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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프롬나드] 남자는 나무를 본다
[안치용의 프롬나드] 남자는 나무를 본다
  • 안치용 / 한국CSR연구소장
  • 승인 2017.10.29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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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고 일요일 저녁을 나른하게 늘어지려는데, 녀석들이 내 주변을 돈다. 그들에게서 밤마실을 재촉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사실 나갈 시간이 되긴 하였지만 위장을 채운 무게가 발목을 잡는다. 위장에게 발목 잡히다가 인생 잡히는 거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몸을 일으킨 건 아니었다. 개들의 저강도 압박에 시달리느니 한 번에 털고 나서 편하게 쉬자는 편의적 발상이었다.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다. 겨울 같다. 지난여름을 그리워하다가 어느새 지난가을을 그리워하게 되는 게 사람 사는 모습이렸다. 긴 바지는 너무나 당연했고 겁을 먹어서 톡톡한 것으로 아래를 감쌌다. 하지만 아직 10월에 파카를 입으면 모양이 빠질까 봐 두툼한 청자켓을 그 위에 걸쳤다. 얇은 바람막이를 고르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집을 나서자마자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깨닫는다. 바람 자체의 강도가 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파고드는 바람의 찬 기운이 장난이 아니다. 공원 초입의 나무. 내 머리카락보다 훨씬 적게 남은 잎사귀들로 대충 가리고 몸을 떠는 모습이 애처롭다. 유익한 산책이 되기 힘들어 보인다.

 

나무가 떠는 모습이 애처럽다면 파도인 양 개털이 바람에 구불거리는 미시 역동은 꽤 즐겁다. 높이 매달려 어렵사리 녹색을 지켜내고 있는 이파리들이 몸을 떠는 광경엔 모종의 불화가 개입한다. 반면 개털이, 차다 하여도 아직은 분명 가을바람에 낮고 유연하게 웨이브를 만들어내는 역동은 조화의 영역에 속한다.

 

공원엔 평소보다 적은 손님이 있다. 나처럼 개에 끌려 나온 인간이 몇 명. 그 인간의 손끝에 이어진 개가 몇 마리. ‘개 혐오’의 시대에 인간의 손끝을 벗어나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개 또한 목격된다. 그 개의 이름을 알고, 이름은 모르지만 주인의 얼굴을 안다. 그는 늘 개를 풀어놓고 자기 운동을 한다. 개똥을 치우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운동하다가 자신의 개가 여자(들)로부터 환대를 받으면 하던 동작을 멈추고 갑자기 개 이름을 부르며 여자(들) 쪽으로 접근하던 내 또래 한국 남자. 추운지, 운동을 다 마쳤는지, 아니면 여자 고객이 안 보여서인지 그이가 빨리 귀가한다.

 

목줄을 맨 나의 개들과 다른 목줄에 매인 개들이 반갑게 서로를 맞는다. 노골적인 성 검증부터 개의 에티켓은 인간과 다르다. 개들이 사교하는 동안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관행에 따른 용어로) 견주가 중년 한남일 때, 귀가해 버린 특출 난 예외를 빼고는 그들은 대체로 시각을 높여서 나무를 본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의 개들이 상대하는 개들의 목줄 끝을 외면한다. 여전히 여름 복장인 개들이 교류하는 사이에 헐벗어 가는 플라타너스에서 이파리가 몇 개 떨어진다. 떨어지려고 잎이 나지는 않지만 또한 지지 않으면 잎이 아니다,라고 돌아가는 길에 나의 개들에게 말한다. 개들이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나를 보며 경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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