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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 뮤지션 원종희, 균열한 사회에 진화를 외치다.
펑크 뮤지션 원종희, 균열한 사회에 진화를 외치다.
  • 주동일
  • 승인 2017.08.12 04:0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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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촛불 혁명과 문재인 대통령 당선으로 진보-좌파 진영에 새로운 과제가 생겼다. 대선 기간 동안, 연대했던 이들 간에 동성혼 합법화, 사드 배치, 대북 정책 등의 정치적 의견 차이로 생긴 ‘균열’을 수습하는 것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온 이들은 새 시대의 방향성을 두고 연대했던 이들과 필연적으로 갈등을 겪는다. 잘못된 것을 말하기는 쉬워도 올바른 것을 말하기는 어렵고(1), 모든 비판에는 대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철학사의 흐름을 뒤엎은 니체는 자신이 초래한 균열을 수습할 대안을 찾는데 생애를 바쳤다. 그는 끝내 대안을 찾지 못하고 미쳐버렸지만, 대안의 실마리를 후대에 남겼다. 니체는 기만과 창조의 힘이 깃든 ‘예술’에서 대안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인지 하이데거는 시를 썼고 사르트르는 플로베르의 작품 분석에 전념했다. 기 드보르와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이 영화 분석에 힘을 쏟는 것도 단순히 영화평이 ‘돈이 돼서’만이었을까.
 기존의 틀을 깨고 연대를 외치는 음악에서라면 어떤 통찰력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2년째 펑크 음악을 하는 밴드 ‘럭스(Rux)’의 보컬 원종희 씨를 만나기 위해 문래동 펑크 클럽 ‘스컹크헬’로 향했다.

 ‘SKUNK HELL’ 간판을 따라 건물 지하로 내려가자 백단 향이 났다. 발소리가 잘 나지 않는 나무 계단을 모두 내려가니 피부가 떨릴 정도로 강한 드럼 소리가 들렸다. 스컹크헬은 원종희 씨가 2015년에 연 펑크 클럽 겸 바다. 이전에 홍대에서 운영하던 스컹크헬을 다시 열게 된 계기를 묻자, ‘펑크 클럽을 할 때 가장 오빠의 제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던 전 아내의 말에 끌리듯 열었다고 답했다. 직접 운영하는 타투 스튜디오 ‘배드핸즈 타투샵(2)’이 있는 건물 지하였고, 우리나라 최고의 인디 펑크 밴드라는 명성을 하룻밤에 뺏긴 2005년 ‘MBC 음악캠프’ 사건(3)으로부터 딱 10년이 지난해였다. 원종희 씨는 올해 3월, 전 아내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들을 가사로 옮긴 ‘격동’을 발표했다. 가사에는 맹목적으로 고수해온 자신의 사상을 돌아보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연대의 중요성을 담았다.

Another Conception : 신념을 깨다

 원종희 씨가 맨 처음 펑크 음악을 시작한 건 중학생 때였다. 초등학교 때 미국에서 영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같은 한국인들에게 무시 받았던 그는 펑크 밴드를 했던 사촌 형의 공연을 보고 펑크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멜로디와 직설적인 가사에서 기존의 틀을 부수고 나가려는 힘이 느껴졌고, 말할 수 없는 이들에게 주어진 발언권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해 친구들과 밴드 ‘럭스’를 만들어 홍대 클럽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소찬휘 씨의 매니저가 밴드를 만들자며 데뷔를 제안하기도 했지만, 기획사의 개입으로 원치 않는 음악을 하는 게 싫어 거절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멤버들이 학업을 위해 밴드를 떠났지만, 원종희 씨는 펑크 음악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 시절 쓴 가사가 럭스 1집 타이틀 곡 ‘지금부터 끝까지’다.(4)
 중학교 때부터 해 왔던 펑크 음악을 고수하지 않고 스케이트보드, 타투로 조금씩 활동 영역을 넓혀가는 이유를 묻자 원종희 씨는 멋쩍게 웃으며 ‘거창한 건 아니고, 하고 싶었던 거라 자신을 속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는 사상과 마찬가지로 음악 역시 한 가지만 고수하면 시야가 좁아져 그 안에 갇히기 쉽고, 모순에 빠지거나 지칠 가능성도 높다고 말했다. 자신이 마음 가는 것이 있다면 자신을 속이지 않고 시도해보는 편이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음악도 장르를 가리지 않아 요즘엔 EDM (Electronic Dance Music) 파티의 MC까지 본다.

