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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이후 풍경, 출간 이유를 보여주다
출간 이후 풍경, 출간 이유를 보여주다
  • 하승우
  • 승인 2010.03.05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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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2만2천원

 한국은 강자들의 천국이다. 하나씩 따져봐도 힘이 센데, 그들은 자기들끼리 결혼해서 한 가족으로 뭉쳐 산다. 삼성그룹만 하더라도 CJ그룹·새한그룹·한솔그룹·신세계그룹과 한 가족이고, 사돈들까지 따지면 대상그룹·LG그룹 같은 기업과 중앙일보사·동아일보사 같은 언론사가 엮인다. 이런 왕족들이 평범한 사람 위에 군림하며 지배권을 행사한다.
 왕족이 고용한 기사들과 함께 왕족을 보호하는 세력은 바로 한국 정부다. 왕족에 문제가 생기면 은밀히 뒷수습을 하고, 노동자가 파업을 벌이면 즉각 병력을 투입해서 왕족의 재산을 보호한다. 때로는 시민의 세금으로 왕족의 사업을 돕기도 한다. 그 대가는 쏠쏠하다. 가끔은 왕족의 혼맥에 끼어들 기회를 잡기도 하고 필요할 때 뒷돈을 두둑이 챙길 수도 있으니. 사과 상자가 사과만이 아니라 현금을 전달한다는 사실을 초등학생도 알 만큼 우리 사회에서 재벌과 정부의 결탁은 상식이 되었다.

▲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사회평론 펴냄
 이런 왕족들과 정부가 한국을 말 그대로 말아먹고 있다. 2007년 10월 삼성그룹의 비리를 폭로해서 주목을 받았던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는 그들이 어떻게 이 사회를 갉아먹고 있는지를 상세하게 들려준다.
 
 양심과 냉소
 부패가 상식이 되어버린 사회에서 ‘고백’은 힘을 얻기 어렵다. 고발이라고 하지 않고 고백이라고 한 이유는 한 기업의 불의(不義)를 조사한 기록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서 경험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성그룹에 관한 얘기만이 아니라 양심선언을 하고 난 뒤에 겪었던 맘고생도 책 곳곳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그도 왕족을 수호하는 기사 중 한 명이었으니 맘고생은 그의 말처럼 “진정한 벗”을 얻기 위한 속죄의 과정이라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불의를 드러낸 사람들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데 익숙하다. 너무 오랫동안 불의에 시달렸고 그것에 맞섰던 사람들의 비참한 최후를 봐왔기에 사람들은 함께 맞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고발한 양심에 냉소를 보낸다. 일상의 사소한 악에 대해서는 흥분하는 사람들이 왕족이나 정부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닫는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못 본 척해야 하는데 그 얘기를 자꾸 꺼내니 속마음을 들킨 듯 불편해서 냉소를 보낸다.
 냉소한다고 사실이 거짓일 수는 없다. 직접 경험한 얘기를 고백하고 있기에 두꺼운 부피지만 책은 술술 잘 읽힌다. 그러나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황태자의 경영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쌈짓돈 쓰듯 그룹의 자금에 손을 대는 왕족 이야기부터, 삼성그룹을 실제로 움직인다는 구조조정본부가 저질러온 많은 부정들, 그와 결탁한 권력의 부패에 관한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이라는 주어로 이런 엄청난 얘기가 쏟아져나오니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만일 고발을 원한다면 <삼성을 생각한다>보다 조금 더 두꺼운, 대안연대회의가 기획하고 여러 학자들이 함께 쓴 <한국 사회, 삼성을 묻는다>(후마니타스·2008)를 읽으면 좋다. 두 권의 책을 함께 읽으면 대한민국 경제를 책임진다는 ‘삼성 신화’의 실제 모습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고발의 표현을 빌리면, “삼성 재벌의 경제력이 증대할수록 삼성 재벌의 불법·탈법 행위들은 더욱더 대담해지게 된 것이다”. 냉소하는 우리가 그들을 그토록 오만하게 만든 셈이다.
 
