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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거부'(great refusal)를 꿈꾸면서
'위대한 거부'(great refusal)를 꿈꾸면서
  • 성일권 | 발행인
  • 승인 2008.10.29 14: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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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미 FRB가 사회주의자로 회귀하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첫 호에 보내 주신 독자 분들의 관심과 반응은 실로 살가웠습니다. 뜻 밖의 사실은 직업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주요 독자층이 될 것이라는 편집진의 기대와는 달리, 일상의 삶에서 기쁨과 애환을 함께 나누는 '정겨운 이웃'들이 발음하기도 꽤나 힘들었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많이 구독해 주셨습니다.
 전북 고창에서 수박과 땅콩 농사를 짓는다는 A씨를 비롯하여, 강원도 삼척의 고교 1년생인 L군, S전자 휴대폰을 조립하는 노동자 K씨, K 대학교의 사서 S씨, 금융 회사의 펀드 매니저 K씨,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중인 N씨,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인 주부 H씨......, 물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명망가들도 독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저희로서는 모든 독자 분들이 더할 수 없이 소중한 분들이지요.
 그러나 특히 저희를 감동시키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가능성을 확인시킨 독자 분들은 우리의 이웃들이었습니다. 어떤 독자는 첫 호를 오래도록 깨끗하게 보관하겠다면서 한 부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고, 또 어떤 독자는 마치 이 잡듯이 오탈자들을 찾아 보내, 저희 편집위원들을 전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독자는 우편 발송 때까지 신문을 기다릴 수 없다면서 직접 사무실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독자 분들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국내 신문에서는 접할 수 없는 각종 세계적 이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뉴욕발 금융 위기가 국내 경제를 초토화시키는 초국적 세계화 시대에 현대 자본주의 체제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선 정치 경제 분석만으로는 부족하고, 광범위하고 종합적인 분석이 필요하지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미덕은 정치 경제 분석외에 사회학적, 문화적, 예술적 분석을 도입하고, 각 이슈별로 국제 역학 관계와 국가간 관계, 관료주의와 의식 구조, 문화패턴 등에 관해 심도 있게 분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발전과 변혁은 결코 직업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회 명망가의 '헌신'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실천에 의해 가능합니다. 그러한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비판 의식인 것입니다. 비판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단호한 부정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이것을 '위대한 거부(great refusal)'라고 불렀지요. 대중 매체는 종종 바로 그러한 비판의 정신, 즉 위대한 거부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곤 합니다. 철학의 나라인 독일에서 국민들이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한 것이나, 사유의 나라인 프랑스에서 나치를 추종하는 비시 괴뢰 정부에 파리 시민들이 현혹된 것도 비판 의식의 마비에서 기인합니다. 저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땅에서도 독재 시대와 심지어 민주화 이후의 정권에서도 얼마나 많은 허구들이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혔는지 잘 아실 겁니다. 심지어 최초의 민주 정권이라고 자칭하던 김대중 정권 때에는 지식인의 정의까지 바뀌어, 무조건 돈만 잘 버는 기술자가 '신지식인'으로 추앙받는 해괴한 일들이 빚어졌습니다. 그래서 돈 버는 기술이 뛰어난 코미디언과 자장면 배달원이 '신지식인'으로 공인받고, 이에 질세라 대학의 상아탑까지 교수들은 돈벌이 프로젝트에 매달리고, 학생들은 소위 취업용 스펙 만들기에 나서는 등 기능인 양성소로 전락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교수와 학생은 지식을 논하고, 비판의식을 함양하는 사제 관계가 아니라, 기술과 기능을 전수하는 도제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지금, 세계화의 거센 파고 속에 세계 각국이 공동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터에  국내에서는 어이없게도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책임 논쟁이 한창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모든 것이 돈의 가치로 환산되는 물신화 속에 진정으로 찾아야할 것은 비합리성과 허위의식을 걷어내고, 사회 변혁의 본질과 방향성을 찾아내는 인문학적 비판의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판 의식이 거세당한 사회는 '창살 없는 감옥'이며, '우리 없는 동물농장' 같은 죽은 사회일 것입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는 모든 불합리와 부당함을 부정하는 독자 분들의 '위대한 거부'가 우리 사회의 자율성과 자발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반순응주의(non-conformisme)의 올곧은 자세로, 한결같은 길을 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
  sungilkwon@ilemon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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