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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벚꽃이 다 진 봄밤의 재회
[안치용의 프롬나드]벚꽃이 다 진 봄밤의 재회
  • 안치용 기자
  • 승인 2017.04.16 0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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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벚꽃이 다 진 봄밤의 재회

 

찰나의 꿈이었나 보다. 꽃잎 떨궈 보낸 벚나무, 하얗다기보다는 그저 벚꽃 빛깔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화사한 색을 벗어버리고 갓 돋아난 여린 잎들의 연녹색으로 새롭게 단장한다. 요란한 사랑은 사위를 떠들썩하게 들었다 놓았지만, 그 사랑이 끝나고 긴 이별이 시작한다. 봄밤에 잠 못 이룰 이유는 세상에 하도 많다.

 

모든 만남은 이별을 예정하지만, 당연한 얘기로 모든 이별에 재회가 기약되지는 않는다. 나이테를 하나 늘리고 나의 개의 배뇨를 밑동으로 350일쯤 견디면 벚나무 세상과 또 사랑에 빠질 텐데, 그 사랑의 시작을 재회로 불러야 할까. 나이가 들면 때로 재회가 사랑보다 더 사랑 같다. 그러나 나이가 적당하게 들면 피해내지 못할 사랑이란 없다고 믿게 된다. 믿음. 우리는 믿음 없는 세월보다는 사랑 없는 세월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그를 다시 만났다. 벚꽃이 다 지고 털갈이하는 어린 개처럼 볼품없어진 벚나무의 주변 벤치에 앉아있는 그를 보았다. 스콜의 성화에 못 이겨 나선 봄밤의 산책에서, 지난해 늦은 가을쯤에 본 그를 벚나무 상심이 크나클 이 밤에 보았다. 꽃향기처럼 소주 향이 은은하게 떠돌고, 그가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는 듯 편안하게 벤치에 앉아 있었다.

 

예전처럼 말쑥한 차림이었다. 푸른 계통의 세련된 운동복을 입었고, 귀가 보이게 머리를 잘라 머리모양으로는 얼핏 군인 같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로는 결코 군인일 수가 없었고, 빨간색 줄로 단정하게 묶은 운동화를 신었다. 내가 가끔 가는 편의점의 것이 분명한 검은 비닐이 병 두 개를 싸안은 채 발 밑에 놓여 있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비닐 안에 든 것은 소주병이었고, 뚜껑이 빨간색인 것으로 보아 25도짜리 '클래식'임이 분명했다.

 

다행히 병나발을 불지는 않고, 일회용 컵에다 얌전하게 소주를 따라 마셨다. 스콜과 걸리버에게 “기다려”라고 말한 뒤 나는 근처의 하체단련 운동기구에 올라가 다리를 교차시키면서 그의 동정을 살폈다. 종류 미상의 과자를 안주로 씹어 넘기는 소리가 한 방에 있는 듯 잘 들렸다. 공원에는 그와 나, 나의 개 두 마리까지, 확인된 포유류만으로는 모두 네 생명체가 침묵하며 존재했다. 계속해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어서 그가 나를 의식하였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설레는 재회는 아니지만 나는 그를 다시 만났다. 재회를 확신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예기치 않은 시점에 마주쳐 약간은 기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벚나무가 슬퍼 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가 밤새 벚나무 앞에서 소주를 마시며 벤치를 지키는 모습을 상상하니, 봄밤이 나쁘지 않았다. 스콜은 귀가에 앞서 마지막으로 비뇨기를 벚나무 아래쪽에 갖다 대며 마지막 오줌을 짜냈다. 저만치 나의 개의 배뇨와 상관없는 자리에 위치한 진달래가 느릿느릿 꽃을 피운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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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 기자
안치용 기자 carmine.draco@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