 용서와 약속
 2008년 이건희 회장은 유죄를 선고받자 수천억 원의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고 경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009년 말부터 경영 복귀 얘기가 언론을 타고 솔솔 나오더니 이제는 본격화되었다. 어쩌면 이런 수순은 미리 정해진 과정일 것이다. 그동안 국가는 이건희 회장의 죄를 사면해서 그런 분위기를 정당화하지 않았는가.
 어떤 이는 그동안 잠깐 물러나 반성도 하고 재산의 일부도 기금으로 내놓았으니 이제 국가 경제를 위해 용서하자고 얘기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용철씨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엄청난 착각이다. 삼성화재가 비자금으로 빼돌린 보험금은 고객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범죄과 연관된 사람들은 스톡옵션으로 막대한 이익까지 얻었다. 2009년 1월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는 비리와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거나 승진했다고 한다.

▲ <한겨레21> 류우종 기자
 이 책이 나온 뒤에도 놀라운 일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언론사들은 출판사 광고를 거부했고, 이 책을 다룬 서평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심지어는 책을 홍보하던 지하철 광고도 갑자기 사라졌고, <경향신문>이 삼성과의 광고 때문에 이 책을 다룬 김상봉 교수의 칼럼을 거부하기도 했다. 삼성 장학생들이 지식사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기획 보도를 내보낸 <경향신문>인지라 그 충격은 더한 듯싶다(그 이후 <경향신문>은 기자총회를 거쳐 이 일을 사과하며 독립언론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어쨌거나 삼성이 진보적 신문이나 시민단체조차도 광고와 후원으로 통제하려 한다는 지적은 아직 한 치도 고쳐지지 않은 셈이다. 심지어 양심선언을 도왔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신부님들은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안식년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잠깐 수세에 몰려 수치스럽게도 평민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왕족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있다. 반성을 않는데 무엇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용서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굴욕이다. 용서는 동등한 사람들이 맺는 약속인데, 지금 우리는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이 태안 앞바다에 쏟은 기름을 전 국민이 모여서 닦았건만, 그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언제나 이런 식이다.
 지난 2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이건희가 범죄를 저질러 올림픽 정신을 훼손했다며 공개 문책하고 5년 동안 분과위원회에 참여할 권리를 정지시켰다. 범죄자를 사면한 정부와 그를 징계한 IOC, 누가 더 상식적인가?
 
 재벌과 착한 기업
 어떤 이는 왜 삼성만 괴롭히냐고 묻겠지만 제일 나쁜 놈부터 매를 맞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삼성이 독박을 써야 할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재벌가들이 삼성과 다르게 그룹을 운영한다고 믿을 근거는 하나도 없다. 현대자동차의 정몽구 회장은 배임과 횡령 혐의로,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은 분식회계와 부당내부거래 혐의로, 두산그룹의 박용성 회장은 분식회계와 횡렴 혐의로, 성원그룹의 전윤수 회장은 분식회계와 사기대출 혐의로,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은 보복폭행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범죄자들이 기업을 운영하고 국가는 이를 사면하고 시민은 묵인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러면 왕족과 그들에 빌붙은 기사들이 떠나면 우리의 재벌이 착한 기업으로 변신할까? 광고 없이도 베스트셀러인 이 책이 장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마음이 무거운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만 떠나면 재벌이 갑자기 착한 기업으로 변할 거라 믿는 건 엘리트의 ‘순진함’ 또는 ‘영악함’이다. 세상의 악은 몇몇 사람의 시나리오로 제거될 수 없다. 근본적인 악은 그것과 연결된 우리 일상을 바꿀 때에만 서서히 제거될 수 있다. 재벌 중심으로 짜인 경제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승자가 모든 걸 앗아가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변신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으로 살고 싶다면 지금 그 악과 맞서야 한다.       

 

글•하승우
지행네트워크 연구활동가,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세계를 뒤흔든 상호부조론>(그린비·2006), <참여를 넘어서는 직접행동>(한양대학교출판부·2007)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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