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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
신세경, 송두율, 쌍용자동차
  • 이택광/경희대 교수·영문학
  • 승인 2010.04.09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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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령 하나가 한국 사회를 떠돌고 있다. 햄릿의 아버지도, 공산주의도 아닌 유령이. 이 유령은 일명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이다. 물론 드라마에서 신세경의 캐릭터가 유령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최소한 드라마를 만든 김병욱 PD는 신세경을 유령으로 설정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형식논리상 그렇다는 것이지 드라마가 종영한 뒤에 일어난 후폭풍은 신세경을 기어코 유령으로 만들고 말았다. 마르크스의 말이 옳다면, 유령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 것’이다. 마치 공산주의처럼 말이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드라마에 대한 지나친 애정이 빚은 해프닝일까? 그렇게 말하고 덮어버릴 일은 아닌 것 같다. 드라마의 결말을 두고 벌어진 다양한 반응은 단순한 현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시청자는 왜 신세경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일까? 익숙지 않은 형식 때문일까? 아니면 여주인공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심리 때문일까?

  세경의 첫 ‘선택’과 필연적 ‘종결’

▲ <잿빛 하루>, 1920-후앙 그리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있다. 이런 결말에 반발하는 태도는 <지붕 뚫고 하이킥>이라는 드라마를 현실과 등치시켜온 인식의 결과라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인식 자체다. 도대체 <지붕 뚫고 하이킥>은 어떤 인식을 시청자에게 부여했을까? 그 비밀은 신세경이라는 인물에게 감춰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구나 동의하는 사항이지만, 이 드라마의 핵심은 신세경이다. 이런 까닭에 신세경이라는 매개자의 ‘실종’은 드라마에 애착을 보이던 시청자가 감당하기 어려운 결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신세경은 이 드라마의 설정을 처음부터 황당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강원도 산골에 살다가 갑자기 나타난 빚쟁이들 때문에 흑염소 운반차량을 타고 서울로 온다는 발상 자체가 예사롭지 않았다.
 이 예외적 상황에서 신세경은 존재의 의미를 획득한다. 신세경은 자발적으로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인해 도시 공간으로 들어온다. 물론 그가 도시를 떠나서 강원도에 머문 것도 타의에 따른 것이다. 그가 타의를 벗어나서 자신의 선택을 했을 때, 그의 세상은 끝난다. 그 세상은 신세경에게 타의만 강요한 장소지만 또한 그로 인해 신세경을 존재하게 만든 조건이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신세경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 장소와 조건에 문제를 제기한다. 강원도 산골소녀 신세경은 서울에 들어오면서 ‘욕망’을 얻는다. 서울이라는 상징계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소망은 성취할 수 없다. 아버지가 귀환했을 때, 신세경은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는다.
 지훈은 신세경에게 단순한 사랑 이상의 의미가 있다. 지훈은 욕망의 기표이다. 신세경의 아버지에게는 없는 것을 지훈은 가졌다. 이 모든 것을 가진 세계에서 신세경의 몫은 없다. 완벽한 부르주아의 세계. 정상적으로 보이는 이곳은 그러나 서로가 서로에게 ‘빵꾸똥꾸’에 지나지 않는 세계다. 이 공공연하게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신세경은 홀연 이 진리를 드러내는 주체이다. 비정상적 세계를 정상적인 것처럼 유지하는 존재가 바로 신세경이라는 ‘가정부’이다. 21세기에 ‘가정부’라는 설정은 위악적이지만, 동시에 과거에 우리가 남겨놓고 온 어떤 기억의 귀환을 암시한다.
 신세경이 서울에 들어오면서 시작한 <지붕 뚫고 하이킥>은 신세경이 현실을 떠나면서 종결한다. 이를 통해 신세경이 외부에서 인입한 시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외부는 그 무엇도 아닌 우리의 과거다. 억압했던 과거의 귀환, 이것이 신세경인 것이다. 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가 얻은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자신의 과거에 대한 것이다. 그것도 ‘청순섹시한’ 과거. 황정음도 있고, 정보석도 있고, 이순재도 있고, 김자옥도 있지만 이들은 보이는 자이지 보는 자가 아니다. 오직 이들을 볼 수 있는 시선은 신세경이라는 ‘소외’에 있었다. 내부에 있지만 사실은 외부에 해당하는 신세경의 시선이야말로 <지붕 뚫고 하이킥>에 현실감을 부여한 비현실적 요소였던 셈이다.
 신세경의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에 지나지 않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계를 되비추는 것은 언제나 신세경 같은 외부의 시선이다. 외부는 언제나 허구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다. 그러나 여기에서 운위하는 외부라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통해 만들어졌다. 우리가 무언가 잊어버린 곳, 거기에 외부가 있다. 홍형숙 감독이 만든 <경계도시2>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로서, 2003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재독학자 송두율 교수의 한국 방문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지붕 뚫고 하이킥>과 달리 다큐멘터리지만,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신세경은 여기에서 송두율이라는 ‘현실’로 대체되어 나타난다. 이 다큐멘터리는 송두율이라는 ‘다른 신세경’에 대해 이야기한다. 경계인에서 거물 간첩으로 추락한 재독학자의 귀향을 다룬 이 영화에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확인하지 못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목격한다.

