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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앙, 세대유감
진앙, 세대유감
  • 최서은
  • 승인 2016.10.31 16: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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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세대는 그마다 ‘집단기억’이 존재한다. 각 세대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은 공유되고, 세월의 흐름을 타 다음 세대로 이전된다. 압축성장한 ‘근대화 한국’이라는 아버지 하에 자식세대들은 경험으로 인한 저마다의 아픔을 각각 치유해가는 중이다. 때로는 낙관으로, 때로는 비장함으로, 때로는 무기력으로, 때로는 반감으로 각 세대는 대응한다. 복잡다단한, 그래서 얽히고설킨 세대의 단면은 케이크 조각 자르듯 단절될 수 없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그리고 땅을 파고드는 나무의 뿌리처럼 참 깊은 그것은, 대한민국의 지형 속 가장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세대의 단면을 볼 수가 있다면, ‘집단기억’이 가장 강렬한 세대는 누구일까. 2014년 4월, 전 연령은 ‘세월호’ 앞에 가슴을 저몄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선과 고통의 정도는 각 세대마다 달랐다. 누군가의 부모, 누군가의 자식, 누군가의 친구의 마음으로. 우리는 그렇게 가슴 속에 아픔의 나무들을 한 그루씩 심었다. 그리고 꼭 3년을 채워가는 지금, 기적이 일어났었다면 대학에 입학했었을 아이들. 그 아이들은 자신의 다음 세대에 어떠한 상흔을 남겨주고 갔는가. 

  남겨진 자들의 상흔은 생각보다 깊은 진원을 가졌다. 한 달 전, 경주의 약 9도가량 지진 여파에 야간 자율학습을 하던 학생들은 불안에 떨었다. 아이들은 세월호 언니들, 오빠들이 전해준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대한 트라우마를 즉각적으로 상기시켰다. 그래서 몸이 반응했고, 움직였다. 그리고 행동했다. 생사는 스스로가 지킬 수밖에 없다는 뼈저린 교훈은 아이들이 아픔을 묻어놓은 심장까지 흔들었다. “조용히 자습하라”라는 말도 따를 수 없었다. 재해는 자연현상이었지만, 어른들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아이들이 가진 ‘집단기억’의 역린을 건드렸다. 

  ‘세월호 세대’가 공유하는 집단기억은, 한 마디로 ‘불신’이다. ‘집단기억’에 세대가 대응하고 의식을 만들어갈 때쯤, ‘세월호 사건’은 소식이 점점 줄어들었다. 어른들은 원칙과 당위성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혹자는 마치 의식적으로 트라우마를 단절시키고 싶은 사람처럼 망각의 늪으로 스스로를 이끌었다. 하지만 ‘기억’은 몸과 마음 그리고 의식으로까지 파고드는 것이다. 방방 곳곳 지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 ‘세월호 세대’는 ‘불신’의 에너지가 진앙으로까지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앙은 분출됐고, 땅은 흔들렸다.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고, 인터넷 사이트에는 각 고등학교의 소식들이 올라왔다. 무책임한 어른들의 순간순간들은 전파를 타고 전해졌다. ‘세월호 세대’의 강력한 에너지 앞에 어른들은 또 다시 고개를 숙였다. 국가의 무능에, 어른들의 무감각에 세대는 다시금 분열했고, 흔들리는 땅 위 지금 그들은 ‘등’을 지고 있다. 

 어른세대도 그들 나름의 진앙의 깊이가 있다. 성수대교붕괴, 삼풍백화점붕괴, 대구지하철폭파사고, ‘잊혀 지기 힘든’ 아픔의 나무들 또한 품고 산다. 하지만 ‘세월호 세대’의 진앙의 끝엔 기성세대의 죄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죄업은 다음세대에 ‘갚지 못할 빚’으로 남겨졌다. 수전노로 전락한 기업윤리, 전원구조 오보를 반복하는 핑퐁저널리즘, 우왕좌왕 실전에 무능한 해경, 관료주의에 빠진 공무원들, 그리고 그 위의 무능한 리더십. 아이들이 배워온 어른들의 ‘찬란한 기적’의 역사는 그 빛 속에 잔혹한 진실을 감추고 있었다. 진실을 가렸던 시간은 참 길었지만, 그 민낯이 드러나기에는 며칠이 걸리지 않았다. 

 그 ‘민낯’과 업보에 대해 우리는 지금 충분히 아파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단순히, 지진 앞에서의 매뉴얼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 온 ‘못난 어른’ 상(像)에 지금 얼마만큼의 책임을 지고 있는지. 여진과, 원자력발전소와 같은 위험 변수에 대해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할 것인지. 그리고 본질적으로 남겨진 ‘세월호 세대’ 아이들의 ‘집단기억’에 어른으로서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물론 ‘우리네’만이 혼자 갈 수 있는 길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누군가의 부모, 혹은 누군가의 어른으로 거듭날 것이기 때문에. 또한 물은 멈추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뿌리가 깊어지면 그 본질은 잘 드러나지 않기에. 그렇기에 우리가 ‘세월호 세대’와 함께 갈 수 있는 길은 몇 해 남지 않았다. 아직 잊히기에는 되돌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세대가 세대로 잊히고 세대 위에 세대로 덮일 수는 없다. 연대, 담론화, 거창한 단어가 아니어도 될 것이다. 다시 본질로 가면 된다. ‘기억’을 치유하는 것은 사실 새로운 기억은 아닐 것이다. ‘집단기억’을 꺼내놓고 대화를 하는 것, 거기서부터 시작이다. 대화가 단절되고 있다할지라도 멈춰선 안 될 것이다. 누군가는 지속적으로 말을 걸어와야 한다. 오늘도 남겨진 이들의 균열과 아픔, 진앙을 극복할 수 있는 세대간의 ‘꽃길’을 위해 세대유감.  


글·최서은
순간적 섬광을 글로 잡아두고자 하는 젊은이. 빠른 사회 속, 느리게 생각하며 사유의 습관을 잃지 않고자 하는 20대. 가끔 가슴에 있는 조국을 향한 슬픔과 노여움을 꺼내보는 대한민국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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