 “카레를 좋아한다고 카레만 먹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무엇보다 다른 음식도 먹었을 때 카레의 참맛을 느낄 수 있잖아요. 다른 음식과 비교하면서 그 맛을 더 잘 느끼는 거죠.”

 그는 펑크가 ‘자유를 외치는 음악’이라면,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했다. 원종희 씨는 우연히 이십 대 초반에 “‘펑크 교복’을 입지 않으면 펑크 클럽에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사람들이랑 어울리지도 못하고 공연도 간신히 보고 오잖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모히칸 머리에 징을 박은 가죽 재킷, 본디지 바지를 ‘펑크 교복’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펑크 교복’을 안 입으면 펑크 클럽에서 배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습잖아요, 우리가 비난하던 사람들이랑 닮아가는 거니까요.”

 원종희 씨는 일부 펑크 밴드와 마니아들이 펑크 문화에 갇혔다고 느꼈다. 틀에 맞춰진 펑크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강박도 모순적이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알고 싶어졌다. 특히 펑크 음악계가 자주 비판했던 ‘주류 음악계’가 어떤 생각으로 음악을 대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결국, 음악 및 방송 관계자들이 많이 졸업했다는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영상학과에 08학번으로 입학했고, 리처드 도킨스 등 음악 외 분야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가치관을 돌아봤다. 왜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했냐는 지인들의 질문에는 장난처럼 “‘음악캠프 PD’가 되려면 나와야 하는 곳이라서”라고 답했다. 원종희 씨는 럭스의 음악이 ‘진화’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갖고 있는 틀을 깨고 생각을 열어가는 것이 그가 말하는 ‘진화’다.
 음악에 있어서 원종희 씨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가사다. 악보를 볼 줄 몰라 구음으로 작곡을 하고 가끔은 기타 코드표도 찾아보지만, 그것들을 외우는 게 펑크 음악을 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가 쓰고 싶은 가사는 가장 단순한 언어로 말하지만, 해석의 여지가 다양해 듣는 이의 생각을 열어주는 가사다.
 나치부터 공산주의, 아나키즘까지 다양한 정치색을 띠는 장르인 만큼, 원종희 씨에게 어떤 정치사상을 염두에 두고 작사를 하는지 물어봤다. 원종희 씨는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은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특별히 없다.’고 답하며 웃었다. 점원이 와서 맥주와 콜라를 가져다줬다. 바 너머에서 바닐라 향이 났고 잔잔한 스카 음악이 흘러나왔다.
 일부 누리꾼이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영상에 럭스의 음악을 편집하면서 정치적인 가사를 쓴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지만, 특별히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단지 뉴스를 보면서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가사에 묻어났고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시기에 비교적 직설적인 가사를 더 많이 싫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2014년에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사회를 돌아보니 화폐, 경제 지표, 사망자 수, 확률 등 인간을 비롯한 모든 것이 통계와 숫자로 표현되는 것이 섬뜩해 ‘괴물들이 살아 숨 쉬는 나라’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는 예측할 수 없이 움직이는 주가 그래프 안에 ‘엄청난 괴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딱히 정치적인 의도는 없었다. 항상 그래왔듯 생각할 여지가 있는 ’진화‘하는 가사를 쓰고 싶었다고 한다. 그걸 동의하고 해석하는 건 청자의 몫이었다. 원종희 씨는 우적 관계를 가리는 ’좁은 의미의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창작 의도와 달리 가사에 담은 메시지들이 정치적인 맥락에서만 읽히고 이용되는 데에 아쉬움은 없는지 물었다. 원종희 씨는 '2005년에 냈던 앨범 제목인 ‘Another Conception’이라는 말 대로, 예나 지금이나 컨셉을 잡는 건 싫다.'고 답하며 '그러다 보니 양적으로 손해를 보긴 한다.'고 덧붙였다. 앨범 'Another Conception'을 발매할 때부터 좌파 성향을 가진 언론들은 인디 밴드이자 펑크 밴드라는 이유로 럭스를 ‘운동권’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펑크라는 ‘컨셉만 고집하는 밴드나, 펑크 밴드를 다루는 언론이나, 중학교 시절 소찬휘 씨의 매니저가 아이돌 그룹을 키우듯 밴드를 만들자던 제안이나 다른 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특히 그 과정에서 이권을 둘러싼 세력 다툼과 배척의 악순환에 말려드는 게 싫어 원종희 씨는 ‘굳어지는 컨셉 없이 누구의 손도 잡지 않기’로 했다. ‘컨셉’을 통해 누구의 편에 서길 거부하다 보니, ‘기류를 타듯’ 권력이나 자본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도 이렇게 할 생각’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Walk Along : 다름을 존중하는 연대

