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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개화, 가까운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안치용의 프롬나드]개화, 가까운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
  • 안치용 기자
  • 승인 2017.04.08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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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개화, 가까운 곳에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는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설야’에서 김광균이 눈내림에 부여한 이미지이다. 일제시대 막바지의 강설의 이미지는 멀고도 가깝다. 이제 눈 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화창한 봄날, 중국발 미세먼지를 뚫고 벚꽃이 만개하다.

 

완연한 봄날이니 머언 곳에 여인은 옷 벗는 일을 끝내었을까. 김광균이 “소리”를 말하였지만, 그 소리는 “그림”으로 현현하여, 80년쯤 옷 벗는 일을 반복하여서 마침내 개화를 가까운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하여야 할까. 그러나 르네 마그리트가 자신의 작품에 파이프를 그려놓고 그림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적었듯, 가까운 곳에서 여인이 옷 벗는 소리와 같은 개화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어서 보지 말고 들어야 한다.

 

개화는 화사한 그림이 아니라 처절한 소리다. 만일 개화가 단지 그림에 불과하였다면, 우리는 꽃을 꽃이라 부르지 않고 꽃을 식물의 생식기라고 불러야 했을 터이다. 집 앞에 위치한 공원 입구의 친숙한 벚꽃나무에서 꽃이 만발하였을 때, 벚꽃 나무를 가득 채우며 등장한 무수한 생식기들을 보며 “울긋불긋 온통 발정 났네!”라고 말해야 한다면 인간에게 언어가 주어진 게 저주스러울지 모른다.

 

인간이란 포유류는 제 각각 대체로 한 개의 생식기를 몸에 부착하고 살지만, 특별한 계기에서만 그것을 드러낼 뿐 대부분 부착 사실을 은닉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생식기에 꽃이란 자랑스러운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이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개화가 없고 단지 발정이 있을 뿐이며 낙화가 없고 욕망만 존재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발정이 아니라 개화가 강림하며 생식기 대신 꽃이 몸에 자리하는 드문 순간이 있다. 은닉된 생식기를 기민하게 드러내어 1 대 1로 접합하는 교환가치의 실현이 아니라, 서로의 개화를 존중하며 감응하는 진공 같은 청취의 순간.

 

낙화는, 그렇담 여인의 옷 입는 소리라고 해볼까. 가까운 곳에서 일까, 먼 곳에서 일까. 여인의 옷 입는 소리는 여인의 옷 벗는 소리와 비슷한 듯 다르다. 입는 소리와 벗는 소리 중에서 낙화와 적합한 소리는 입는 소리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나의 개가, 혹은 정확하게 나의 개의 비뇨기가 그 밑동을 사랑하는 벚꽃 나무가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온통 치장하여 눈이 아프도록 아름답다. 김광균 시인에서 벗어나서 생각하면 나에겐 벚나무의 꽃핌이 여인의 웃음소리 같다. 목젖을 드러내며 전하는 화사한 울림이 잎갈나무 꼭대기에 연이어 동그란 파동을 씌우는, 살다가 잊고 사는 그런 웃음소리.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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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
안치용 기자 carmine.draco@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