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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필 3년, 소설의 영혼을 잃다
대필 3년, 소설의 영혼을 잃다
  • 임영태
  • 승인 2010.03.05 18: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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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사와 신문사로부터 취재 요청을 받은 적이 몇 번 있다. 한 번도 응하지 않았다. 내가 거절하면 그쪽에서는 ‘고발적 의도’로 접근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냥 일반인이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해 소개하려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내가 거절한 건 단지 번거로워서였다. 나는 생활을 위해 일하고 있을 뿐이다. 대필자에 초점을 맞춰 이색 직업의 이면과 애환을 소개하는 것이든, 의뢰인에 주목해 고백 욕구와 자기 PR의 세태를 조명하는 것이든, 생계수단일 뿐인 나의 일에 대해 대중매체가 갖는 호기심이 번거로웠다.
문자가 왔다. <르몽드>라는 프랑스 일간지 이름이 찍혀 있다. 근래 제법 큰 문학상 하나를 타긴 했지만 어느새 프랑스 유력 일간지에서까지 관심을 갖고 있나?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르몽드> 자매 잡지의 한국판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예 선생님이 하시는 대필에 대해서… 쩝!
전화 통화 후, 편집장이라는 분께서 전자우편을 보내셨다.

거절하지 못한 어떤 원고 청탁
“제 기획 의도는 ‘직업의 세계’류가 아닙니다. 타인의 이름으로 타인의 삶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나온 글은 윤리적·미학적으로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같은 사유가 담긴 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대필작가의 활동은 ‘생계’ 이외에 어떤 동기나 가치도 없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제출돼도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거절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대필하는 글에 대한 윤리적·미학적 사유…, 생계 이외에 어떤 동기나 가치도 없는 것일까?
그 대답으로 이 글을 쓴다.

▲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고스트 라이터>(2010) 포스터

 대필 3년째에 접어들던 어느 날 소설 하나를 시작했다. 최근에 출간된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이라는 소설이다. 소설이 잘 풀리지 않아 한동안 애먹었다. 당시 소설이 안 써지던 상황을 스스로 정리해본 것이 있다. 아래의 글이다.
소설을 쓴다면 주제가 있어야 한다. 주제는 갈등에서 나온다. 욕망하는 자아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세계와의 대립. 갈등은 늘 거기에서 시작되고, 그 갈등을 어떤 양상으로 다루는지가 주제가 된다. 갈등은 치명적일수록 좋다. 19세기 작가들의 갈등은 치명적이었다. 해결되지 않은 신의 문제 하나만으로도 치명적인 갈등이 가능했다. 21세기에는 무엇이 치명적인가?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무엇을 쓰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 문장이 자꾸 더듬거린다. 좀처럼 글이 나아가지 않는다. 더 문제는 문장 자체다.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머릿속에 있는 그림들이 문장으로 전혀 구현되지 않는다. 하나의 공간이 있으면, 거기에는 소리와 빛깔과 냄새가 있고, 그 모든 것을 둘러싼 그 공간만의 기운이 있다. 어느 특정한 시공간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사태는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자기만의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유일무이하다. 다른 어느 시공간에도 있지 않았고, 오직 거기에서만 명멸하는 우주적 한순간이다. 한 시공간은 한 세계다.
이처럼 우주적 시점에서 유일무이한 것을 감지하는 것이 예술가 고유의 미적 감각이라면, 이제 그것은 손끝의 스킬을 통해 남도 알아보고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인 문법으로 번역된다. 작가는 문장으로, 음악가는 음표로, 화가는 색채와 선으로, 춤꾼은 몸짓으로 그것을 표현한다. 느끼기만 하고 표현하지 못할 때 살리에리의 비극이 온다.
지금, 나의 문장은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밋밋하고 건조하다. 머리를 아무리 쥐어짜도 따분하기 그지없는 문장만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소설을 오래 쉬어 그런 줄 알았다. 무엇이든 안 쓰면 무뎌지게 마련이다. 시동 거는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무뎌져서 벼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무엇인가 꽉 막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섬세한 묘사가 필요한 대목이 머릿속에 그려졌을 때, 그것을 쓰게 될 일이 기대에 찬 설렘으로 오는 게 아니라 미리부터 힘이 부쳐 막막하다. 써야 할 장면이 엄두가 안 나 자꾸 그 묘사를 피하려고 한다.
아름답고도 치밀한 문장이 머릿속에 준비돼 있는데 그 길을 돌아가려 한다. 쉬운 길을 찾으려 한다. 세상에! 나는 퍼뜩 알아차렸다.
이건 무협소설에서 고수가 어느 순간 무공을 상실하는 그런 것이다. 팔과 다리는 그대로 있으나 예전의 팔다리가 아니다. 걷는 일과 숟가락 드는 일이나 할 수 있을 뿐, 그런 팔다리로는 동네 건달 하나도 상대하지 못한다. 한 번의 도약으로 지붕을 타 오르고, 가벼운 손놀림만으로 상대의 급소를 제압하던 무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헛껍데기 고수.
아찔하다. 작가가 문장을 무서워하다니. 그것처럼 치명적인 함정이 어디에 있는가. 대필 때문인가?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기는 했다. 한동안 출판사에서 일을 받아 어린이용 세계 명작들의 번역서를 리라이팅해주는 일을 했다. 치밀하고 섬세한 문장이 필요하지 않아 쉽게 글을 썼다. 출판사에서 먼저 쉽고 단순하게 읽히는 글을 요구했다.