 1999년, 럭스는 음반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어 ‘음반을 3,000원에 팔아 상도를 다 어기자’며 함께 펑크 음악을 하던 동료들과 ‘3000 펑크(5)’라는 음반을 제작했다. 원종희 씨는 소매점에서 판매하는 배추 가격 5,000원 중에서, 한 해 동안 배추를 키운 농민은 30원만 받는 건 불합리하다며 음반 산업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럭스가 추구해 온 ‘진화’는 사상이나 권력에 얽매지 않고 자기 생각을 끝없이 열어가며 서로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결국 사상적으로 아나키즘(6)을 추구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이번에도 원종희 씨는 웃으며 ‘진화’라고 답했다. 누구의 가치관이든 기존 사상에 대입하기는 쉽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선사시대가 돌도끼를 들고 싸우던 ‘폭력의 시대’였다면, 지금은 제도를 통한 ‘정치의 시대’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필요한 건 ‘역설적으로 정치보다 예술’이라고 덧붙였다.

 “정치적인 해석은 편을 가르고, 사상적 해석은 모호하고 복잡해 왜곡될 가능성이 커요. 무엇보다 윤리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래서 진화를 이루는 건 정치보다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니체는 학문에서 인간의 이상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학문이 진리만을 추구해 ‘제멋대로이고, 초라하고, 불필요한 생존자의 모습(7)’인 동물로서의 인간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종희 씨는 ‘사회에도 진화가 있다면 강자든 약자든, 여자든 남자든 둘 다 아니든, 피부색이 어떻든, 모두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그 ‘당연함’이 받아들여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진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정치인데 수단인 정치가 목표인 진화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2003년에 럭스는 일본 펑크밴드들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이내 ‘사무라이 스피릿 스킨헤드(SSS. Samurai Spirit Skinhead)’ 밴드들이 “우리는 조센징과 함께하지 않겠다.”며 반대했다. SSS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 이어진 일본의 전체주의 성향을 띈 펑크 장르다. 얼마 후, 원종희 씨는 평소에 친분이 있던 국내 일부 밴드가 SSS 음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펑크 문화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Unity(연대)다. 근거 없는 배척과 편견으로 가득 찬 연대는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섣부르거나 과격한 비판은 또 다른 근거 없는 배척과 편견을 만들 수 있다. 특히 반인륜적 요소를 이용한 예술이 으레 그렇듯, 어떤 식으로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한 어려움까지 더해 문제는 복잡해졌다. 원종희 씨는 고민 끝에 SSS 음악을 하는 밴드를 포함해 주변의 펑크 밴드들을 모았다. 그리고 녹음실로 모여 ‘Walk Along’을 녹음했다. 가사에는 각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서로에 대한 강요 없이 존중하며 연대하자는 솔직한 내용이 담겼다.(8) 틀을 깨기 위해 함께 연대했던 이들이 방향성을 두고 갈라지는 상황에서 원종희 씨가 내린 대안이었다.
1층으로 올라가 함께 담배를 피우던 원종희 씨는 ‘그 뒤로 어떻게 됐냐’는 질문에 눈까지 웃으며 답했다.

 “사람은 쉽게 안 바뀌더라고요. 아직도 같은 음악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는 연기를 내뿜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너무 쉽게 생각해서 의견을 잘 전달하지 못하기도 했고요. 대신에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우리 모두 한 번씩 했어요.”

 원종희 씨의 의도는 그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했고, 기대했던 설득도 실패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보았고, 누구도 서로를 속단하거나 각자의 의견을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끝까지, ‘격동’ : 선입견도 강요도 없이

 12년 전, 원종희 씨는 대중음악 평론가 ‘김 작가’와 인터뷰를 하며 이런 말을 했다.

 ‘한 1년에서 3년 정도 펑크로 살다 보면 세상에 대해 관대한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선입견도 없어지고. 워낙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웃음). 펑크를 좋아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기 자동차 긁어놨다고 ‘어떤 개새끼야!’ 이러는 게 아니라 ‘젊은 애들 객기에 이랬구만.’ 하면서 웃음으로 넘기고 끝낼 수도 있는 거고. 20~30년 지나면 할아버지들이 닭머리(모히칸 머리) 보면서 “야, 우리가 젊었을 때는 최소한 20센티는 되어야 닭머리였다.” 이럴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살만해지지 않을까 싶다.’

