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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위대하지도 음란하지도 않은,
[안치용의 프롬나드] 위대하지도 음란하지도 않은,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0.11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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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가 늦은 데다 살짝 비까지 내리다 보니 개와 함께 하는 산책은 글렀다. 우산을 쓰는 게 좋을지 드는 게 좋을지 애매한 강수에 고민하며 걷는 길. 하루 종일 거추장스럽게 들고 다닌 노고에 값하려면 지하철 7번 출구에서 집까지 500미터 남짓을 걸어야 할 터. 공짜 점심이 없듯 공짜 우산도 없어야 할까. 그러나 난 그놈의 신자유주의를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면의 잡념과 달리 겉보기엔 산성비로 인한 탈모 따위 두렵지 않은 씩씩한 중년으로 비쳤겠다. 오는 듯 마는 듯 가는 빗줄기를 머금은 가로등 불빛이 다정해 발걸음을 공원으로 꺾었다. 내가 혼자 공원을 돌아다닌 걸 알면 스콜은 배신감을 느끼겠지. 어릴 때 아들이 내가 밖에서 면 종류를 먹고 오면 “아빠 국수주의자 아들을 두고 혼자 면을 먹고 들어오는 건 배신이에요”라고 말한 상황과 비슷할 법하다. 스콜한테는 못 알아들은 척하여도 알리바이가 성립한다. 완전범죄.

 

아무도 없을 줄 알았지만, 저 구석에 희미한 물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남녀가 엉켜있다. 정자의 평상 위로 어둑어둑 보이는 그들의 실루엣이 비 오는 날이라 그런지 음란하지 않다. 무엇을 해도 음란할 나이는 아니긴 하다.

 

비 오는 밤 공원의 탐방 즉각 중단.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 발걸음을 출구로 돌렸다. 저기 은행나무 밑에 열매가 수북하다. 자연은 쉬는 법이 없다. 그 자린 스콜이 항상 오줌 누는 자리인데, 스콜의 오줌이 거름이 되어 저렇게 많이 은행열매가 열렸을까.

 

저작권자인 스콜이 주워갈 리는 없고, 결국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은행열매는 쓰레기통에서 모이겠지. 향기로 치면 가을은 아름다운 계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비 오는 밤, 초가을 공원 입구의 은행나무는 열매나 잎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지난여름이 위대하지는 않았지만 가을을 열었다. 또 한 계절을 견뎌주었다는 대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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