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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엔 ‘금융 빅브러더’, 한국엔 ‘인터넷실명제’
프랑스엔 ‘금융 빅브러더’, 한국엔 ‘인터넷실명제’
  • 안영춘
  • 승인 2010.04.08 15:27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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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디플로> 4월호를 소개합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안영춘입니다.

발행인과 저는 지난달 프랑스 파리에 업무차 다녀왔습니다. 고졸한 분위기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본사 건물은, 문 앞에 붙은 명함 절반 너비의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곳이 전세계 73개국에서 발행되는 좌파 지성지의 본산이라는 걸 알아채기 어려웠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좌파 경제 주간지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대안 경제’라는 뜻) 건물 앞에는 그 작은 안내판마저 없어서, 그 앞에서도 길을 물어야 했습니다. 내로라하는 한국 언론사 건물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좌파 언론인들도 건물을 닮아 있었습니다. <르 디플로>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와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아탁)의 명예의장 베르나르 카상,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편집장 귀용 뒤발은 하나같이 겸손하면서도 격의 없고 웅숭깊어 보였습니다. 한국 언론인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를 보며, <경계도시2>의 군상을 떠올리는 일은 민망했습니다. 타자를 대하는 한국 진보 진영 인사의 이미지는 과잉과 결핍의 분열적 병립이었습니다. (이번에 발간한 4월호에는 이택광 경희대 교수가 얼마 전 끝난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과 최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2>, 그리고 개봉 대신 공동체 상영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는 쌍용차 투쟁 다큐멘터리 영화 <당신과 나의 전쟁>에서 ‘발언권이 없는 외부자’를 눈밝게 찾아낸 글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귀국 뒤 4월호를 만들면서 저는 파리에서 신사유람단의 낭만적 일원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4월호에 재현된 프랑스는 제가 본 프랑스와 상반됐고, 한국과 많이 겹치거나, 설령 다른 것이 있더라도 기껏 두 나라 간 역학의 위상차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4월호 1면 머리를 장식한 ‘새로운 빅브러더의 출현’에는 국가와 은행에 의해 조지 오웰의 <1984>로 끌려 들어가는 프랑스의 현주소가 폭로되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인터넷실명제를 뼈대로 한 이른바 ‘최진실법’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파리에서 인터뷰한 베르나르 카상은 거침없이 “사르코지는 미쳤다”고 비난했고, 사르코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 “의아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1, 33면). 사르코지는 지난달 지방선거에서 참패했고, 한국의 지방선거는 오는 6월 2일이지요.

한국과 프랑스가 직접 대면하는 모습은 우화 속 한 장의 삽화 같았습니다. 옛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를 두고 지금 프랑스 정부는 “역사적 우연”이라고 언명하며 한국에 ‘영구 임대’의 ‘양보안’을 던졌고, 이에 감읍하는 한국 정부와 달리 시민사회는 “역사적 정의의 복원”을 외치며 ‘완전 반환’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32쪽).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이스라엘 앞에서 역학적으로 전복됩니다. 자국 외교관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린치를 당해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프랑스 정부(17쪽)와 일본의 독도 도발에 ‘조용한 대응’으로 일관하는 한국 정부는 어느 면에서 모두 ‘루저’인 것 같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발언의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지요.

전 지구적 경제위기는 프랑스에서 계급 간 대립을 예각화하는 대신 계급 내부의 파열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부유층 계급은 단결하고, 하층 계급은 위만 바라보며 분열합니다(10~11쪽). 계급은 도시를 둘러싸고 비대칭적 힘의 대립 관계에 놓이고, 도시는 갈수록 자본의 전유 공간이 되어갑니다(12~16쪽). 특히 신체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한국과 프랑스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낙태로 내몰고 낙태를 금지하는 역설 안에는 남성만의 성적 자유로 상징되는 지배질서가 숨어 있습니다(28∼29쪽). 약자가 공간에서, 그리고 자기 몸에서 소외·배제되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공통된 현상이며, 한국과 프랑스가 여러 면에서 많이 겹치는 것도 두 나라 모두 신자유주의 지배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섣부르게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요? 좌파는 풀뿌리 생활정치를 통해(22~24쪽), 소비자는 소비 중단을 통해(25쪽) 지배질서를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은 교과서 밖으로 걸어나올 수 있을까요? 베르나르 카상의 말은 희망의 단서로 들립니다. “약자들이여. 전 지구적으로 연대하라.”