 1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이 유효하냐고 묻자, 원종희 씨는 “완전히 유효하죠.”라고 답했다. “차를 긁히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하지만 자기가 남의 차를 긁어본 사람들은 ‘이렇게 카르마로 되돌아오는구나.’ 하면서 넘어갈 거예요.”, “자유로워지려는 과정에서 남들에게 ‘민폐’를 많이 끼쳤어요. 그래 봤던 사람이기에, 누군가 저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그들을 단정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으려고 해요.” 그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는 어렵지만, 주위에 그런 식으로 함께 해 온 친구들을 보면 자신이 했던 말은 지금도 틀리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원종희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딸을 만나러 놀이방에 간다. 문신으로 팔부터 목까지 덮은 그를 보며 학부모들은 선입견을 품는다. 그럴수록 원종희 씨는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고 유쾌하게 다가간다. 그는 자신과 ‘같은 경험이 없으니 오해할 수도 있다.’며 ‘전부 이해한다.’고 말했다. 편견을 없애는 건 편견을 받는 사람의 몫이 아니지만, 원종희 씨 자신에 한해서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펑크 교복’과 생소했던 음악, 생방송 사고, 목까지 덮은 문신, 직설적인 가사로 누구보다 많은 선입견을 받아왔다. 그래서 누구보다 ‘오해’라는 사람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관계에 능숙하다. 그렇게 원종희 씨는 펑크를 통해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타인과 함께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그 안에는, 균열을 수습하려는 연대들이 찾는 몇 가닥의 실마리가 담겨있었다.(9)

 우리는 스스로 시야를 좁히며 갇히지 않았을까. 혹은 서로의 단점을 보며 각자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 권력에 맞선 우리는 언제부터 서로를 속단하며 각자의 생각을 강요하기 시작했을까.

 

 

글·주동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인턴 기자. 건국대학교에서 자율전공학부와 철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비주류 문화에서 기성 윤리의 대안을, 비합리성에서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 [인터뷰 도움·이해찬]

사진·신영빈
인스타그램 oobins

(1) 니체는 ‘이상’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코미디언처럼 금욕주의적 이상을 비웃고 마음껏 조소하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2) 원종희 씨는 2004년에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의 이주현 씨와 타투 머신을 구입해 서로의 다리에 문신을 해주다가 2012년에 호주로 가 1년간 타투샵에서 일하고 왔다. 앨범 ‘Another Conception’의 표지로 실은 문신 역시 베이시스트였던 윤형식 씨의 팔에 직접 새겼다.
(3) 2005년, MBC 음악 프로그램 ‘음악캠프’ 생방송 중, 럭스의 공연에 함께 출연한 타 밴드의 2인(그룹 ‘카우치’의 신현범, ‘스파이키 브랫츠’의 오창래)이 우발적으로 성기를 노출한 사건. 타 밴드가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사전협의도 없었지만, 럭스까지 방송 출연 금지 처분을 받았다.
(4) 어차피 변한 건 없어/그 누구도 상관 않겠지/그래도 나 여기서 멈출 순 없어/나의 길을 걸어가겠어/나 이렇게 이 땅에 선 채/또 다른 오늘과 싸워 이기겠어/지치지 않아 지금도 이렇게/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데/여기 이렇게 우리 함께 하는데/여기 이렇게 같이 걸어왔는데/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난 절대 변치 않겠어 - Rux '지금부터 끝까지' (2004) 중 일부
(5) ‘럭스’, ‘레이지본’, ‘18Cruk’, ‘타카피’, ‘노브레인’, ‘불타는 화양리 쇼바를 올려라’ 등이 참여했다.
(6) ‘무정부주의’가 아닌 ‘무강권주의’를 말한다.
(7)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3장 W. Kaufman, New York : Modern Library, (1989)
(8) ‘나의 소중함을 알기에, 너의 소중함을 알기에/강요하지 않으리, 강요당하지 않으리/나의 나약함을 알기에, 너의 나약함을 알기에/짓밟지 않으리, 짓밟히지 않으리/난 너를 인정하기에, 너 역시 나를 인정하기에/두 팔을 뻗고 단결을 외치자/United, We stand strong and proud./United, We tand abreast, United with probity,/United, we will never fall apart./We are the one`s that make our rules/Let`s together, walk the lonely ways,/No matter how hard it is, Let`s fight it all the ways./Together we can walk along.’ - Rux ‘Walk Along’ (2005) 중 일부
(9) 소르본 대학 출신의 한 철학 박사는 강단에서 ‘사후처리 학문인 철학을 하는 이들이 예술에 빠지는 이유는, 아직 언어화되지 않았지만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예술에서 등장해왔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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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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