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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과 ‘냉정’ 사이
‘흥분’과 ‘냉정’ 사이
  • 지승학 | 영화평론가
  • 승인 2017.08.3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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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군함도>와 <덩케르크>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
▲ 영화 <덩케르크>
 
<군함도> 역시 역사의 정확한 표현을 고민하는 영화다. 이런 영화가 또 있다고 ‘곧’ 여겨진다면 이는 <덩케르크>의 여운이 남아서일지 모른다. 덕분에 <군함도>는 <덩케르크>와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해석의 첨예한 대립에 직면한다(사실 늘 그래왔다). 

게다가 영화 속 서사의 진행방식이 달라도, 영화가 재현하는 내용의 역사적 사실이 비슷한 맥락을 지닌다면 두 영화 속에는 다른 두 개의 관점이 자리 잡았을 수 있다. 그 관점에 대해서 서둘러 말하자면, <덩케르크>의 관점은 ‘냉정’이고, <군함도>의 그것은 ‘흥분’이다. ‘냉정’과 ‘흥분’이 다른 뉘앙스를 지닌 만큼 두 영화의 관점 역시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냉정과 흥분으로 재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냉정과 흥분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탓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군함도>의 결말은 <덩케르크>보다 무척 ‘흥분’돼 있으며, 마침표를 지나치게 힘줘 찍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말 경성 반도호텔의 악단장인 이강옥(황정민)은 딸 소희(김수안)와 함께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일본으로 향하던 중 ‘군함도’에 거의 불시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합류하는 사람들은 일련의 사연들을 가진 인물들로서, 경성 최고의 주먹 최칠성(소지섭), 잠입광복군 소속 요원 박무영(송중기), 억척스런 여성 오말년(이정현) 등이다. 물론 박무영은 그의 등장에 방점을 찍은 류승완 감독의 배려로 인해 다른 등장인물에 비해 보다 극적으로 등장한다. 

그들 속에는 당연히 갈등이 있고, 도저히 눈뜨고 견디기 힘든 역사적 참상이 있으며, 억누를 수 없는 울분과 분노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갈등과 참상, 분노와 울분은 영화 속에서 집요하게 반복돼, 그 이상 나아갈 힘과 방향을 찾지 못한다. 흡사 목적지를 잃어 방황하는 듯 보이는 그들의 갈등과 참상, 분노와 울분은 제자리를 맴돌다가 현기증으로 쓰러지듯 그 자리에서 맥없이 주저앉는다. 최철영과 오말년이 서로 부둥켜안고 죽어가는 마지막 장면은 이런 ‘고꾸라짐’의 은유로 보인다. 이것이 수위조절에 실패한 <군함도>의 ‘흥분’이다. 이 흥분이 지나치게 반복되니 관객들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군함도>는 액션영화인가? 역사극인가? 아니면 고퀄리티의 역사강의 보조 영상자료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큐인가.

 
▲ 영화 <군함도>
 
흥분의 수위조절에 실패한 류승완 감독   

류승완 감독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모두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특기인 액션을 곳곳에 배치하고 역사적 사실을 다루니 마냥 상상만 할 수 없으므로 고증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지만, 지나친 ‘흥분’은 배우들의 연기로 옮겨가면서 역효과를 낳는다. 그 흥분은 어느 밤, 마침내 출애굽하는 유대인들처럼 ‘군함도’의 한국인들이 현실의 정치판과 똑같은 날선 공방 후 탈출을 실행에 옮기면서 극에 달한다. <군함도>의 절정을 마주한 바로 그 때, 즉 그들의 탈출이라는 허구가 ‘사실적’인지 ‘상상적’인지를 확인해야 할 그 결정적 순간에 감독과 배우들은 할리우드에 중독된 연출에 매몰돼버리고는 이 모든 것들이 ‘상상적 허구’임을 선언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관객은 그저 그 동안의 류승완 감독과 배우들이 보여줬던 연출의 힘과 연기에 대한 믿음으로 <군함도>의 불편한 흥분을 견뎌나갈 수밖에 없게 된다. 

