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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금욕주의적인 별에서 부르는 검은 노래
[안치용의 프롬나드] 금욕주의적인 별에서 부르는 검은 노래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0.22 17: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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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21호 태풍 란이 올라온다고 한다. 아침 일찍 개를 데리고 집을 나서기 전에 창밖을 보니 딱히 하늘이 흐린 것 같지는 않았다. 비가 본격적으로 내릴 것 같지도 않았다. 이제는 망설임 없이 긴 운동복 바지를 입는다. 어느 사이엔가 반바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바람막이를 걸쳤지만 지퍼를 끝까지 올리지 않아서 드러난 목에 바람이 새 스카프처럼 감긴다. 목을 감는 바람의 느낌이 영화 화양연화의 한 장면인 양 쌔끈하다. 

 

이전 계절의 바람이 어느새 망각되고 다른 계절의 바람에 방심한 채 목을 내어놓는다. 목이 더 길면 이 계절에 잘 어울렸으리라. 목이 긴 여인이라면 이 계절이 더 행복할까. ‘개 혐오’가 추가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의 개들은 어제와 다름없이 할 일을 한다. 녀석들의 흔적을 치우려고 주머니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꺼내다 놓쳤다. 휙 저만치 날아간다. 어떤 색이다 특정하기 힘든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야속하게 달아나는 검은, 

 

욕망. 기억. ‘대 혐오’의 시대의 하늘을 질주하는 수수한 일탈. 하늘의 소실점으로 검은 점이 퍼덕거리며 날아가는 동안 나란한 두 개의 개꼬리는 깃발처럼 나부낀다. 

 

내가 지금 내 아들의 나이 즈음이었을 때 나는 유치환의 깃발을 처음 읽었다. 내가 언제 처음으로 태풍의 북상 소식을 들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유치환의 그 시를 처음 읽은 순간은 기억한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지금 나라면, 내가 깃발을 고쳐 쓴다면, 어쩌면 “아”에다 돼지꼬리 표시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나의 개들의 몸통 끝에 달린 깃발이 낮게, 애매한 날씨의 가을날 아침답게 유장하게 흔들린다. 꼬리 끝으로 빗방울 하나 툭 하고 떨어져야 어울릴 것 같은데

 

“지구는 본래 금욕주의적인 별”(니체)이라서, 인간은 그래서 개처럼 당당하게 꼬리를 꺼내 들지 못하고 몸의 끝에다 은밀하게 꼬리뼈로 구겨 넣은 것일까. 이런 날엔 제 몸 안에서라도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꼬리를 흔들어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올해 들어 20개의 태풍이 그냥 지나갔고 21번째 태풍이 저 북태평양 어디에선가 막연한 통지만 남발한 일요일 아침, 검은색 비닐 (똥) 봉지를 날려 보낸 가을 아침, 나의 개의 몸에 달린 꼬리는 바람 센 날의 구미초(狗尾草)인 양 허무를 의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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