안영춘 편집장 editor@ilemonde.com

<4월호 목차>

Spécial 1 세계의 거대 도시화
12 [장피에르 가르니에] 분리와 배제, 지구화된 도시의 삽질
13 [필리프 S. 골뤼브] 제국 식민지에서 내부 식민지로
14 [그자비에 몽테아르] 공산주의 유산 지우고 마천루 솟는 하노이
16 [뱅상 두메루] 이동의 자유 위해 주거권을 약탈하다  

 

Spécial 2 선거, 생활정치에 대한 질문
22 [서영표] 삶을 바꾸려 한 영국 신좌파 급진주의 실험의 교훈
24 [하승수] 어린이 눈높이에서 정치혁명이 나온다

Horizon 선제적 핵공격 전략 유지
6 [셀리그 해리슨] 매파의 협공, 오바마의 핵 딜레마

Dossier
8 [파트리크 하에니] 이슬람, 유럽을 떠도는 유령
10 [에리크 뒤팽] 실망과 배신 사이, 하위계급은 분열 중

3 [다니 로베르 뒤푸르] 탐욕을 감춘 현대예술의 도착증
4 [질 파바렐가리그] 국가와 은행의 불온한 결탁
5 [딘 베이커] 중국 미국채 보이콧, ‘황화론’은 없다
17 [알랭 그레시] 이스라엘의 능멸, 프랑스의 굴욕
18 [마크 바이스브로] 베네수엘라 경제위기, 미국의 백일몽
19 [모리스 르무안] 콜롬비아 미군기지, 중남미 멱통 노린다
20 [올리비에 자제크] ‘저 아래의 나라’ 호주, 모순의 지정학
25 [홍성태] 삼성을 생각하는 소비의 정치학- 나는 소비한다, 고로 투쟁한다
26 [선대인] 아파트 재앙은 오는가?
28 [양현아] 낙태를 줄이려거든 낙태를 허하라
29 [사빈 랑베르] ‘착한 여자’를 바라거든 낙태여성을 모욕하라?
30 [앙드레 시프랭] 독립 미디어와 출판을 사랑하는 바이킹의 후예
32 [원용진] 외규장각 약탈이 ‘역사적 우연’? 반환은 ‘역사적 필연’!
33 [인터뷰] 베르나르 카상 “사르코지 닮으려는 MB, 딱하다”
34 [리뷰] 어느 사회주의자의 기억 또는 망각?
35 [서평] 코끼리 눈에 비친 부조리 사회
36 [서평] 근대문학의 출구, 가라타니 고진
37 [이택광]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
38 [김형래] 평면 위에 펼쳐지는 3D 욕망사
39 [독자 에세이] 지구환경에 드리운 먹구름 


※ <르 디플로> 발행일과 관련해 독자분들이 혼선을 일으키실 수 있어서 참고 말씀드립니다. 

<르 디플로>는 매달 첫 번째 목요일(첫주가 짧을 경우 두 번째 목요일>에 인쇄에 들어갑니다. 출판계에서는 인쇄일을 발행일로 삼기도 하고, 인쇄일과 구분해 서점에 배포되는 날을 발행일로 표기하기도 합니다. 저희는 다음호 발행일을 예고할 때 그동안 인쇄일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서점에서 르 디플로를 찾으시는 분들이 인쇄일에 서점에 가셨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번호부터는 서점 배포일(서울 기준)을 기준으로 발행일을 예고합니다. 정기 독자 발송의 경우, 서점 배포 작업과 동시에 진행되지만 우체국이나 배송업체들의 주말 휴무로 실질적인 배송은 다음주 월요일부터 이뤄지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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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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