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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목줄의 변증법
[안치용의 프롬나드] 목줄의 변증법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09.25 0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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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함께 나서는 아침산책에서, 인간의 기준으론 줄을 잡은 자와 줄을 목에 건 자 사이의 기분이 판이할 것 같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줄을 목에 건 자가 더 활발하고 행복해 보인다. 줄을 잡은 자는, 줄을 잡았다는 외형상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줄에 끌려가는 모양새다.(가능하다면 이불에 누운 채로 끌려가면 좋으련만.)

 

개에게 "목줄=외출"이기에 구속이 행복으로 표상된다. 구속은 연결이고 유대이며 질긴 인연이기도 하다. 나에게 목줄은 개의 통제이지만 편의적으로 말하면 혹은 인간 위주로 말하면 동시에 교감이기도 하다. 목줄 없이 너와 나의 동행은 불가능하다.

 

스콜에게 목줄은 역설로 작용한다. 그것은 해방이면서 끊임없는 유대의 각성이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억압이 (과도하게 후하게 쳐서) 해방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목줄의 변증법에서는 억압이 공감과 해방을 산출한다. 응당 그러한 공감이 사이비 공감이라고 반박할 수 있다. 과도하게 인간적인 관점을 취했다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다. 예컨대 스콜의 모친으로 나의 형과 함께 시골에 사는 파이 여사는 아예 목줄을 끼지 않고 살아간다. 나의 형과 나의 개의 엄마 사이에는 목줄을 통하지 않고도 유대가, 산책이 가능하다. 그러나 파이 여사에겐 억압이 부재하기에 해방도 없다. 스콜의 엄마 파이는 억압되지 않은 개이지만 해방된 개는 아닌 것이다. 

 

스콜과 나에겐 목줄만이 불가피하게 세상으로 나가는 동행의 조건이 된다. 우리에게, 너와 나에게 주어진 세상은 부자유를 인정함으로써 자유를 얻게 되는 구조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밖에 없다. 주어짐을 받아들인다면. 물론 주어짐은 너와 나의 선택이 아니었고, 특히 받아들임은 너의 선택이 아니었다. 

 

다만 받아들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고 할 때 나의 대칭점에 선 스콜 너는 결국 또 다른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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