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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케이크를 훔치다
[안치용의 프롬나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케이크를 훔치다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08.04 0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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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찾아온 제자가 슬그머니 예쁜 종이상자를 내민다. 이런저런 번잡한 의식과 대화로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물었다. 케이크란다. 막 저녁을 먹으러 갈 참이어서 차 안에 두었다가 집에 가져가도 괜찮겠냐고 물었더니 불안한 기색이다. 그래서 예쁜 종이상자를 들고 식당으로 갔다. 안에 어떤 케이크가 들었는지 살펴보지 않고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디저트 삼아 나눠 먹으려고 상자를 열었다.

 

케이크가 녹아 있었다. 특히 초콜릿 케이크는 완전히 흐물흐물해져 모양 상으로는 케이크 물질이지 케이크라고 말하기 힘들어 보였다. 내가 “완전히 떡이 됐네.”라고 말하자 한 녀석이 재치 있게 “원래 떡 사 왔어요.”라고 받아넘긴다. 좌중에 한바탕 웃음꽃이 핀다.

 

모양으로는 먹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먹고 난 다음의 것 같은, 혹은 입에 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입에서 나온 것 같은 떡 같은 물질을 일회용 포크로 어렵사리 떠서 입에 넣었다. 달다. 정말 달다. 단 것을 자제하는 요즘의 식습관으론 감당하기 힘든 단맛이다. 그렇지만 사온 성의를 생각해서 먹을 만큼 먹고 또 나눠 먹는다. 아마도 귀가해서는 그 케이크를 처리하기 위해 BBC 다큐멘터리 한 편을 틀어놓고 실내자전거를 열심히 타겠지.

 

케이크를 사 온 녀석이 핸드폰에서 원래 모양을 찾아서 보여준다. “이렇게 예쁜 애들이었어요.” “내 20대 사진 같네. 방금 먹은 케이크는 지금의 나 같고.” 예의 바른 또 한 번의 웃음꽃. 그러나 모양으로는 20대의 나나 지금의 나나 크게 다르지 않다. 외람된 말씀이나, 머리숱이 더 있고 주름살이 덜 있다고 꼭 더 보기 좋은 건 아니지 싶다. 혹은 내면을 기준으로 두 시기의 내가 두 성상의 케이크와 비견될까. 마찬가지로 꼭 그렇지는 아닌 듯하고,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원래 떡이었어요.”에 대한 아저씨 버전 호응?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심드렁하게 라디오를 들으며 운전하다가 문득 “떡이 된 케이크”가 내가 망쳐버린 인연들과는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예뻤던 것들을 무심히 방치하여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적지 않은 인연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차라리 끝끝내 종이상자를 열지 않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고양이는 반은 살고 반은 죽은 채 반도체적 존재로 인식될 수 있겠지만, 인연은 제로섬이다. 그런 고양이는 현실에 없지만 그런 케이크는 도처에 널렸다. 날씨는 덥고, 욕심 때문에 자전거 페달이 팍팍하여 나이 듦이 구차하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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