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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아담 스미스가 개 같은 세상을 찬미한다는 오해
[안치용의 프롬나드] 아담 스미스가 개 같은 세상을 찬미한다는 오해
  • 안치용 기자
  • 승인 2017.02.05 2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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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아담 스미스가 개 같은 세상을 찬미한다는 오해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우리가 상상하는 공정한 방관자가 바라보는 것처럼 바라보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아담 스미스의 ‘공정한 방관자’는 이 책의 핵심 개념이다. 공정한 방관자(또는 관찰자)의 시인(是認)과 동감(同感)이 인간에게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는, 즉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한다는 설명이다.

생전에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표현을 자신의 묘비명(墓碑銘)에 넣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란 책에 애착을 가졌다. 실제로 그의 묘비명엔 “<도덕감정론>의 저자”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그러나 묘비명엔 <도덕감정론>과 함께 <국부론>이 포함되어,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소망과 달리 후대에 <국부론>의 저자로 전해진다.

만일 (공정한) 방관자의 시인과 동감이 스미스에게 적용되었다면, 그 시인과 동감은 스미스 본인의 소망과는 달랐던 셈이다. 무덤 속에서 스미스가 문제를 제기하는 광경이 떠오른다.

관찰자의 시인과 동감, 그리고 본인의 소망 간의 이러한 간극이 말하자면 아담 스미스 철학을 설명할 때 등장하는 ‘아담 스미스 문제’로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아담 스미스 문제’를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사회를 추동하는 핵심 에너지원이 ‘동감’이냐, ‘이익’이냐 하는 의견의 충돌이다. ‘아담 스미스 문제’는 아담 스미스가 (무덤 속에서) 문제라고 생각할 법한 것과는 다른 맥락에 위치한다. (무덤 속에서) 자신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후에) 자신에 대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 사이의 상충이 일어난다.

아담 스미스 자신의 문제이든, 아담 스미스에 대한 문제이든, 아담 스미스의 문제는 인간이 직면하는 보편적 문제구조이다. 인간은 스스로 문제를 출제하고, 문제를 풀고,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고, 더러 문제를 (의식하지만) 외면하고 살아간다. 스미스 식으로 말해 인간이 ‘공정한 방관자’를 말 그대로 옆에 두고 살아가기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자신의 안과 밖에 두루 존재하는 방관자의 시야에 지배받는 인간과 달리, 개는 다른 시야에 지배받지 않고 역으로 자신의 시야를 배타적으로 지배한다. 개에게는 객관적으로 자신을 관찰할 또 다른 자아가 상정되지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보다 개가 언필칭 더 주체적인 생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개의 주체성을 비근하게 체감하는 사례로 공에 대한 개의 집착을 들 수 있다. 공!

나의 개 스콜에게 삶이란, 먹고 자고 공을 찾으러 다니는 것으로 요약된다. 사진에서 새로 산 공을 앞쪽 왼발(왼손인가?)로 꾹 누르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비인간적 주체성의 전형을 목격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물질만능의 시장주의 세상은 우리에게 종종 스콜이 발현하는 것과 같은 비인간적 주체성을 요청한다. 직립을 포기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무덤 속의 아담 스미스가 펄쩍 뛸 노릇이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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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
안치용 기자 carmine.draco@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