 

석 달 만에 문장 미학 상실
 동시라고 쉬운 시가 아니듯, 어린이용 도서라고 문장을 대충 쓰는 건 아니다. 대충과 제대로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다. 어린이가 읽을 글에 깊고 섬세한 문장이 나올 수 없다. 나올 필요도 없다.
요컨대 어린이용 도서 리라이팅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결코 써볼 일이 없다.
“그녀가 여전히 불량스럽고, 여전히 제법 매력적이었고, 그런데 자신은 매우 의연해 있다는 것에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한번 자신의 의연함을 확인하고 나자 그는 갑자기 그녀가 가엾어 보이기조차 했다.
오늘 너를 연민해주마.
자신이 턱없이 우월한 승리감에 취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녀의 전 인격이 그 불량스러움 안에 있다는 것을, 그녀의 육체는 살덩어리이면서 하나의 생생한 자아라는 것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다.”(졸저 <달빛이 있었다> 중에서)
복잡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담은 문장, 마음의 심층에서 이율배반적으로 갈라지는 심리들을 어린이 글에서는 써볼 일이 없다. 단어의 선택이나 표현의 섬세함에서 제약이 있고, 문장구조를 최고의 미학적 수준으로 가져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리라이팅 아르바이트는 고작 석 달이었다. 그러나 그 작업을 마치고 나자 소설을 쓰기 힘들었다. 문장은 물론이고 사유하는 정신 자체가 녹슬어버린 것 같았다. 미학적 엄밀성도 사라져버렸다. ‘그는 싫었다’ 이렇게 쓰고 나면, 이 문장이 맛있는지 밋밋한지 나 자신부터 알 수 없었다.
대필하는 일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어른들의 글 아닌가. 게다가 누구보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 아닌가.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 정서, 관계, 심리가 펼쳐진다.
또한 나는 성실한 대필자이고자 했다. 돈을 받고 써주는 남의 글이지만, 아니 돈을 받는 일이기에 의뢰인의 글을 써주는 데 마음을 다하려고 했다. 한 번도 대충 쓴 적이 없다. 의뢰인의 삶을 만나고 표현하는 데 성실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니 문장이 녹슬 일도, 표현의 감을 잃어버릴 일도, 사유하는 태도가 사라질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설이 안 나가는 것이다. 어찌어찌 한 대목을 쓰고 나면 하나도 마음에 드는 문장이 없었고, 몰입이 필요하겠다 싶은 대목은 머리로 떠올릴 때부터 지레 질려버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쉬운 길만 찾고 있었다. 머리에 우주가 소용돌이친들 그것이 음표로 나와주지 않으면 죽은 음악가다. 문장이 안 되면 죽은 작가다.
두려웠다. 이게 일시적 현상인지, 과연 회복될 수 있는 것인지. 두려워서 차마 술도 마실 수 없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명징하게 들여다보아야 했다. 내 글을 쓰는 게 아닐 뿐 성실하게 대필을 해왔기에 문장이나 통찰력을 잃어버릴 일은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당혹스러워 밤이 깊도록 어수선한 상념에 빠져 있었다. 문득문득 불길했다. 미칠 것 같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졸음이 밀려왔다. 날은 어두워졌지만 이른 저녁이었다. 생각을 너무 집중해 진이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조바심을 안은 채 간이침대로 가 누웠다. 그리고, 눕는 순간 갑자기 알아차렸다.
그랬구나!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두운 실내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역시 대필이 나를 갉아먹은 것이었다.
대필에 늘 성실했고 결코 대충 쓴 적은 없지만, 그러나 내가 피 말리는 몰입으로 대필에 열중했던가? 아니다! 글을 쓰면서 대놓고 소홀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문장 하나가 마음에 안 들어 스무 번 백 번 고쳐본 적은 없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글이 아니지 않은가. 프로 글쟁이의 능숙함으로 적당한 문장을 풀어놓았을 뿐, 더 이상 없을 유일한 문장을 만나기 위해 몇 날 며칠 씨름한 적은, 당연히 없다.

성실한 대필, 전력투구는 못해
 그것이었다. 나는 성실한 대필자이기는 했겠지만, 문장 하나마다 전력투구하지는 않았다. 나를 위해 쓰는 글, 내 삶을 던지는 글이 아니어서였다. 일부러 소홀한 게 아니라 ‘남의 글’이라는 대필 자체의 조건에 의해 그렇다.
그리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 치열하게 쓰는 법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지난 3년 나는 나의 문장을 써보지 않았다. 지난 3년 스무 권 가까운 책을 썼지만, 거기 어디에 나의 고통, 욕망, 숨 막히는 간절함이 스며 있을 것인가. 성실했지만 그래봐야 대필이었고, 그 무난한 글쓰기 습성에 갇혀 나는 영혼을 싣는 글쓰기를 잊어버렸다. 타고난 글재주로 흠 없는 문장이나 늘어놓았을 뿐이다.
나의 칼은 녹슬 대로 녹슬어버렸다.
어찌해야 하는가?
조바심을 버려야 한다. 나의 글에는 계약일자가 없다. 열망이 내 문장을 일으켜세울 때까지 기다리자. 정말 쓰고 싶은 이야기를 만나면, 꼭 써야만 할 이야기가 다가오면, 그 치열한 열망이 나의 문장을 되살릴 것이다. 문장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쓰고 싶은 이야기를 기다려야 한다. 절실함을 만나야 한다. 백척간두에 서야 한다. 그러면 문장은 스스로 일어날 것이다.

글•임영태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뒤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4년 장편 <우리는 사람이 아니었어>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고 지금까지 10권의 책을 출간했다. 2010년 장편 <아홉 번째 집 두 번째 대문>으로 제1회 중앙장편문학상을 받았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성공한 기업인들의 자서전과 선거 출마자들의 정치 에세이, 기업 사사 등을 대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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