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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탈기억의, 탈공간의 산책자의 불행
[안치용의 프롬나드] 탈기억의, 탈공간의 산책자의 불행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07.01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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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은 나이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공간기억이 늘어난다는 것으로도 설명된다고 말할 수 있지 싶다. 공간에 관한 기억력이 좋아진다는 의미라기보다는(오히려 반대이겠다)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공간의 숫자가 늘어난다는 얘기다. 주어진 시공 안에서 나이가 들어야 하는 형편임을 감안하면, 상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다. 공간기억이란 게 발생 순간의 사건을 정확히 그대로 담아내지는 않게 마련이다. 대체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 축적된 삶, 형성되고 변화하는 가치관에 따라 사건은 재구성된다. 결국 지금의 구성력이 과거의 공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게 하거나, 더러 망각하게 만든다.

 

소설에 인물ㆍ사건ㆍ배경이 필요하듯, 공간기억을 구성하는 요소를 식별해 보자면 아마도 사건이 그 핵심일 것이다. 사건에는 시공이 존재하고, 사람이 존재하고 관계가 존재하는데, 공간기억은 공간을 중심으로 이것들을 정렬한다. 옛날에 인간들이 밤하늘에 흩어진 별들을 이어서 특정한 별자리를 만들어내었듯이 말이다.

 

하나의 공간에 두 개 이상의 사건이 겹쳐지기도 하고, 관계와 인물이 중첩되기도 하면서, 공간기억이 작동할 때 나에게 남겨진 그 기억(들)의 의미는 공간을 중심으로 파노라마처럼 발굴된다. 두뇌의 저장장치 저 어딘가에 되는 대로 쌓여있던 사건이 불쑥 눈앞에 뛰어드는 데는 물론 특정한 계기가 필요하다. 사람 없는 사건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대체로 공간기억은 사람과 연관된다. 그러나 이 연관이 연관기억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공간에 사람이 숨는가 하면 때론 사람이 공간을 대체한다. 사람이 숨어버려 인적이 보이지 않는 공간이 극단적인 공간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잊고 지내다, 50살을 넘긴 어느 날, 27살 청년의 공간을 우연찮게 마주 대하면 ‘그날들’이 아렴풋하다. 스무 살, 서른 살에 듣던 노래처럼 익숙하고 애틋하지만 낯설고 빛바래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되어버린 그날들의 공간과 이름. 요절한 우리 시절의 가수는 청춘 그대로, 제대로 주름살을 쌓아보지 못한 얼굴로, 가끔씩 술 취한 중년의 노래방에 호출되어 제가 살아보지 못한 나날들의 행과 불행을 논한다. 그날들과 요즘이 교직하는 공간 앞에 서서 다시 생각해 보니 이 나이를 많지 않은 나이라고 단정할 게 아니다. 몸과 마음으로 제법 긴 세월을 살아내었다. 몇 년 전이 아니라 수 십 년 전을 기억할 만큼 살아낸 게 대견하다고 할까, 욕되다고 할까.

 

사람들은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산책한 노년의 칸트만을 기억한다. 젊은 날의 칸트는 엄숙한 산책자가 아니었고 젊은이이었다. 산책은 더 이상 젊지 않은 인간 포유류의 특징인 걸까. 그렇다고 확언할 수 없지만 내가 아는 많은 젊지 않은 인간 포유류가 산책한다. 혼자 걷기도 하고, 나처럼 개와 함께 걷기도 한다. 개와 함께 하는 산책은 사실 산책이라기보다는 개의 수발이다. 공원을 걷는 일은, 혼자 걷든 개와 함께 걷든, 탈공간의, 탈기억의 행위이다. 더 이상 젊지 않은 인간 포유류가 공원을 걷는다면 말이다.

 

탈공간ㆍ탈기억의 행위라는 말은, 그날들과 무관한 현재의 다만 행위라는 뜻이다. 사건에서 고립된 이러한 행위가 누적된다고 하여도 장차 나는 공원을 기억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저 산책하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공원에서는 사건이 배태되어 성장하지 않고 과거 사건의 기억을 되먹임하며 몸을 움직일 뿐이다. 만일 개에게 공간기억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개의 공간기억이 이러할까. 아마도 비슷하지만 다르지 싶다. 사건 없는 삶을 사유로 살아내는 방식을 선택하여 칸트는 행복하였겠고, 사건과 사유 모두가 부재한 나의 개 스콜 또한 적어도 불행하지는 않았으리라. 공원의 산책자는 칸트가 아니고 개도 아니다. 산책자는 사건 없는 사건을 사유하고, 그리하여 불행하다. 그날들의 공간기억에서는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행복의 부재가 불행은 아니어야 한다는 근본적 믿음이 갓 이별한 연인의 체취처럼 달콤하고 확고하게 떠돌았다.

 

나의 개는 돌아선 채 멈춰 선 나를 꼬나본다. 확고할뿐더러 결연한 시선이어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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