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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든 지성 일깨운 저널리즘의 귀향
잠든 지성 일깨운 저널리즘의 귀향
  • 심두보
  • 승인 2016.09.30 09: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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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디플로 창간 8주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의 창간8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저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가 한국 사회와 저널리즘 산업에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로, 지성사적 측면에서의 의미입니다. 1950~60년대만 해도 유럽 여러 도시의 이미지들은 독립 직후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이상향이자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읽을거리와 오락거리가 충분치 않았고, 폭압적 학교구조 속에서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불안정한 후식민지 분단국가 청년들에게 유럽 문화는 퍽퍽한 현실로부터의 구원이자 도피처였습니다. 당시 청년들의 핫플레이스였던 무교동 일대의 음악감상실들이 ‘쎄시봉’, ‘드쉐네’, ‘쉘부르’로 명명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극적 근대성 모델은 박정희 정권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된 냉전체제 속 근대화 드라이브와 함께 사라집니다. 즉, 미국이라는 헤게모니 국가가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압도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원조경제는 한국경제의 젖줄이었고, 1960년대 텔레비전의 등장 이후 부족한 제작기술은 미국 프로그램에 의해 메꿔졌습니다. 필자도 그러하지만 어느덧 대학의 교원은 미국이 아닌 타 외국박사는 자리 잡기 어려운 직업군이 됐습니다. 정치경제적 대미 종속의 심화는 문화와 지식의 대미 종속으로 귀결된 것입니다.
‘세계화’라는 가치중립적 단어는 사실 ‘미국화’를 내포합니다. 세계화 구조 속에서 1990년대 후반 이후 한류가 등장했고, 동아시아 미디어 신흥국들이 출현했지만 전세계 지식과 정보의 헤게모니는 미국이라는 단일 헤게모니 국가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Nature)>가 선정한 세계 대학순위에서 상위 10위 대학 중 6개 대학이 미국에 있습니다. 뉴스코퍼레이션, 디즈니 등 세계 6대 미디어 재벌은 미국에 근거지를 두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발달에 따라 풀뿌리 미디어 혁명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세계의 많은 정보는 미국 미디어에 의해 걸러져서 다시 나머지 국가들로 확산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8년 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의 출범과 함께 이제 한국의 독자들은 한국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유럽의 시각 뿐 아니라 제3세계의 여러 관점과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덕택에 한국사회에 진정한 세계화와 초국가적 소통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둘째로, 저널리즘 산업 측면에서의 의미입니다. 미국의 언론업계에는 전통적으로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 있습니다. 아마 이는 모든 언론사에 해당하는 비유일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눈치 채셨겠지만, 성(聖)은 언론보도와 편집 업무를, 속(俗)은 광고와 경영업무를 가리킵니다. 이 둘은 언론사의 성장과 발전에 필수적인 양대 축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일반기업과 달리 언론이라는 사회적 속성상 그 권력관계에 있어서 성은 속의 상위 개념으로 언론사 내에 오랫동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관계 상의 위상이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언론학자들은 이런 변화의 시점을 대략 1970년대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언론사 설립의 자유화 및 상업화의 진척과 함께, 또는 1990년대 후반 IMF 사태 이후 본격 전개된 신자유주의적 시장화와 함께 변화됐다는 분석이 많습니다. 언론이 정치권력에 머리를 조아리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 권력에도 굴종하는 사태로 나아간 것입니다. 주지하다시피, 1990년대 초 동아일보 김중배 선언, 1990년대 중반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보급소 직원 간에 벌어진 살해사건, 1990년대 후반 ‘자전거 신문’ 논쟁, 그리고 2014년 세월호사건 보도과정 중 불거진 ‘기레기’ 조롱 등과 같은 것들이 언론의 위기를 상징하고 웅변합니다. 

하지만 언론사 경영이 풍요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디지털혁명은 신문과 잡지 등 전통 언론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으며, 독자는 이제 전통 매체가 아닌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SNS를 통해 뉴스를 접합니다. 이러한 언론환경의 맥락 속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특히 두드러집니다. 수많은 닭과 구별되는 고상한 한 마리 학인 것입니다. 매체운영 경비의 90% 이상을 구독료로 유지하는, 용감한 언론사 경영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어떤 형태의 권력도 아닌 깨어있는 시민과 함께 합니다. 이를 통해 정의의 목소리를 내는 독립언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의 창간 8주년을 다시 한 번 축하드리며, 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글·심두보
한국소통학회 회장,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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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두보
심두보 한국소통학회 회장, 성신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