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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마지막 가을비는 우산없이 맞고 싶어요"
[안치용의 프롬나드] "마지막 가을비는 우산없이 맞고 싶어요"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0.03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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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뚫고 오전에 볼 일을 보고 돌아오다 검은색 래브라도 레트리버가 비를 맞으며 어슬렁거리는 걸 보았다. 별로 소용없어 보였지만 가끔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 없앴다. 물기 제거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이 정도로 흠뻑 젖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몸짓 같았다. 그럼에도 비를 맞는 태도가 유유자적하였다. 그 옆엔 젊어 보이는 개 주인이 개목줄의 끝을 잡고 따라갔다. 나도 평소에 나 자신에게 종종 느끼는 것으로, 그에게서 산책 나선 개님을 수행하는 인간 몸종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튼 개가 행복해 보였고, 인간 또한 개 몸종질이 흔쾌해 보였다.

 

 

"마지막 가을비는 우산 없이 맞고 싶어요. 10월의 후회를 씻고 싶으니까요"란 소절이 떠오르는 어느 유행가. 개에게서야 씻어야 할 후회가 보이겠는가. 게다가 거의 10월의 첫날이었고, 꼬리까지 살랑거렸다. 개가 감기 들까만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남의 개 감기까지 걱정할 정도로 좋은 팔자가 아니라는 명백한 판단에 걱정을 거둬들였다.

 

진날 개 사귄 것 같다는 속담이 있다. 날 궂은날 개 사귄다고도 한다. 오늘처럼 비 오는 날 개 사귄 사람이 겪는 고충을 설명한다. 개가 사람과 사귀면 붙고 뛰어오르고 만지고 핥고, 뭐 (사람과 비슷하게) 그런다. 우비 입은 게 아니라면 진날 개 사귈 생각일랑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사귄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귀는 게 아니라 같이 사는 스콜과 내가, 오늘 같은 날 같이 나갔을 때 진날 서로 사귀는 사이로 파악되지는 않지 싶다. 처음으로 특별한 관계에 돌입한다는 그런 사귄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하여도, 진날 개 사귄 사람이 되려면, 개에 대한 관계설정이 유행가 가사처럼 뭔가 무방비 상태 비슷한 수준엔 도달하여야 하지 않을까. 예컨대 우산을 놓아버린다든지. 다시 말하면 장차 발생할 많은 피해를 감수할 만큼 그 관계에 애착이 깊거나, 그 피해를 예측하지 못할 만큼 순수해야 한다.

 

물리적으로는 진날 사람 사귀는 게 진날 개 사귀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나의 개에 국한하는지 모르겠지만) 개와 우산을 공유하며 같이 걷기는 거의 불가능하지만 사람과는 가능하다. 사람은 때로 굳이 제 한쪽 어깨를 적셔가며 다른 사람과 한 우산을 쓰고 걸으려고 한다. 용이함과 별개로, 나로 말하면 사람이든 개이든 진날에 사귀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개를 키운다. 그래서 맑은 날 그러하듯 진날에도 개를 산책시킨다. 그런 날에 (멀쩡한 정신의) 나는 (미친 게 아니니까) 우산을 쓰고 걷고, (나의 간절한 기대와 달리) 나의 개는 기어이 우산 밖에서 걸어간다. 세차게 비바람이 부는 날이 아니라면 내 어깨가 젖을 일이 없다. 반면 날씨에 따라 경중이 달라지지만 개는 대체로 젖는다. 귀가해서 수건으로 개의 젖은 몸을 닦아주는 일 또한 크게 보아 나의 산책을 구성한다. 지금 나에겐 한 우산을 함께 쓸 사람보다 한 우산을 함께 쓸 개가 더 절실하다. 그러나 나와 함께 사는 개는 그런 개가 아니다.

 

나는 우산 없이 비를 맞고 대신 개에게 우산을 씌우는 방법. 그것까지는 아직 고려하지 않았다. 모르겠다, 10월 말엔 어떨지. 개는 그저 걷고 젖어서 돌아온다. 나는 따라 걷다가 젖지 않은 채로 따라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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