 송두율은 ‘분단의 신세경’
 송두율이라는 ‘분단의 신세경’이 드러내는 것은 ‘단일한 대한민국’이다. 흥미롭게도 이 대한민국은 민족의 이름으로 민족주의자 송두율을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이 민족주의자가 죄인이라면, 도대체 그의 죄는 무엇일까? 다큐멘터리가 질문하는 이 지점에서 관객은 새로운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 신세경과 마찬가지로, 송 교수도 한국이라는 현실에서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다. 경계인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이곳에서 그는 몫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경계인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경직성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마치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신세경을 사랑하지 못하는 지훈의 고리타분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히려 <경계도시2>는 경계인의 의미를 알면서도 이를 완강하게 부정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현실은 합리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기자는 ‘논리’를 빙자해서 제멋대로 발화의 의미를 왜곡하고, 우파는 자신의 입맛에 맞춰 송두율이라는 개인에게 마음대로 ‘모자’를 씌웠다. 여기에 좌파라고 불리는 진보개혁 세력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더욱 합리적인 외피를 쓰고 송두율이라는 개인을 압박한다.
 좌·우파를 막론하고 이들에게 ‘경계’라는 말은 모호한 핑계로 들릴 뿐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조선노동당에 입당해놓고 무슨 경계인인가?”라고 물었다. 이들의 세계인식을 지배하는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명명백백한 이분법이었다. 우파가 남이냐 북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윽박질렀다면, 좌파는 독일 국적이냐 한국 국적이냐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압박했다. 겉으로 보기에 이 모든 행위는 인간 송두율을 위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경계인 송두율을 배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 같았다. 이들에게 불편한 진실은 경계인이었다. 도대체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것일까?
 경계인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외부인’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외부’는 결국 우리의 과거였지만, 이미 그 과거는 우리에게 낯선 것으로 변해버렸다. 이런 까닭에 ’경계인’이라는 말은 이쪽도 저쪽도 속하지 않는 중립자의 모습으로 비쳤을 뿐이다. 물론 송두율 교수는 경계인의 개념을 이렇게 사용하지 않았지만, 한국 사회는 복잡한 철학적 의미 따위에 관심이 없었다. 한국 사회가 요구한 것은 송 교수에게 ‘죗값’을 치르라는 것이었다.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송 교수는 이런 요구를 받은 것일까? 다큐멘터리는 이 논란의 중심에 국가보안법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이보다도 경계인이라는 범주 자체를 거부하려는 한국 사회의 무의식이다.
 송두율 교수의 경계인은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경계인의 속성은 두 체제 모두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경계인은 ‘통일한국의 시민’과 동의어였다. 송 교수 사건이 폭로하는 것은 각자의 민족주의는 있되, 민족이 없는 한반도의 현실이다. 두 체제 모두 민족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하나의 민족주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송 교수의 귀환은 한국 사회에 부재한 민족의 실체를 드러낸 사건이다. 마치 신세경이 부르주아의 정상성을 비정상성으로 보여주듯이 말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 경계인 따위는 필요 없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들의 세력을 불리는 데 이용할 ‘우군’이었을 뿐이다. 신세경과 마찬가지로 송 교수는 민족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고백한 뒤 한국 사회에서 사라져야 했다. 한국 사회는 경계인이라는 외부의 시선 자체에 거부감을 느꼈다기보다, 그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진실에 불편해했다고 할 수 있다.
 신세경의 고백은 ‘신분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강변이었다. 남을 짓밟고 올라가는 계급상승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신세경은 송두율 교수를 닮았다. 외부의 시선이라는 것은 이들에게 나누어진 공동체의 몫을 지칭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공동체의 윤리에서 배제당한 존재들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허구이기에 이를 뒤집어서 보여주고, <경계도시2>는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현재진행형, ‘쌍용차’
 이 모두는 허구이거나 과거사의 일일까? 역시 그런 것 같지 않다. 쌍용자동차 파업을 다룬 또 다른 다큐멘터리 <당신과 나의 전쟁>에서 이 모든 사실은 현실감을 통해 다시 한번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버리고 떠난 공장을 노동자가 나서서 지키려고 하자 정부는 공권력을 투입해서 이들을 제지한다. 노동자의 몫은 자본가가 시키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라면 순순히 그만두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노동자가 자본가의 몫을 침해했을 때, 다시 말해서 자본가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하려고 할 때, ‘국가’는 이들에게 경찰특공대의 모습으로 현신하는 것이다. 사회질서를 바로 세운다는 명분으로 노동자는 무참하게 보이지 않는 곳으로 추방당한다.
 <당신과 나의 전쟁>은 결국 <지붕 뚫고 하이킥>의 신세경이나 <경계도시2>의 송두율 교수가 ‘몫 없는 자’라는 점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와 같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몫은 계급의 문제라기보다, 발언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지칭한다. 발언권이 없는 존재가 자기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할 때, 정치는 이들의 목소리를 막기 위해 작동한다. 이런 맥락에서 신세경의 제거는 이런 정치를 차단하기 위한 허구의 특권인 셈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종결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좌파든 우파든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발언권 없는 이들을 계속 침묵 속에 있게 하는 ‘통치’이다. 그리고 이 통치의 기술은 신세경과 송두율 교수,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를 ‘외부자’로 만들어버리는 이른바 현실의 논리 그 자체인 것이다.

글•이택광
문화평론가. 저서로 <이현세론: 영웅 신화와 소외성의 조우>(1997), <들뢰즈의 극장에서 그것을 보다>(2002), <근대, 그림 속을 거닐다>(2007),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가이드>(201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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