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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쓸모
페미니즘의 쓸모
  • 연혜원
  • 승인 2016.10.31 1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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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직장에서 내 상사는 “너는 참 남자처럼 일을 해서 좋다”고 칭찬 하곤 했다. 한국사회에서 이 말이 무슨 문제가 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당사자인 나조차 그러지 못했으니까. 일터에서 남성은 언제나 긍정성의 상징이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규정하는 ‘여성성’은 사회생활에 적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저 칭찬을 해석해보면 여성인 내가 일을 잘한 건 내가 여성성을 억누르는 노력을 통해 남성성을 키웠거나, 혹은 다른 여성들보다 여성성이 덜해서 남성성이 상대적으로 잘 발현됐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자처럼’ 일한다는 칭찬은 내가 일터에서 한 사람의 개인이기 보다 ‘여성’으로 인지돼 왔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여성 이전에 개인으로 먼저 인지됐다면, ‘남자처럼’ 일했다고 칭찬받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일하는 내내 나는 언제나 여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존재했다. 
 
페미니즘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젠더 평등이다. 진정한 젠더 평등은 젠더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젠더로부터 자유로워졌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젠더로 평가받기 이전에 한 사람의 개인으로 인정받고 존재할 수 있다. 이건 한쪽 성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Sex)’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워지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주어진 ‘성별(Gender)’로부터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과 ‘성별’을 혼동하고 있다. <가부장제의 창조>에서 거다 러너는 대표적인 ‘성’과 ‘성별’의 혼동의 예를 보여준다. 여성이 임신할 수 있는 건 ‘성’ 때문이지만, 여성이 아이를 기르는 일을 도맡는 것은 ‘성별’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성이 임신하고 모유를 수유하기 때문에 아이를 도맡아 기르도록 ‘결정’돼 있다고 믿는다. 
 
‘모성’ 역시 가부장제로부터 생겨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근거로 꺼내면서까지 우리가 젠더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할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 실존하는 고통이며 변화된 요구다. 지금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사회에서 젠더라는 틀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 고통은 그 자체로 생생한 것이다. 대다수가 여성이 양육을 도맡아 하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단 한 명이라도 그것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 고통은 거짓이 아니다. 그래서 고통의 이유를 들어보지 못할 이유가 없으며, 그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다. 퀴어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가 자신의 성과 성별이 일치한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자신은 아니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 겪는 고통 역시 공론화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젠더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고통에 귀 기울이는 일이며, 동시에 그러한 고통들로부터 해방되는 길을 함께 모색하는 일이다.
 
누군가 반문할 수 있다. 왜 타자의 고통을 들어주고 나눠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당신은 당신의 고통이 묵인되어도 괜찮은가. 세상엔 수많은 종류의 고통이 존재하지만, 한 고통의 존재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투쟁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고통들 간의 우열과 위계도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불평등에 따라 특정 고통이 인정받고 해결 되는 속도가 달라진다. 자본가들이 겪는 여러 자본 규제로 인한 고통은 신자유주의의 범람과 함께 빠르게 해소되고 있다. 이에 비해 중산층 이하가 겪게 되는 계층으로 인한 고통이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은 자본가들이 겪는 고통보다 더디게 해소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젠더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남성도 겪는 고통이기에(남성만 겪는 고통으로 오독하지 않길 바란다.) 사회적으로 활발히 공론화 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젠더는 어떤가. 대다수의 남성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젠더로 인한 고통은 한국사회에서 고통으로 인정받는 것조차 어렵다. 한국사회에서는 스스로를 진보라고 자청하는 남성들조차도 페미니즘에 대해선 여전히 비판적이기만 한, 보수적인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이 같은 현실은 한국사회가 젠더라는 틀을 깨기에 얼마나 척박한 환경인지 잘 보여준다. 몇 달 전 <시사IN>이 기획기사로 ‘분노한 남자들’을 실은 이후 스스로를 ‘좌파’라고 규정하는 다수의 남성들로부터 힐난과 질타를 받으며 구독중지 운동까지 벌어졌던 일이 대표적이다. 
 
젠더는 계층 혹은 계급과 다른 틀이 아니다. 계층과 계급이 역사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틀이듯, 젠더 역시 역사적으로 구성된 하나의 ‘이데올로기’다. ‘흙수저’와 같이 계층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은 들어달라고 호소하면서 젠더 불평등으로 인한 고통은 묵인하는 태도는 아이러니하다. 젠더로 인해 고통 받는 집단이 여성과 퀴어일 것이라고만 생각한다면 틀렸다. 수많은 남성들 역시 젠더로 인해 고통 받고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젠더 차별의 표상인 가부장제의 희생양은 여성뿐만이 아니다. 남성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다. 다만 그 피해의 얼굴이 다를 뿐이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가해지는 대표적인 비난이 ‘남성역차별론’이다. 남성이 역차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연일 가부장제 속에서 남성들이 겪게 되는 고통의 가해자를 여성으로 지목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여성의 적이 남성이 아니고, 퀴어의 적이 이성애자가 아닌 젠더 차별 사회이듯이, 남성이 남성으로서 겪는 고통도 여성이 아닌 젠더라는 틀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남성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도 페미니즘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이제는 남성들의 성찰을 듣고 싶다. 젠더라는 틀로 인해 남성들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살고 있는지. 남성들이 젠더라는 틀로 인해 받아야만 했던 고통에 대해 좀 더 허심탄회해졌으면 한다. 우리는 모두 피해자다.  


글·연혜원
자유로워지기 위해 사회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입니다.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게 꿈입니다. 바람이 있다면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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