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안치용의 프롬나드]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안치용의 프롬나드]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 안치용
  • 승인 2017.06.07 0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비 개인 긴 둑에 풀빛이 짙은데   

님 보내는 남포에 슬픈 노래 흐르는구나

대동강물이야 어느 때나 마르리

이별의 눈물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여지네

 

한국인이 지은 한시 중에서 널리 애송되는 정지상의 송인[送人]이다. 그가 소년시절에 지었다고 이 한시는 명문으로 극찬을 받았다. 현대적 관점에서 시의 이미지가 평범하여 지금에서야 ‘극찬할 것까지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만, 보편적 공감의 영역을 일상에서 잘 찾아냈다 싶기도 하다. 그러나 소년시절에 지었다는 그 사실에 공감이 반감되는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랑에 나이가 있겠냐만, 그래도 이별엔 나이가 있지 않을까. 젊어서 하는 이별과, 그 많은 이별을 쌓아내고도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만 하는 늙어서의 이별이 같아 보이지 않는다. 유행가 가사에 흔히 나오듯 앞서의 모든 이별이 너를 만나기 위한 연습이었을 때와 이별 다음을 알 수 없는 그저 이별일 때는 다르지 않을까. 소년이 이별을 알까. 꼰대의 나이에 이르니 시를 읽고 나서의 소회가 조금은 달라진다.

 

이별은, 회자정리[會者定離]이지만 거자필반[去者必返]이 기약되지 않을 때 진짜 이별이다. 물리적 나이와 무관하게 더 이상 사랑이 적합하지 않은 시기가 도래하였음을 알게 될 때 하는, 말하자면 진짜 이별에는 대동강 물에 더할 눈물 같은 것도 없어지지 않을까. 돌아설 때 돌아설 줄 알며 멋진 이별멘트를 날릴 줄 아는 그런 이별은 이별이 아니다. 대체로 혐오와 후회, 안도와 미련이 교차하는, 서해의 밀물과 썰물처럼 지루하게 소모되는 과정이 이별이 아닐까.

 

고려가요의 이상곡[履霜曲]에서 그려내었듯, “비 오다가 개어 눈이 내린 날” 같은 게 이별의 풍경이다. “잠을 앗아간 내 님을 그리워하여 그렇게 무서운 길에 자러 오겠습니까?”고 묻기도 하는, “이렇게 저렇게 이렇게 저렇게 기약이 있겠습니까?”고 묻지만 “아소 임이시여, (임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기약(뿐)입니다”고 기약하는 이율배반의 감정이 이별이 아닐까 싶다. 

 

‘이상(履霜)’은 서리를 밟는다는 뜻. 서리를 밟게 되면 장차 단단한 얼음의 계절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으로 사용되었다는 게 ‘이상곡’에 관한 일반적 해석이다. 앞서의 이별 얘기를 마저 하면, 비 오다가 개어, 눈 내리고 얼음 어는 나날이 이어질 상황이 예견될 때가 이별의 순간이다. 그래서 남루하지만 결연한 게 이별이다. 하지만 결연함에서 어쩌면 불가능한 가능성의 개입까지는 배제할 수 없어 보이는 게, ‘이상곡’을 노래한 고려 시대 사람들은 “얼음 위에 댓잎 자리를 보아 임과 내가 함께 얼어 죽어도 좋으니 제발 밤만 새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 만전춘[滿殿春]이란 노래도 지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비가 제법 넉넉하게 오는 밤이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걸 지적하자면, 모든 비가 추적추적 내리지는 않는다. 다롱디우셔 마득사리 마득너즈세 너우지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

안치용
안치용 carmine.draco@gmail.com  다른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