‘크리스천 위스퓌드 발레’를 작곡했다. 그러나 오페라단 단장은 그들의 강압에도 불구하고, 이 곡의 상연을 거절했다.
이렇게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도, 사티는 ‘6개의 그노시엔’과 벌거벗은 어린이가 추는 춤으로 “느리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장중하게” 연주되는 ‘짐노페디’를 작곡했다. 대리석 위로 미끄러지는 그리스 어린이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26세, 그는 쉬잔 발라동과 6개월 간 동거하게 된다. 그들은 짧고 격렬한 관계를 맺는다. 그가 쉬잔에게 원하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쉬잔이 줄 수 있는 것은 점점 줄어들면서 그들은 헤어졌다. ‘고딕 댄스, 내 영혼의 가장 위대한 안정과 가장 강력한 평온을 위한 9일 기도, 술주정뱅이와 부끄러운 자와 방탕한 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에서는 그가 당한 모욕에 대한 용서를 담았다. 사티는 더 이상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았고, 불행해졌다. 그는 아무렇게나 행동했다. 장미십자단을 떠난 그는 무일푼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박물관 수위가 될 생각까지 했다. 경험이 풍부한 평론가인 윌리는 사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혹평했다. “음악에 빠져 정신이 나갔으며, 신비주의를 좇는 비의적이고 더러운 기생충이다.”
이런 혹평에 사티가 맞섰음은 물론이다. 그는 파리의 명사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런 반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미사’를 작곡했다. ‘차가운 소곡집’, ‘막춤’ 등을 썼다. 그리고 비에브르 강변 노동자 마을, 아르쾨유로 떠났다. 그는 1898년 12월 몽마르트에서 아르쾨유로 떠나는 그의 짐 속에, 그의 모든 삶이 담겨있었다. 사티는 아르쾨유의 코시 가 22번지에 자리 잡았다. 15㎡에 불과한 집, 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는 “프리메이슨이 보낸 게 확실한” 모기들이 합주를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연이틀 굶을 정도로 가난했다. 가난은 그를 두렵게 했고, 걸어서 몽마르트로 일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카페콘서트에서 뱅상 이스파 또는  “느린 춤곡의 여왕”인 폴레트 다르티의 반주를 맡았다. 밤에 집으로 돌아오려면 부랑배들이 많은 지역을 지나야 했다. 그러나 사티는 두렵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주머니에 망치를 넣어 다니며 속으로 “덤벼보시지!”라고 외쳤다. 드뷔시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는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사티는 드뷔시에게 “나는 다른 일을 찾아야 해, 그렇지 못하면 패배하는 거야”라고 했다. 드뷔시는 형식에 대해 공부할 것을 권했고, 사티는 ‘배(과일) 모양의 3개의 소품’을 썼다. 사람들은 사티에게 무식하다고 했고, 그 말이 지긋지긋했던 사티는 39세의 나이로 스톨라 칸토룸에 입학했다. 드뷔시는 “당신 나이에 변한다는 것은 힘들다”고 했지만, 학교에 가려면 변해야 했다. 격식을 갖춘 차림을 해야 했다. 사티는 검은 색 정장에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들었다. 이런 차림, 앞으로 계속 고수하게 되는 ‘승마용 복장’차림으로 사티는 ‘매우 우수’한 점수로 대위법 학위를 받았다.
“나는 작곡을 시작하기 전에, 일곱 번 돌아봅니다. 새로운 신선한 소품 ‘벽 위에, 나무 위에, 다리 위에’입니다.”
그 후 라벨과 콕토가 차례로 사티를 보살폈다. 그들은 사티가 연주를 하고 곡을 출간하게 도왔다. 그들은 사티가 살롱을 드나들 때 차에 태워줬다. 사티는 ‘집에서 혼자, 개를 위한 엉성한 전주곡’을 썼다. 발레 ‘파라드’는 파란을 일으켰다. 평론가는 “피카소 만세, 콕토 만세, 사티는 꺼져라!”고 탄식했다. 이에 사티는 반박했고, 싸움이 일어났다(“나는 끝장났다.”).
사티는 “상아탑, 아니 다른 금속으로 된 성채”에서 나와 폴리냑 공작부인을 위해 작곡을 했다. 이 곡이 화려하고 입체주의적인 걸작, 플라톤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은 ‘소크라테스’다. 사티는 ‘야상곡’과 발레곡을 몇 곡씩 더 써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가난했다. 요즘 엘리베이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가구의 음악’(8)을 개발하고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다다이즘 영화 몇 편에 참여했다. 그리고 르네 클레르의 <막간>에는 출연까지 해, 관객들에게 사티를 실제로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이제 ‘프랑스 6인조’ 모임(9)에서 사티의 모습을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사티즘은 존재하지 않는다.”
드뷔시는 죽고, 사티는 라벨, 콕코와 불화를 겪는다. 자칭 ‘늙은 볼셰비키주의자’는 아르쾨유-카샹 비종교선도회의 아이들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아이들은 댄스 수업도, 간식도 받을 수 없었다. 사티는 경변과 늑막염으로 입원했다. 더 이상 집에도 갈 수 없었다. “수요일, 그 가엾은 늙은 남자를 봤어. 그가 죽은 날 아침이었지. 그의 방에 들어갔더니 자고 있었어. 그는 며칠이나 샴페인과 진통제 외에 입을 대지 않았어.”(10)
에릭 사티는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장례식 날에는 날씨가 아주 화창했고 장례행렬은 매우 길었다. 그리고 예쁜 양산을 쓴 두 명의 젊은 여성이 장례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글·아가드 멜리낭Agathe Melinand
툴루즈국립극장 공동극장장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에릭 사티의 인용구는 장피에르 아르망고의 전기 <에릭 사티>(파야드, 파리, 2009)를 참조했다. 
(2) 에릭 사티,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의 회고록, 나의 은밀한 이야기>, 옹브르, ‘작은도서관’ 총서, 툴루즈, 2010.
(3) Ibid. 
(4) ‘스포츠와 기분전환’, 피아노를 위한 21개의 소품.
(5) 음악원에 보내는 편지, 1892년 11월. 오르넬라 볼타가 정리한 그의 <거의 완전한 서한집>(파야드, 파리, 2010) 참조.  
(6) 콩타민 드 라투르, ‘사적으로 만난 에릭 사티, 청소년기의 추억’, <코메디아>, 파리, 1925년 8월 6일.
(7) 앙리 리비에르, <르 샤 누아> 잡지에서. 
(8) La Musique d’ameublement, 가구처럼 그저 그 자리에 있는 음악이라는 뜻. 이 곡들에는 <현지사 집무실의 음악>, <음이라는 타일을 깐 보도> 같은 제목이 붙어있다. 즉, 연주회장에서 작품으로 연주하기 위한 곡이 아니라, 일상 속에 존재하는 음악, 즉 배경음악처럼 흐르도록 작곡된 것이다. 이 곡을 발표했을 때 사티는 좌석에 앉아 대화를 멈추고 조용히 감상하려는 청중들에게 화를 냈다는 일화가 있다. 이렇게 ‘가구의 음악’은 새로운 청취법을 요구하고, 그에 따른 새로운 작곡법을 실천했다.  
(9) 음악가 조르주 오릭, 아르튀르 오네게, 프랑시스 풀랑크, 루이 뒤레, 제르맨 타유페르, 다리우스 미요 등 여섯 명을 묶어 ‘프랑스 6인조’라고 한다. 이들은 사티를 일종의 대부로 삼았다. 
(10) 레이몽드 리노시에, 프랑시스 풀랑크에게 보내는 1925년 7월 6일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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