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호 구매하기
[안치용의 프롬나드] 버거킹 매장 앞에서 루소를 만나면
[안치용의 프롬나드] 버거킹 매장 앞에서 루소를 만나면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0.07 01: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책은 거의 매일 아침에 나가지만, 좋은 계절에는 밤에도 나간다. 내가 어쩌다 저녁 무렵에 집에 있으면 스콜이란 녀석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본다. 그러다가 약간이라도 외출의 기미가 있다고 판단되면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주변을 맴돌다가, 내가 결정적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집어 들면 곧바로 월~ 월~ 월~ 짖는다. 자신도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루소는 산책하며 고독과 몽상을 이야기하였다. 걸은 곳 또한 자연미가 느껴지는 근대 프랑스의 전원이다. “산책”이란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의 책에서 길을 잃었다는 대목이 얼핏 기억난다. 개와 함께 하는 나의 산책에서는 길을 잃을 일이 없을뿐더러 고독과 몽상도 없다. 내가 산책한다기보다는 개가 산책하는 것이니 불가피하다. 산책코스라고 해봐야 네온사인 휘황찬란한 도심의 대로변이거나, 한적하다고 하여도 도시의 이면도로 정도이다. 나는 그나마 한갓진 이면도로보다는 8차선 아스팔트에 붙어 있는 인도를 선호한다. 사람이 많긴 하지만, 인도에서는 사람만 피하면 된다. 반면 이면도로에서는 사람과 차가 같이 다니기에 개까지 끼어들면 상당히 번잡하다. 개 두 마리를 데리고 가다 차와 맞닥뜨리면 성급하게 개 목줄을 당기게 된다. 이면도로 한복판에서 개가 느닷없이 볼일을 볼 때도 혼란스럽다. 목줄을 당길지, 오는 차에게 기다리고 손을 들어야 할지.

 

추석 연휴라 드는 생각일 텐데, 내가 의도하지 않게 종종 스콜과 걸리버에게 달구경을 시켜줬다는 사실이다. 개들과 밤마실 가는 길은 앞서의 이유로 거의 패턴화하여, 공원을 몇 바퀴 돌다가 첫 번째 골목을 나와서 대로변 인도에 접어들게 되는데, 거기서 짜잔 하고 둥근달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버거킹 매장이 입주한 3층 건물의 옥상에는 버거킹 로고가 들어간 광고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다. 달처럼 둥근 모양이다. 사실 스콜에게는 공중의 달보다 지상의 버거킹 전광판이 더 익숙하지 싶다. 또는 스콜에게는 버거킹의 둥근 옥상 전광판이나 조금 멀찍이서 어쩌다 둥글게 뜨는 달이나 비슷하게 보이지 않을까. 내 눈에도 그게 달처럼 보일 때가 있다. 달님이 아니라 버거킹님이 사는 현대의 달. 한두 번 먹어본 토끼고기보다는, 정체불명의 고기가 들긴 하였지만 “100% 순쇠고기와 신선한 야채의 풍부한 맛!”의 와퍼를 더 좋아하기에 고마운 버거킹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잃은 루소가 우연찮게 웜홀에 빠져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면 버거킹 옥상 전광판을 보고 무엇이라고 판단할까. 루소의 당혹과 판단을 고민하기에 앞서 그 고마운 둥근 ‘달’ 앞에서 자주 민망한 상황에 처한다는 점이 나에게 더 실존적 고민이다. 스콜이 ‘달’ 아래서, 더 정확하게는 버거킹 매장 입구 앞에서, 입구에서 2미터쯤 떨어진 플라타너스 밑동에다 더러 용변을 보기 때문이다. 매장에서 “100% 순쇠고기와 신선한 야채의 풍부한 맛!”을 즐기는 사람들이 버거킹의 넓은 통유리로 혹여라도 불편한 장면을 목격하게 될까 봐 나는 몸으로 ‘달’ 쪽을 가린다.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까지 막을 도리는 없다. 그러나 알다시피 당혹과 민망은 나의 몫이다. 볼일을 제대로 마쳤다면 스콜의 발걸음은 시원하고 꼬리는 더 날렵하게 흔들린다. 아 루소는? 그럴 땐 급한 대로 볼테르에게 맡기는 게 상책이겠다.

  

  • 정기구독을 하시면 온라인에서 서비스하는 기사를 모두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 합니다.
※ 후원 전 필독사항

비공개기사에 대해 후원(결제)하시더라도 기사 전체를 읽으실 수 없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구독 신청을 하시면 기사를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 5000원 이상 기사 후원 후 1:1 문의하기를 작성해주시면 1회에 한해 과월호를 발송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