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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빠는 영주, 뱀파이어
피를 빠는 영주, 뱀파이어
  • 위베르 프로롱고 언론인
  • 승인 2017.03.0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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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파이어>, 1893년 - 에드바르 뭉크

 더 이상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앤 라이스는 단호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변했다. 그는 75세에 <레스타 왕자>(1)와 <레스타 왕자와 아탈란티스 왕국>(프랑스에서는 2017년 10월 출간 예정)으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흡혈귀일 레스타를 부활시켰다. 루이라는 인물이 기자에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라이스가 딸을 백혈병으로 잃는 끔찍한 슬픔을 겪은 후 집필한 작품으로, 1978년 출간돼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라이스의 저서는 모두 합쳐 전 세계에서 1억만 부 이상 판매됐다. 

라이스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보조 인물이었던 레스타 드 리옹쿠르에게 집중했다. 고통 받고 폭력적이고 매혹적인 양성 캐릭터, 레스타는 현재 14편까지 출간된 연작소설의 주인공이다. 레스타는 두려운 만큼 매혹적인 존재다. 뱀파이어의 희생자들이 화자가 되는 스토커의 <드라큘라>와는 달리, 뱀파이어인 레스타가 스스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1789년 뱀파이어의 눈에 띄어 뱀파이어가 된 레스타는 자신의 욕망과 윤리적인 문제, 인간에 대한 존중과 본능을 어떻게 절충할지 끊임없이 고심한다.
세르보크로아티아어에서 파생된 단어 ‘뱀파이어’는 1721년 독일어에 등장했다. 익히 알고 있듯, ‘밤에 무덤에서 뛰어나와 살아있는 인간의 피를 빠는 상상 속 존재’(2)를 의미한다. 희생자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흡혈귀는 고대 신화에도 등장한다. 여기에, 15세기 왈라키아 공국의 가시 공작 블라드 드라큘이나 처녀의 피로 젊음을 되찾으려 했던 16세기 헝가리 백작 부인 에르제베트 바토리 등 실존인물의 흉악한 이야기가 더해진다. 뱀파이어를 다룬 최초의 소설은, 1748년 하인리히 본 오센펠더의 <데어 팜피어>이며, 이어 1797년 괴테가 <코린트의 신부>라는 시를 썼다. 그리고 한동안 (잠시 친분이 있던) 바이런 경의 작품으로 알려졌던 존 윌리엄 폴리도리의 <뱀파이어>가 1819년 출간됐다. 1872년 아일랜드 작가 셰리든 레 파뉴는 소설 <카르밀라>에서 대담하게 여성 뱀파이어를 등장시켰고, ‘뱀파이어 사냥꾼’을 탄생시킨다.
19세기에는 폐허가 된 성의 지하실에 열광하고 윤리적 비난을 받는 충동을 드러내는 ‘고딕’ 열풍을 타고 등장한 ‘검은 낭만주의’가 암암리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바로 앤 래드클리프(<우돌포의 비밀>, 1794)나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수사>, 1796, 앙토냉 아르토 번역)의 세계다. 기술 발전이 가져온 근대성과 실패한 혁명의 시대는 테오필 고티에의 <사랑에 빠진 죽은 여인>(1836)에서부터 알렉상드르 뒤마의 <창백한 여인>(1849)을 거쳐 신문 연재소설 작가 폴 페발의 <뱀파이어 도시>(1875)에 이르기까지 섹시한 ‘언데드(죽지 못한 자)’의 등장으로 점철됐다. 뒤이어 아일랜드 작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1897년 출간돼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고, 이 작품으로 굳어진 뱀파이어의 특성은 약 한 세기에 걸쳐 유지됐다. 
뱀파이어는 사악하다. 순도 높은 사악함이다. 영화가 뱀파이어를 소재로 삼았을 때에도 그 모습은 그대로였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찬양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는 훨씬 더 공포스러웠다. 토드 브라우닝의 매우 정적인 ‘드라큘라’(1931)에서 벨라 루고시는 창백하고 송곳니가 삐쭉 튀어나오고 강한 악센트를 쓰며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기괴한 뱀파이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 대부분은 이 이미지를 각자의 방식으로 응용했다. 어떤 작품에선 뱀파이어는 거울에 비치지 않고, 다른 작품에서는 햇빛, 또는 십자가, 마늘 앞에서 움츠러든다. 타고난 유혹에 더해 그는 최면술을 활용해 사람들을 자신에게 유인하고, 피를 빨아 먹고, 그들도 결국 뱀파이어로 변하게 만든다. 뱀파이어 이면에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제어해야 하는 다른 세계와 탈선적 성생활에 대한 끌림이 숨어있다. 
