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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기우제
피의 기우제
  • 장유리 | ‘피' 이달의 에세이 가작
  • 승인 2017.06.30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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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는 붉은색이지만 때때로 종종 짙은 초록색을 토하기도 한다. 심장은 무거운 돌로 변하고 지층은 시대의 흔적으로 점점 어둡게 변해버려 깨어지기 쉬운 점성을 가지게 된다. 심장이여. 물을 머금고 생을 토해내라. 비옥한 혈이여. 

 급히 편의점에 들어간다. 과자와 컵라면 코너를 지나 식염수와 휴지, 콘돔을 지난다. 스타킹 코너에 서면 포근하고 부드럽고 깨끗하다고 적혀진 생리대가 진열돼 있다. 소·중·대·팬티라이너까지. 오늘은 양이 적은 날이어서 소형을 집어 든다. 일회용 생리대에 딱딱하게 굳은 검은 피가 채워지면 화장실 벽 한 켠에 위치한 위생용품 수거함에 휴지로 돌돌 말아 버려진다. 한 달 혹은 두세 달, 일 년에 최소 한 번씩 여성들이 겪는 ‘월경’이라는 것이다.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을 앓고 있다. 뜻을 정확히 하기 위해 사전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다낭성 난소 증후군(Polycystic Ovary Syndrome)은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해 난소에 다발성의 작은 낭종이 생기는 질병, 뇌하수체의 황체 호르몬이나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과다하게 분비돼 발생하는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런 불균형으로 여성 불임, 생화학적으로는 제2형 당뇨병과 고혈압, 관상동맥질환, 자궁 내막암, 대사증후군 등의 위험성이 높아진다. (카톨릭대, 서울대학교병원 사이트 참조) 

 그렇다. 나는 월경을 하지 않는 20대 여성이다. 마지막 생리가 4개월 전이었다. 최근에는 정수리 부분에 집중적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여성 탈모초기를 진단받았고, 피부 간지러움과 여드름으로 10년 째 고생 중이며, 만성적인 골반통과 심장 두근거림과 손발 저림, 하지정맥류 등이 있다. 또한 내가 몸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인 배렛나루가 자란다. 월경을 기다리다가 결국 나는 의사의 도움을 받는다. 동네에 있는 오래된 산부인과로 향한다. 벽면에 빼곡하게 채워진 오래된 차트들과 비어있는 분만실, 누군가의 급한 전화가 오갔을 공중전화 한 대가 놓여있다. 분홍색 가운을 입고 있는 여의사는 나를 의자에 눕힌다. 두 다리를 벌리고 나면 오래된 철제의자는 소리를 내며 뒤로 젖힌다. 질 정제를 넣고 엄청나게 아픈 주사를 맞는다. 괴상한 약사에게 조제를 부탁하고 아침·점심·저녁 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쓴 약에 물 한 모금을 삼키며 피를 기다린다. 배가 미치도록 고프다. 아까 쌀국수 곱빼기 한 그릇과 감자 칩 한 봉지, 딸기우유와 캔 음료 하나를 먹고 방금 후라이드 치킨 한 마리와 콜라를 마셨다. 이상하게 파인애플이 당긴다.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팥빵도. 화가 올라온다. 모든 것을 파멸로 이끌 만큼 충동적인 감정이 올라온다. 또한 슬프다. 삶이 슬프다. 온몸이 간지럽고 간지럽다. 기분이 너무 좋지 않다. 멋진 남성과 키스를 하고 싶은 욕구가 느껴진다. 이날 새벽 나는 월경을 시작했다. 계속 차오른다, 차오르다가 비지 못하면 빵하고 터진다.

