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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박정희의 딸이다.”
“아! 나는 박정희의 딸이다.”
  • 송윤아
  • 승인 2016.12.02 14: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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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란 말을 유행시킨 역사학자다. 그는 사도세자를 죽게 한 노론이 저 말을 듣고 벌벌 떨었다고 말한다. 그의 글에서 정조는 노론을 향한 복수극을 벌이는 임금이었다. 그러나, 이는 오독이다. 정조가 하고자 한 말의 맥락은 달랐다. “불령한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사도세자를 드높이려 한다면 엄벌하겠다는 것이었다. 정조가 효장세자를 이어받는 게 영조의 유언이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연산군처럼 사적인 복수에 집착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여 국정을 운영할 줄 알았다. 
 
이덕일은 차라리 박근혜를 주제로 글을 썼어야 했다. “아! 나는 아버지의 딸이다.” 어색하지 않다. 복수극은 정조보다 박근혜에게 더 어울린다. 후보 시절부터 공사구별 능력이 부족하기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공식석상에서 박정희란 세 글자를 내뱉지 못하고 아버지라 불렀다. 박정희가 공인이며 집권기의 공과(功過)에 논란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치 않았다. “우리 아버지”니까. 
 
국정운영은 사사로웠다. 박근혜 취임 이후 그의 곁에는 박정희를 드높이려는 모리배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출세했다. 안동 유생 이승원이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정조에게 ‘썩은 쥐새끼’란 소리를 들으며 사형당한 사실과 대비된다. 안동은 이 일로 현(縣)으로 강등되기까지 했다. 그런데 구미시엔 박정희 조례에 박정희 탄신 TF까지 생겼다. 이게 박근혜의 공사관(公私觀)이다. 박근혜의 공사관이 무엇으로 귀결됐는지 우리는 잘 안다. 바로 최순실 게이트다. 공사구별 능력이 부족한 탓에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걸 넘어 친구와 공유했다. ‘정유라 승마공주 프로젝트’는 사유화한 공권력의 민낯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정유라와 관련한 복잡한 사실관계가 지시하는 명제는 복잡하지 않다. 공권력이 정유라라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쓰였다는 것, 즉 공익을 위해 시민이 위임한 권력이 사익을 추구하는 데 쓰였다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예견된 참사였다. 박근혜의 개인적 무능과 공사구별 능력의 부족은 기록적인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여당, 특히 친박은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밀었다. 새누리당은 박근혜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국정농단에 동조했다. 법치를 구현해야 할 검찰과 권력을 견제해야 할 언론은 감시견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개였다. 그 결과 공권력의 사유화는 민주적으로 통제되지도, 견제 받지도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대통령(군주)과 의회(귀족)를 견제해야 할 한 축인 시민(인민)의 힘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정치의 세계가 권력을 획득하고 이용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사실은 마키아벨리 이후 근대 정치사상의 핵심이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권력‧이익을 좇는 개인이 공익에 헌신하도록 하려면 군주와 귀족, 그리고 인민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 방어할 수 있는 공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집단의 견제와 갈등이 공동체의 이익을 가져온다는 이유에서다.
 
한국은 어떤가. 시민은 루소의 말처럼 “투표할 때만 주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노예로 돌아”간다. 투표할 때도 완벽한 주인은 아니다. 소선거구제와 단순다수제가 민의를 왜곡하고 대표성을 잠식한 탓이다. 투표 이후에는 시민이 선출된 권력을 견제할 수단이 없다. 직접민주주의의 3대 요소인 국민투표제‧국민발안제‧국민소환제가 없다. 검열과 명예훼손의 남발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한다. 집시법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훼손한다. 시민에겐 제도 정치에 참여할 수단도 없다. 시민의 힘이 약하니 대통령과 의회가 경제권력‧검찰‧언론‧관료와 기득권 동맹을 구성하여 사익을 추구할 수 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시민의 힘을 약화하는 것은 한국의 대의민주주의다. 대의민주주의는 시민의 직접참여를 제한하기 위해 고안된 정체였다. 대의제를 고안한 제임스 매디슨은 그래야 파벌의 해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벌은 공동체의 공익에 반하는 열정과 이해관계로 뭉치고 움직이는 집단이다. 그는 다수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는 걸 우려했다. 대의제가 방책이었다. 선출된 대표가 토론과 심의를 통해 시민과 자국의 이익을 분별해 공익을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대의제는 다수 파벌은 막았다. 하지만 소수 파벌을 막지 못했다. 한국은 소수가 횡행하는 사회다. 기득권 동맹이라는 소수 파벌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조건이었다. 막연하게 대통령과 의회가 시민의 뜻을 헤아려주길 바라고, 언론이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길 바라고, 검찰과 사법부가 공정한 판단을 내려주길 바란다고 변화가 찾아오지는 않는다. 문제는 공권력을 사유화하는 소수의 전제다. 시민이 대통령과 의회를, 나아가 기득권 동맹을 통제할 힘을 가져야 한다.
 
대안은 많다. 첫째, 선출된 권력의 대표성과 책임성, 그리고 민의에 대한 반응성을 높이는 선거제도를 도입한다. 독일식 정당명부비례대표제나 결선투표제 도입이 좋은 방법이다. 둘째, 시민의 참여를 활성화할 환경을 조성한다. 직접민주주의 3대 요소를 도입하고 표현의 자유와 집회 및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면 된다. 참여 예산제 등 시민의 참여를 제도화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정치공학적 셈법의 답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동안 무시된 대안들이다. 셈법을 다시 세워야 한다.
 
공권력이 사유화한 공동체는 쇠퇴했다. 조선이 그랬다. 정조는 공과 사의 분별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문제가 있었다. 르네상스는 정조 카리스마의 결과였다. 그는 공(公)을 구현하는 시스템을 다시 세우지 못했다. 결과는 세도정치였다. 세도가는 공권력을 사유화했다. 삼정의 문란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조선은 제국주의 침략에 무력했다. 역사의 교훈이다.  
 
 
글·송윤아
국사와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정치적 삶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라 믿고 글을 쓰려고 한다. “글을 더 잘 쓰기 위해 블로그(blog.naver.com/nanachu2591)에 잡글을 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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