1958년부터 드라큘라 영화 여러 편에 출연한 영국 배우 크리스토퍼 리는 드라큘라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기존 뱀파이어 신화의 한계를 보여준다. 에두아르 몰리나로의 ‘드라큘라 아버지와 아들’(1976)에서 그는 이전에 자신이 보여준 드라큘라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그러나 힘겹게 패러디한다. 테런스 피셔 감독 덕분에 가장 멋진 장르 영화를 제작했던 해머 필름 프로덕션은 에로티즘을 섞은 아류작을 연이어 발표하며 자신들이 정립한 ‘드라큘라’라는 인물의 특징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반드시 물리쳐야 할 무심한 괴물의 이미지는 극도로 손상됐다.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뱀파이어의 이미지
 
시대가 변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어 냉전이 종식되면서 절대 악인 캐릭터는 점차 사라졌다. 종교의 비중이 축소돼 십자가 등 신앙의 힘이 담긴 상징물로 괴물을 퇴치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인격화되기 전에 공포심을 구현한다. 어떤 작가들에게 뱀파이어는 저주보다는 질병의 산물이 됐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존재지만, 피해자이기도 하다.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1954) 속 주인공은 인간을 뱀파이어로 변하게 만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병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청정한’ 존재로 남기 위한 자신의 저항이 과연 무슨 의미인지 자문한다. 스토커의 소설을 지극히 충실하게 살린 ‘드라큘라’(1992)에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뱀파이어의 러브스토리를 그리면서 그를 인간적인 존재로 그려낸다.
앤 라이스의 등장으로 전래동화도 선악 이원론도 사라진다. 인간적 본성과 사람을 죽여야 사는 상황 가운데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고통 받는 관능적인 인물, 레스타가 등장했다. 1994년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 톰 크루즈가 배역을 맡은 레스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문한다. 라이스의 뱀파이어는 우리가 사는 세계 속 영주이자 그들이 지닌 힘의 희생자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투쟁한다. 라이스는 뱀파이어의 키스를 창조적 재능으로, 희생자의 저주를 선택된 이에게 주어진 은혜로 그린다. 그는 뱀파이어 원형을 버리고 자신의 소설(3)을 통해 초기 창조자가 등장하는 하나의 신화를 창조하고 뱀파이어의 기원을 찾아 고대 이집트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록스타가 돼 자신의 처지를 세상에 알리는 레스타의 모습을 보면 뱀파이어 후예들은 제대로 현대적 삶에 동화됐다. 
스테퍼니 마이어도 그 흐름을 좇아 연작소설 <트와일라잇>(2005~2008)에서 라이스보다 확연히 더 중성적이고 청교도적인 인물을,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거부보다는 욕망의 대상으로 만든다. 문학성은 떨어지지만,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뱀파이어는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선망의 대상이 된다. 침울하고 치명적인 요소들은 거의 사라지고 아름다움이 첫 번째 특징이 됐다. 에로스가 타나토스를 이긴 셈이다.
그 사이, 1980년대 판타지 문학에서 도시를 배경으로 경이로운 신화가 펼쳐지는 ‘어번 판타지’라는 하위 장르가 나타났다. 1989년 <피의 쾌락>(제뤼 출판사, 원제 ‘Sunglasses After Dark’)을 출간한 낸시 콜린스가 아마도 어번 판타지에 뱀파이어를 최초로 도입한 작가일 것이다. 이제 뱀파이어는 귀족적 성채를 버리고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있다. 수지 맥키 샤나스의 <평범한 뱀파이어>(리브르 드 포슈 출판사, 1990, 원제 ‘The Vampire Tapestry’)에서는 교수, 잔 페브르 다르시에의 <레드 플라멩코>(포켓 출판사, 1993)에서는 댄서, 레이 가턴의 <뱀파이어 매춘부>(포켓 출판사, 1993, 원제 ‘Lot Lizards’)에서는 매춘부로 등장한다. 뱀파이어는 도처에 있고 무리 지어 돌아다닌다. 외모가 아름다울 수도 있지만 추할 수도 있고, 젊을 수도 있지만 늙을 수도 있으며 부유할 수도 있지만 가난할 수도 있다. 조엘 슈마허의 영화 ‘로스트 보이’(1987)는 “뱀파이어로 사는 건 멋진 일”이라는 광고 카피까지 앞세웠다. 