한편 영화 <덩케르크>의 ‘냉정’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는 곳곳에서 알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냉정’한 시선은 개인에서 집단으로 진행되는 첫 번째 카메라 움직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토미(핀 화이트헤드)의 뒤를 쫓았던 카메라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그(익명의 한 병사)’에게서 ‘그들(덩케르크 해안의 군인들)’로 이행되는 과정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움직임을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에게서 늘 발견되는 강박, 즉 ‘정확한 표현’에 대한 집착을 엿볼 수 있다. 그가 CGI 사용을 지양하고 현실 그 자체에 몰두 한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찬사로 이어지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카메라에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거짓이나 허상 없이 카메라와 정확히 ‘맞대응’시키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덩케르크 해안의 철수작전 당시 40만 명에 이르렀던 인원을 카메라 앞에 정확히 맞대응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나마 동원한 인원이 1천 명에 이른다는 것도, 영화연출에서는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정확히 ‘맞대응’시키겠다는 시도는 사실상 불가능함을 돌려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정확한 표현을 포기하고 만 것인가? 놀란 감독의 ‘냉정’한 시선은 여기에서 다른 해법을 제시한다. 바로 ‘시간과 장소’를 정확히 일치시키는 것, 당시 사용된 무기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 영화 <덩케르크>
 
시간·장소를 일치시킨 놀란의 냉정함 

그 중에서 덩케르크 해안의 실제 장소와 무기들, 철수 작전이 진행됐던 일주일간의 시간은 그에게 정확함에 대한 강박을 충족시켜줄 중요한 열쇠가 돼준다. 하지만 시간의 정확성의 경우 일주일의 시간을 표현하겠다고 영화를 일주일동안 상영할 수는 없기 때문에 노련한 장치가 필요하다. 놀란 감독은 이를 위해 육지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하루, 하늘에서의 한 시간을 각각의 대상과 연결되는 기계장치의 속도(육지=신체, 바다=배/잠수함, 하늘=전투기)와 맞대응시켜서 정확한 표현을 설정한다. 또한 여기에 카메라와 대상을 맞대응 시키고자 하는 정확성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사용하는 IMAX카메라의 퀄리티와 시간의 편차를 이질감 없이 묻어 들게 만드는 한스 짐머의 음악, 전쟁기계가 내는, 귀를 때리는 소음의 적절한 안배는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절묘하게 보여준다. 

그런 이유로, 영화 <덩케르크>는 실화와 진실의 측면에서 구체적인 자료와 수치를 제시하며 실제 작전과 매우 흡사한 규모로 잘 표현됐다는 찬사를 주로 받는다. 그러나 영화 <군함도> 역시 그에 못지않은 고증의 정밀함에도 불구하고 애국, 왜곡, 식민사관, 역사관 등의 사회적 사실의 갑작스러운 돌출로 한탄을 자아낸다. 왜 하나는 찬사로 이어지고 하나는 돌연 한탄으로 선회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덩케르크>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표현을 확실히 구분해 영화의 ‘본질’로 넘어가기 때문에 찬사로 이어지지만, <군함도>는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표현의 경계에서 갈 길을 잃어 ‘영화’의 본질로 넘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러니 이렇게 다시 말할 수 있겠다. 영화 <덩케르크>는 그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다큐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을 결코 잊지 않지만 <군함도>는 다큐와 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어 모호함에 빠진 것이라고. 그런 모호함은 현기증으로서 곧 ‘흥분’이 돼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 <군함도>는 <덩케르크>보다 더 확고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이 ‘영화’임을 정확하게 고백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이 고백이 의미 있는 이유는 <덩케르크>의 경우, ‘냉정’한 관점으로 영화가 지닌 한계를 정확히 인지한 후에 정교하게 역사적 사실을 재현함으로써 현실을 향한 메시지의 가치, 이를테면 영국의 ‘브렉시트’의 문제 등을 현실적으로 언급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함도>는 영화라는 한계를 오히려 인식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외면한 채 첨예한 현실의 문제에 집중하느라 메시지의 가치를 심각할 정도로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 두 사례는 사실관계 속 진실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는 고백이 전제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라는 좁은 영역에서 반드시 벗어나야하는 이 공통의 원리는 정치, 교육 등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각각의 한계와 약점은 무엇인지 정확한 고백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고백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할 듯하다. 스스로의 치부를 폭로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다. 뜻하지 않게 두 영화의 ‘흥분’과 ‘냉정’사이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고백할 줄 아는 바로 그 용기라고.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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