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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박찬주, 푸이, 주일 아침에 내리는 비
[안치용의 프롬나드] 박찬주, 푸이, 주일 아침에 내리는 비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08.06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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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철 일요일 아침의 도로는 한갓지다. 이어폰 낀 아들을 어디론가 데려다준다. 어느새 키가 나만 하게 된 옆자리 아들이 내 쪽 이어폰은 꼽지 않고 귀를 열었다. 할 말이 많지는 않다. 하늘이 어둡다. 우산 챙겼냐?

 

앞유리로 한두 방울 듣더니 제법 묵직하게 비가 쏟아진다. 와이퍼가 바빠진다. 도로의 열기, 내 차에 축적된 열기가 증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열역학은 시원하다. 더위의 무게감에 어젯밤도 뒤척뒤척하여 눈꺼풀이 무겁다. 입 안은 시큼하고 달달.

 

잠을 깨기 위해 먹은 카스텔라 한쪽과 사과 한쪽. 금이라는 아침 사과. 일요일 아침잠은 더 금이다. 이런 순간에 모닝커피는 더더욱 금이다. 그러나 빗줄기가 제법 굵어서 어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사러 가기가 여의치 않다. 정작 내가 쓸 우산이 없기도 하다. 자던 채로 튀어나온 몰골도 그렇고. 입 안이 시다. 내게 쓴 맛이 필요하다.

 

아들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생각났다. 자금성에서 끌려 나갈 때 사과를 먹고 있었다는 기억 때문일 것이다. 3살에 즉위해 6살에 퇴위한 참으로 속도가 빨랐던 인생. 좌회전하는데 직진 차선에서 휙 차 한 대가 끼어들어온다. 일요일 아침에 교회라도 늦었을까, 주일 아침이라 그 차를 향해 욕이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딱히 나를 기다리는 교회나 신(神)이 없고 차 한 대쯤 먼저 보내줘도 괜찮은 일요일 아침이다. 문득 공관병 갑질로 인생일대의 곤경에 처한 박찬주 대장이란 사람의 간증 장면이 떠오른다. 그와 아내는 오늘 교회에 갔을까. 요즘이야말로 그들에게 정말 믿음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쓴 맛이 필요하다. 결국 집에 가서 물을 끓인다. 거름종이에 분쇄된 원두를 올려놓고 드리퍼에 더운물을 붓는다. 급한 마음에 처음 내린 커피가 내 머그컵에 모인다. 커피의 원산지인 에티오피아에서 재배되어 인도양을 건너고, 로스팅된 뒤 작게 부서진 채 얌전히 밀봉된 봉투 안에 숨죽이고 있던 그 향기. 쓴 맛.

 

그 사이 외박한 개들이 돌아와 반갑다고 짖는다. 단지 하룻밤 떨어졌을 뿐인데 이산가족 상봉한 듯 난리가 아니다. 운전하다 갑자기 내린 비를 보면 그러하듯, 무작정 그리울 때가 있다. 일요일 아침의 나의 개들이 그러한가 보다. 상투적으로 비가 오고, 참았다가 직접 내려 커피를 상투적으로 마시고, 가끔은 나의 스콜처럼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짖고 싶다.

 

 

 

 

글ㆍ안치용 지속가능성과 CSR에 관심이 많다. 한국CSR연구소장이며,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과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지속가능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을 대학생/청소년들과 함께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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