미국 TV드라마 시리즈 ‘버피와 뱀파이어’(1997~2003)는 이런 트렌드 속에서 가장 대중적인 인물을 만들었다. 버피는 세계를 악마로부터 지킬 수 있는 초자연적 힘을 지닌 고등학생이다. 악마 같은 에인절(그를 주인공으로 한 스핀 오프 시리즈도 있다)을 비롯해 그가 무찔러야 할 다양한 유형의 적들은 자신의 처지와 인간성에 대한 갈망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시즌이 지날수록 이 판타지물은 이름만큼 사악하지는 않은 ‘괴물’에 맞서면서 성격을 형성하는 주인공이 소녀에서 여인이 돼가는 성장기가 됐다. 
‘버피’는 여주인공이 등장하고 로맨스와 호러를 조합해 뱀파이어를 때로는 이상적인 연인으로 그린 소설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자신이 뱀파이어든 뱀파이어 헌터이든 여주인공은 위험한 유혹자를 만나 그에게 주어진 임무와 쫓아야 하는 이에 대한 호감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래서 2000년 시작된 로렐 K. 해밀턴의 연작소설 <애니타 블레이크>와 샬레인 해리스의 연작소설 <남부 뱀파이어 미스테리(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2005~2014)는 여성과 호러물 팬을 주요 독자로 삼았다. 앨런 볼은 <남부 뱀파이어 미스터리>를 엽기적인 TV드라마 시리즈 ‘트루 블러드’(2008~2014)로 각색했다. 그의 창의력은 여러 괴기적인 개체(신체변형자, 늑대인간)로 둘러싸인 뱀파이어를 강력한 에로티시즘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이는 ‘비트릿(‘Biting literature’의 약자, 직역하면 ‘물어뜯는 문학’으로 어번 판타지와 칙릿의 조합)의 탄생을 의미한다. 프랑스 출판사 브라젤론은 ‘비트릿’을 상표로 등록하며 장르 문학을 전문 분야로 특화했다.
파리에서 물의 요정과 어울리는 뱀파이어를 그린 마리 파블렌코의 <마르잔>(포켓 출판사)이나 잔아 데바의 <레리티에르>(악튀에스에프 출판사)는 프랑스에서 비트릿의 토양을 일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작품도 등장했다. 콜롬비아 TV드라마 시리즈 ‘치카 밤피로’는 텔레노벨라와 공포 영화의 중간 형태를 취한다. 여기에는 연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욕망과 싸우는 소녀가 등장한다. 이 시리즈가 성공을 거두면서 소설 10여 편, 음반, 보드게임, 전 세계에서 공연된 뮤지컬 ‘밤피 투어’ 등 다양한 관련 문화상품이 파생됐다. 
드라큘라 시절에 뱀파이어의 이타성은 자신의 파멸로 이어졌다. 오늘날 그는 권리의 수호자로 간주되며 바로 그 이타성이 그를 관능적으로 만든다. 혼혈의 문제가 점점 대두되는 세상에서 대중문화 아이콘의 변화는 분명 의미심장한 일이다.  
 
 
글·위베르 프로롱고Hubert Prolongeau
언론인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앤 라이스, <레스타 왕자>, Michel Lafon, Paris, 2016, 528쪽 
(2) 국립맥락어휘자료원(www.cnrtl.fr)
(3) 전체 연작소설은 <뱀파이어 연대기>와 <새로운 뱀파이어 이야기> 2개의 시리즈로 구성됐다. <뱀파이어와의 인터뷰>는 포켓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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