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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러다이트 운동
21세기 러다이트 운동
  • 박종원 ‘일' 이달의 칼럼 당선
  • 승인 2017.03.02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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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소주로 뭉쳐 매일을 보냈던 역전의 용사들이 모였다. 보고 싶었던 얼굴들. 제각기 흩어져 살풀이를 벌이다가 이곳에 와 다시들 엉겼다. 대기업에 들어간 사람이 둘, 게임회사에 취직한 선배 하나, 프리랜서 영화장이 하나, 그리고 계약직 사원까지 총 다섯. 유치한 농담들을 주고받으며 밤은 깊어갔다. 한데 재미가 없었다. 예전에는 너의 같잖은 짝사랑, 과대망상적 장래희망, 아는 척 으스대던 시사토론도 전부 추억이었지만,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은 한숨을 내쉰다. 이제 어른이 됐나보다, 라며 우리는 나른한 분위기를 결론지었다. 슬펐다. 서로 비교할만한 내용이 없었던 탓이다. 

각자가 가진 삶의 질료들이 비슷한 층위에서 버무려진 탓에 별 차이 없는 인생들이 됐다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하지만 그런 부류의 일이 아니었다. 진짜 비극은, 모였던 사람들이 전혀 ‘늙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늙지 못한다는 것, 그것은 비극이다. 늙지 못함은 개인이 내면화된 ‘서사’를 가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서사를 가지지 못했음은 개인이 ‘존재탐구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존재탐구의 시간을 가지지 못했음은 ‘존재탐구 바깥의 시간’이 존재탐구의 시간을 잠식했다는 뜻이다. 현대인 대다수는 이 패턴에 익숙해진 것으로 보인다. 존재탐구 바깥의 시간은 무엇인가? ‘노동(일)의 시간’이다. 
놀랍게도 -어쩌면 전혀 놀랍지 않게도- 현대인은 ‘일하는 시간’을 위해 ‘일하지 않는 시간’을 사용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①일하는 시간의 연장(야근 등으로) ②일하는 시간을 위한 시간, 즉 업무를 위해 무엇인가 배우거나 누군가를 만나는 시간 ③일하는 시간으로 인해 소진된 육체와 정신을 회복하는 시간(지인을 만나든 숙면을 취하든). 이런 모습들로 일하지 않는 시간은, 일하는 시간의 ‘노예’가 됐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계급사회가 아님에도 ‘수드라’적 인생들을 자처하는 중이다.
분류한 유형들은, 통시적으로 봤을 때 지극히 ‘소비적’이다.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또한 공시적으로도 타인과 유사할 뿐 개별적이지 못하다. 즉 ‘당신스러움’ 따위는 없다. 더 끔찍한 사실이 있다. 일하는 현대인의 대부분은 ‘정년’을 향해 달려간다. 이 시기를 맞게 되면 자연스레 현대인은 나이든 사람이 돼 있다. 피할 수 없는 풍화를 온몸으로 겪는다. 여기부터가 비극의 시작이다. 이 비극은 느닷없이 닥치는 재앙이 아니다. 보장된 정년이란 사회가 용인한 육체의 정력적 상태를 의미한다. 나이가 들어 직업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비극이 비로소 당신의 옆에 서 있음을 알게 된다.
미리 자신을 위한 준비를 해두지 못하게 되면, 나이가 든 당신은 치킨집 사장이 된다. 이것도 여유 있는 사람들의 경우다. 다행히 당신이 정규직으로 퇴직해 치킨집을 차릴 정도의 자금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개업한 치킨집의 3년 내 생존율은 10%를 밑돈다. 췌장암 환자의 생존율과 비슷한 수준이다. 설령 치킨집이 성공한다한들 유의미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정년 후의 인생이 고작 연명을 위해 남겨진 시간이라는 뜻이므로.
자본주의 세상에서 능력 없는 인간은 도태된다. 사람들은 고독하게 숨진다. 단순히 개인적 문제로만 끝나지도 않는다. ‘나이 먹고 능력까지 없는 사람’이라면, 곧 ‘더미’로 취급당한다. 소외된 이들은 분노해 세대갈등, 계층갈등을 야기하고 극단주의적 성향을 띤다. 인자한 노인의 풍모를 벗어던지고 태극기집회와 같은 신질서를 창출한다. 개별자가 아닌 무리로 운집한다. 주구장창 일만 하는 현대인이 미래사회의 ‘더미 속의 객체’, ‘무리 중의 하나’로 전락할 가능성은 상당히 농후하며, 그것이 당신이 아닐 거라는 예단은 미신에 가깝다. 위의 ①,②,③처럼 살고 있다면, 연명하는 인간이 될 확률은 엄연히 존재한다.
마르크스는 신이 된 자본에 항거하기 위해 다수를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부르짖었다. 그러나 철학자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초래됐다. 수 세기에 걸친 체제 간 격화 속에서, 노동은 불현듯 사람들의 마음 속 깊숙이 자리매김했다. 설전을 벌이던 사람들은 노동 그 자체가 신격화·내면화됐다는 사실조차 모르며 일한다. 노동을 통해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려다 180도 반대상황이 연출돼버렸다. 미필적 재앙이다. 덕분에 우리는 늙지 못하게 됐다. 생존의 시간이 길어졌으되, 개별인간이 우울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노인’이 되자. 
자신만의 서사를 품는 인간이 돼야한다. 그러려면 일하는 시간과 일하지 않는 시간 간의 주종관계적인 고리를 깨야 한다. 나는 이것을 ‘21세기 러다이트 운동’이라 명명한다. 신세기의 노동현실 박살내기. 이러한 의식의 전복을 시작했을 때, 현대인은 한평생에 걸친 ‘늙기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 있다. 노동(일)에 대한 가치관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넘어서야 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은 전적으로 당신의 시간이다. 육체와 영혼이 건강해야 일하지 않는 시간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다. 일하는 시간이란, 육체와 영혼이 현실에서 버틸 수 있도록 하는 시간이다. 이것이 곧 일하는 시간의 존재이유다. 사회의 구성원이 돼 동시대를 구축하는 나름의 역할만 수행하면, 일하는 시간은 그 기능을 다한 셈이다. 
일하는 시간을 일하지 않는 시간의 하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일하지 않는 시간의 기초사용법은 다음과 같다. 맹목적으로 타인과의 관계만을 신경 쓰지 말고, 부질없는 타인의 시선에 위축되지 않을 것. 덧붙여 당신이 타인(객체)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아직 당도하지 않은 세상에서 더미로 분류되는 일은 보고 싶지 않다. 삶에 질질 끌리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끌어당기는 인간으로 서 있기를 바란다. 온전히 늙어 매력적인 고유명사가 되는 방법은, 자신을 겨냥한 삶에서부터 뻗어나간다.   


글·박종원
3년차 고시원 총무. 늘 사람들의 민낯과 마주하는 중이다. 신체는 꽁꽁 묶여있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자유롭다. 그렇지만 이제 곧 이곳을 나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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