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맞는 가을 공원은, 밤이라고 하여도 가로등 불빛 때문에 많이 어둡지는 않다. 도시의 인공적 자연은 도시인처럼 잠들지 않는다. 다만 조용하다. 사람도 없고, 개도 없고, 사위를 가득 채우던 그 매미 소리도 없다. 비 내리는 소리만 조용하다.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오직 힘들여 읊고 있건만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적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만 리의 마음이여
가을밤 이 시간에 내리는 비를 맞닥뜨리면 어릴 적 배운 최치원의 [秋夜雨中]이란 시를 떠올리게 된다. 외우는 몇 개 안 되는 한시 중의 하나일뿐더러, 시의 정조가 유행가 가사처럼 친숙해서일 게다.
가을비 내리는 삼경의 공원, 비가 듣지 않는 정자 안 평상 위에 살짝 엉덩이를 걸친다. 엉덩이에 한기까지는 아니어도 시린 기운이 전해진다. 잠깐 지난여름을 생각한다. “존재의 과거형은 가장 슬픈 말이야 세상에 그보다 슬픈 말은 없단다”(윌리엄 포크너 “소리와 분노”) 잠깐 최치원도 생각한다. 이런 밤에 생각한 ‘만리의 마음’이란 게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감각으론 최치원 시의 이미지나 형상화가 그다지 탁월하다고 하기 힘들어 보이지만, 동감(同感)의 수준은 매우 높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하는 기후의 총합 … 불순한 속성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문제”(〃)이기에 이런 ‘추야우중’엔 저절로 ‘만리의 마음’에 사로잡히게 되는 법인가 보다.
일종의 형용모순 같은 “개 없는 공원”에서 잠시 혼자 앉아 가을비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린다. “세로소지음”이라도 분노하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을 정도로 선현에게 지음이 중요했을까. 이제 돌아가면 현관에 다가가기 전부터 내 발자국 소리를 알아챈 스콜과 걸리버가 열심히 짖겠다. 늦은 밤엔 발걸음을 빨리해야 한다. 빨리 귀가를 마쳐야 주변에 개 짖는 소리를 덜 퍼뜨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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