 넌 귀엽고 예뻐야 해. 너는 작고 말라야 해. 너는 더 예뻐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해. 여자가 사랑받으려면 머리를 길러야지. 머리 길면 예쁘겠다. 귀를 뚫고 화장하면. 여자는 분홍색, 여자는 치마, 여자는 스타킹. 여자는 꾸며야 해. 남성은 예쁜 여자에 끌려. 이런 묘비명, 누굴 위한 무덤이 된 걸까. 누구를 위한 죽음의 씨앗이 됐을까. 나를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로지 나라는 여성에 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여성이라는 죽음을 살고 있다. 처절하고 치열하게. 나에게 여자들이 남자들이 가혹하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런 저주가 나의 난소에 씌어져있다. 사회가 나에게 요구할수록 나는 두껍고 무거운 무장의 탈을 썼다. 더 강해보이고 세보이기 위해서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들었다. 그리고 아빠의 목을 무참히 베어버렸다. 남성의 몸과 성기 가죽을 입고 저 문을 열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여성은 저마다의 역사를 갖고 태어난다. 자기 자신이 풀어낼 수 있는 삶의 한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의미다. 저마다의 다른 음모 색과 겨드랑이 털 길이, 렌즈를 끼지 않아도 푸른 하늘이 비치는 아름다운 눈동자, 마트에서 산 넉넉한 사이즈를 입으면 편한 엉덩이, 립스틱을 바르지 않아도 부드럽고 촉촉한 딸기잼 입술과 샤넬 no.5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나비가 달려들 좋은 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모습을 꾹꾹 참고 눌러서 압축돼 납작한 성에게 위로를 보낸다. 녹이 슨 날카로운 면도날로 피부 끝에 자라난 선인장 같은 털을 제모하고, 피부가 타거나 여드름이 날까 노심초사하며 SPA 50+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르고, 나의 모습이 어떨까 자기검열하며 지하철 전신거울에 나를 비춰본다. 매니큐어로 얼버무려진 손톱의 끝에는 강아지와 고양이의 배를 간질거리는 여유와 아이라이너로 길쭉하게 그려진 검은 아이라인 끝에는 길게 매달린 굽힐 수 없는 자존감이 있다는 것. 이 땅 위에 불안하게 서있는 하이힐을 벗어던진다. 

 나의 삶의 토지에 여러 가지를 심는다. 사랑, 아끼는 마음, 배려, 눈 맞춤, 존경, 이해.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 마음에 이 모종들이 자리 잡으면, 중간에 누가 쌈 싸먹으려고 뽑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숲을 이루겠지? 그곳에는 붉은 혈의 강이 흐를 거야. 이곳에서는 울어도 되고, 소리 질러도 되고, 좋아하는 것을 끌어안아도 되고, 아빠와 아들은 더 부드러워지고, 엄마와 딸은 서로를 나란히 바라볼 거야. 하나의 우주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숲이 필요하니까. 나의 모습이 평가되고 판단되지 않는 그런 피를 갖고 싶어. 우리 모두 서로의 피를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다는 것, 각자의 다름은 우리의 같음과 연결돼 있다는 것, 나는 피를 흘리지 않고 싶어. 너무 많은 약자들이 피를 흘리며 살고 있는걸. 나는 피를 흘리고 싶어. 내가 살 수 있는 그런 지구에서는 아이를 갖게 될 거야. 

 이 글을 쓰고 나는 자유하다. 자유해질 것이다. 토해낸다. 배설한다. 하지만 피는 나오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그릇에 물을 담고 기우제를 연다. 도봉산 약수터에서 줄서서 받아온 물과 가장 마음에 드는 예쁜 잎, 깃털을 줍고 싶지만 AI로 패스한다. 오래됐지만 애착이 가는 그릇에 물을 담고 잎을 띄우고. 달이시여. 나의 피의 저주를 풀어 주십사고 기도 올립니다. 달짝지근한 붉은 체리주스를 부탁드립니다. 하고.  


글·장유리
아침에 일어나서 쓰는 글과 명상,요가와 산과 숲,바다를 사랑한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자가 삶의 모토다. 사랑만 하며 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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